훈민정음은 세종이 단독으로 창제했다. 당대 모든 자료에 그렇게 기록됐다. 이를 믿지 못한 채 후대의 오해에 살을 붙여서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한글을 만들었다는 협찬설이 단독 창제 사실보다 더 확산됐다. 승려 신미가 한글 창제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억측도 돌고 있다.
다른 곡해는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가 중화 질서를 심히 거스르는 시도였고, 그래서 신하들이 나라의 존립이 위태로워질까 봐 결사 반대했다는 것이다. 또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목적은 일반 백성이 소통할 문자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사대부들이 한자음을 제대로 익혀 중국인들과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도록 하는 데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 글에서는 이 중 훈민정음을 창제한 가장 중요한 목적은 정확한 한자음을 공유하기 위해서였다는 오해를 따져본다.
이 오해를 확산한 인물 중 이영훈 이승만학당 교장이 있다. 그는 책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중 ‘백성에게 바른 한자음을 가르치다’에서 그렇게 주장했다.
먼저 우리에게 익숙한 한글 해설서 〈훈민정음 해례〉에 기록된 세종의 창제 취지를 살펴보자.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어린(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끝내 자기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익혀 날마다 편하게 쓰도록 하고자 할 따름이다.”
이를 이영훈 교장은 “어린 백성들이 중국과 말이 달라서 중국인들과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되지 않기 때문에…그렇게 돼 있다”고 해석한다. 이어 ‘어린 백성’을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왕의 통치를 받는 대부(大夫), 사(士) 계급을 말한다. 문자를 사용해 중국과 외교 관계를 갖거나 시문을 짓거나 하는 사람들이 중국과 말이 달라서, 음이 달라서 뜻이 안 통한다는 뜻이다. 노비까지 포함하는 전 민중적인 그런 의미의 백성은 아니라고 본다.” (출처: 중앙일보, 역사에서는 성공이 실패의 어머니, 2018.04.20.)
한문을 익히고 구사하는 선비들이 한자음을 정확히 알면 중국인과의 의사소통이 더 원활해지는 측면은 분명 있다. 세종은 1448년 한자음을 바로잡아 〈동국정운〉을 펴내도록 했다.
그렇다고 해서 정확한 한자음 공유를 훈민정음 창제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첫째 목적은 세종이 몸소 밝힌 것처럼, 일반 백성이 문자로 의사소통을 하도록 돕는 데 있었다.
◇예조판서, 소송 등 국내 소통 강조
이영훈 교장의 해석은 곡해다. 이를 당시 예조판서 정인지가 〈훈민정음 해례〉에 쓴 서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정인지는 “대개 중국 이외 나라의 말에 해당하는 글자가 없어 중국 문자를 빌려 사용하고 있다”면서 “옛날 신라 설총이 이두를 만들어 관청과 민간에서 지금도 쓰고 있으나 어떤 것은 어색하고 어떤 것은 우리말과 들어맞지 않아 실제 말의 만분의 일도 반영하지 못한다”고 전한다.
이 글에서는 이 중 훈민정음을 창제한 가장 중요한 목적은 정확한 한자음을 공유하기 위해서였다는 오해를 따져본다.
이 오해를 확산한 인물 중 이영훈 이승만학당 교장이 있다. 그는 책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중 ‘백성에게 바른 한자음을 가르치다’에서 그렇게 주장했다.
먼저 우리에게 익숙한 한글 해설서 〈훈민정음 해례〉에 기록된 세종의 창제 취지를 살펴보자.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어린(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끝내 자기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익혀 날마다 편하게 쓰도록 하고자 할 따름이다.”
이를 이영훈 교장은 “어린 백성들이 중국과 말이 달라서 중국인들과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되지 않기 때문에…그렇게 돼 있다”고 해석한다. 이어 ‘어린 백성’을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왕의 통치를 받는 대부(大夫), 사(士) 계급을 말한다. 문자를 사용해 중국과 외교 관계를 갖거나 시문을 짓거나 하는 사람들이 중국과 말이 달라서, 음이 달라서 뜻이 안 통한다는 뜻이다. 노비까지 포함하는 전 민중적인 그런 의미의 백성은 아니라고 본다.” (출처: 중앙일보, 역사에서는 성공이 실패의 어머니, 2018.04.20.)
