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평범성’을 〈상식으로 보는 세상의 법칙: 심리편〉은 이렇게 설명한다.
독일 출신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1963년 써낸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이 개념을 제시했다. 아렌트는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참관하고 이 책을 저술했다.
이 책에서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두 곳에 썼다. 그중 이 개념을 설명한 ‘후기’의 한 대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순전한 무사유였다.”
아렌트가 이렇게 판단한 근거는 무엇인가. 관련된 것으로 짐작되는 아이히만의 재판정 진술은 다음과 같다.
“나는 아돌프 히틀러가 만든 유대인 절멸 작동기계의 작은 톱니바퀴 중 하나였을 뿐입니다.” “1946년까지, 즉 빌헬름 회틀이 나를 유대인 500만~600만명을 죽인 사람이라고 낙인찍을 때까지 저는 무명이나 다름없었죠.”
빌헬름 회틀은 나치 친위대(SS)의 해외정보 부서에서 근무했다. 그는 1945년 뉘른베르크 국제군샂재판에 제출한 진술서에서 “1944년 8월 아이히만으로부터 홀로코스트의 규모를 모두 600만명이라고 들었다”고 밝혔다. 이는 역사학계의 일반적인 추정치와 일치한다.
어떤 인물의 범죄를 분석할 때, 그가 저지른 행위와 관련 발언이 아니라 그의 생명이 걸린 재판에서 한 언행을 기본 자료로 삼는 것이 합당할까? 몇 발짝 앞에 사형이 걸린 인물은 대부분 어떤 언행을 보일까? 이에 대해 책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은 다음 의문문으로 답을 대신한다. “사형될 위험에 처했는데 누군들 그렇게 꽁무니를 빼고 싶지 않겠는가?”
이 책은 아이히만이 “사악한 이들은 나치 정권과 다른 사람들이었지 자신은 아니었고, 그가 아돌프 히틀러 아래에서 경력을 쌓은 것은 그저 우연일 뿐이라고 주장했다”고 전한다. 아이히만은 결국 재판 참관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인상을 주는 데 성공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사탄에게서 보이는 카리스마라고는 전혀 없는 초라한 인물이었다. 공포와 충격, 그리고 무엇보다 수백만 명을 죽음으로 이끌었던 친위대 중령 아이히만은 명령에 따른 긴급 상황이니 충성 맹세니 하는 이야기로 사람들의 관심을 마비시켰다.’
마비된 참관인 중 대표적인 인물이 한나 아렌트였다. 이 책은 아이히만이 아렌트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 “평균 지능을 가진 사람이라도 고도의 지능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기대가 충족되는 것을 보고싶어하는 욕구를 자극해 그로 하여금 자가당착에 빠지도록 만들 수 있다”고 요약했다.
아렌트가 관찰한 법정의 아이히만은 유대인 학살에 적극