한문을 익히고 구사하는 선비들이 한자음을 정확히 알면 중국인과의 의사소통이 더 원활해지는 측면은 분명 있다. 세종은 1448년 한자음을 바로잡아 〈동국정운〉을 펴내도록 했다.
그렇다고 해서 정확한 한자음 공유를 훈민정음 창제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첫째 목적은 세종이 몸소 밝힌 것처럼, 일반 백성이 문자로 의사소통을 하도록 돕는 데 있었다.
◇예조판서, 소송 등 국내 소통 강조
이영훈 교장의 해석은 곡해다. 이를 당시 예조판서 정인지가 〈훈민정음 해례〉에 쓴 서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정인지는 “대개 중국 이외 나라의 말에 해당하는 글자가 없어 중국 문자를 빌려 사용하고 있다”면서 “옛날 신라 설총이 이두를 만들어 관청과 민간에서 지금도 쓰고 있으나 어떤 것은 어색하고 어떤 것은 우리말과 들어맞지 않아 실제 말의 만분의 일도 반영하지 못한다”고 전한다.
이어 한글은 “지혜로운 자는 아침 한나절이면 배우고 우매한 자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다”며 “이 글자로써 한문을 풀이하면 그 뜻을 알 수 있고 이것으로 송사를 다루면 그 사정을 알 수 있다”고 활용 방향을 제시했다.
정인지는 한자는 어렵고, 쉽다는 이두도 우리말을 나타내는 데에는 큰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어 훈민정음은 사대부뿐 아니라 ‘우매한 자’에게 도움이 되는 문자이며 중국과의 소통이 아니라 송사 같은 조선 내 백성과 직결된 일에 유용하다고 설명한다. 정인지는 사대부의 중국인과의 소통은 언급하지 않았다.
문자를 활용한 소통을 백성의 의사 표현과 조정에서 백성에게 전하는 소통으로 구분할 수 있다. 세종은 〈훈민정음 해례〉에서 전자를 강조했고, 후자는 〈삼강행실도〉 긴행과 〈삼강행실도 언해〉 구상에서 드러난다.
〈삼강행실도〉는 1434년에 발행·배포됐는데, 그 계기는 142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428년에 무슨 일이 발생했나?
그해 〈조선왕조실록〉 10월 3일자 기사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경연에 나아갔다. 임금이 일찍이 진주 사람 김화가 그 아비를 살해했다는 사실을 듣고, 깜짝 놀라 낯빛이 변하고는 곧 자책하고 드디어 여러 신하를 소집하여 효제를 돈독히 하고, 풍속을 후하게 이끌도록 할 방책을 논의하게 하니, (중략) 이에 이르러 임금이 직제학 설순에게 이르기를, “이제 세상 풍속이 박악하여 심지어는 자식이 자식 노릇을 하지 않는 자도 있으니, 〈효행록〉을 간행하여 이로써 어리석은 백성들을 깨우쳐 주려고 생각한다.””
정인지는 한자는 어렵고, 쉽다는 이두도 우리말을 나타내는 데에는 큰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어 훈민정음은 사대부뿐 아니라 ‘우매한 자’에게 도움이 되는 문자이며 중국과의 소통이 아니라 송사 같은 조선 내 백성과 직결된 일에 유용하다고 설명한다. 정인지는 사대부의 중국인과의 소통은 언급하지 않았다.
문자를 활용한 소통을 백성의 의사 표현과 조정에서 백성에게 전하는 소통으로 구분할 수 있다. 세종은 〈훈민정음 해례〉에서 전자를 강조했고, 후자는 〈삼강행실도〉 긴행과 〈삼강행실도 언해〉 구상에서 드러난다.
〈삼강행실도〉는 1434년에 발행·배포됐는데, 그 계기는 142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428년에 무슨 일이 발생했나?
그해 〈조선왕조실록〉 10월 3일자 기사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경연에 나아갔다. 임금이 일찍이 진주 사람 김화가 그 아비를 살해했다는 사실을 듣고, 깜짝 놀라 낯빛이 변하고는 곧 자책하고 드디어 여러 신하를 소집하여 효제를 돈독히 하고, 풍속을 후하게 이끌도록 할 방책을 논의하게 하니, (중략) 이에 이르러 임금이 직제학 설순에게 이르기를, “이제 세상 풍속이 박악하여 심지어는 자식이 자식 노릇을 하지 않는 자도 있으니, 〈효행록〉을 간행하여 이로써 어리석은 백성들을 깨우쳐 주려고 생각한다.””
효행록〉 증보판을 낸다는 구상은 〈삼강행실도〉로 확장된다. 세종은 백성을 교화한다는 목적을 최대한 달성하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글과 함께 삽화를 넣어 편집한다는 아이디어를 냈다. 그렇게 하고도 어떻게 하면 책의 내용을 백성들에게 더 잘 전할까 고심했다. 그래서 책 발행·배포에 그치지 않고 그 내용을 가르치도록 했다.
세종은 〈삼강행실〉을 1434년 4월 27일 반포하고 학식 있는 자들로 하여금 그 내용을 가르치도록 하라는 교서를 짓게 했다고 실록은 전한다. 교서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아직도 쉽게 깨달아 알지 못할까 염려하여, 그림을 붙이고 이름하여 〈삼강행실〉이라 하고, 인쇄하여 널리 펴서 거리에서 노는 아이들과 골목 안 여염집 부녀들까지도 모두 쉽게 알기를 바라노니, 펴 보고 읽는 가운데에 느껴 깨달음이 있게 되면, 인도하여 도와주고 열어 지도하는 방법에 있어서 도움됨이 조금이나마 없지 않을 것이다. 다만 백성들이 문자를 알지 못하여 책을 비록 나누어 주었을지라도, 남이 가르쳐 주지 아니하면 역시 어찌 그 뜻을 알아서 감동하고 착한 마음을 일으킬 수 있으리오.”
◇백성에게 쉬운 문자 오랫동안 구상
여기서 “백성들이 문자를 알지 못하여(民庶不識文字)”라는 문제 인식이 등장한다. 백성 교화에 열과 성을 다했던 세종은 한자의 장벽을 크게 인식하고 있었다. 훈민정음을 창제하기 9년 전이었다.
1443년, 세종은 마침내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한글로 간행하고 싶은 도서 목록이 세종의 머릿속에 완성돼 있었다고 나는 짐작한다. 그 목록에는 당연히 〈삼강행실도 언해〉도 들어 있었다. 이는 실록 중 유명한 1444년 2월 20일자 최만리 등의 상소문 기사로 전해졌다. 이 기사는 앞서 오간 세종과 정창손 간 대화를 이렇게 기록했다.
“먼젓번에 임금이 정창손에게 하교하기를,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도〉를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 하였는데, (이하 세종이 전하는 정창손의 답변과 이에 대한 세종의 비판) 정창손은 말하기를, ‘〈삼강행실도〉를 반포한 후에 충신·효자·열녀의 무리가 나옴을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 여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꼭 언문으로 번역한 후에야 사람이 모두 본받을 것입니까’ 하였으니, ‘이따위 말이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용속한 선비이다’ 하였다.”
세종은 상소문을 작성하고 올리는 데 참여한 최만리 이하 학사들을 모두 의금부로 보냈다가 다음 날 석방하도록 했으나, 정창손만 파직시켰다. 훈민정음 반대에서 나아가 자신이 오랫동안 구상한 〈삼강행실도 언해〉가 교화 효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라고 예단한 그를 가장 괘씸하게 여겼으리라고 짐작된다.
이처럼 오랫동안 추구해온 백성과의 소통에 비하면 정확한 한자음을 공유한다는 목적은 이차적인 것이었다.
그럼 〈삼강행실도 언해〉 발간은 어떻게 됐을까? 세종의 증손자인 성종 대에 이루어졌다. 세종은 〈용비어천가〉(1445), 〈훈민정음 해례〉(1446), 〈동국정운〉(1448), 〈월인천강지곡〉(1449)을 연달아서 내게 했다. 이 중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은 몸소 저술했다. 〈월인천강지곡〉을 발간한 그다음 해인 1450년에 53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그가 몇 년 더 활동했다면 〈삼강행실도 언해〉도 냈을 것이다.
최만리가 상소문에서 걱정한 것처럼, 1444년에도 세종은 병환에 시달렸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라는 제약 속에서 발행 순서를 정했을 것이다. 〈훈민정음 해례〉 다음이 〈동국정운〉이라는 순서는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목적의 중요도를 반영한 결과였으리라.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10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세종은 〈삼강행실〉을 1434년 4월 27일 반포하고 학식 있는 자들로 하여금 그 내용을 가르치도록 하라는 교서를 짓게 했다고 실록은 전한다. 교서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아직도 쉽게 깨달아 알지 못할까 염려하여, 그림을 붙이고 이름하여 〈삼강행실〉이라 하고, 인쇄하여 널리 펴서 거리에서 노는 아이들과 골목 안 여염집 부녀들까지도 모두 쉽게 알기를 바라노니, 펴 보고 읽는 가운데에 느껴 깨달음이 있게 되면, 인도하여 도와주고 열어 지도하는 방법에 있어서 도움됨이 조금이나마 없지 않을 것이다. 다만 백성들이 문자를 알지 못하여 책을 비록 나누어 주었을지라도, 남이 가르쳐 주지 아니하면 역시 어찌 그 뜻을 알아서 감동하고 착한 마음을 일으킬 수 있으리오.”
◇백성에게 쉬운 문자 오랫동안 구상
여기서 “백성들이 문자를 알지 못하여(民庶不識文字)”라는 문제 인식이 등장한다. 백성 교화에 열과 성을 다했던 세종은 한자의 장벽을 크게 인식하고 있었다. 훈민정음을 창제하기 9년 전이었다.
1443년, 세종은 마침내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한글로 간행하고 싶은 도서 목록이 세종의 머릿속에 완성돼 있었다고 나는 짐작한다. 그 목록에는 당연히 〈삼강행실도 언해〉도 들어 있었다. 이는 실록 중 유명한 1444년 2월 20일자 최만리 등의 상소문 기사로 전해졌다. 이 기사는 앞서 오간 세종과 정창손 간 대화를 이렇게 기록했다.
“먼젓번에 임금이 정창손에게 하교하기를,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도〉를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 하였는데, (이하 세종이 전하는 정창손의 답변과 이에 대한 세종의 비판) 정창손은 말하기를, ‘〈삼강행실도〉를 반포한 후에 충신·효자·열녀의 무리가 나옴을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 여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꼭 언문으로 번역한 후에야 사람이 모두 본받을 것입니까’ 하였으니, ‘이따위 말이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용속한 선비이다’ 하였다.”
세종은 상소문을 작성하고 올리는 데 참여한 최만리 이하 학사들을 모두 의금부로 보냈다가 다음 날 석방하도록 했으나, 정창손만 파직시켰다. 훈민정음 반대에서 나아가 자신이 오랫동안 구상한 〈삼강행실도 언해〉가 교화 효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라고 예단한 그를 가장 괘씸하게 여겼으리라고 짐작된다.
이처럼 오랫동안 추구해온 백성과의 소통에 비하면 정확한 한자음을 공유한다는 목적은 이차적인 것이었다.
그럼 〈삼강행실도 언해〉 발간은 어떻게 됐을까? 세종의 증손자인 성종 대에 이루어졌다. 세종은 〈용비어천가〉(1445), 〈훈민정음 해례〉(1446), 〈동국정운〉(1448), 〈월인천강지곡〉(1449)을 연달아서 내게 했다. 이 중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은 몸소 저술했다. 〈월인천강지곡〉을 발간한 그다음 해인 1450년에 53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그가 몇 년 더 활동했다면 〈삼강행실도 언해〉도 냈을 것이다.
최만리가 상소문에서 걱정한 것처럼, 1444년에도 세종은 병환에 시달렸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라는 제약 속에서 발행 순서를 정했을 것이다. 〈훈민정음 해례〉 다음이 〈동국정운〉이라는 순서는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목적의 중요도를 반영한 결과였으리라.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10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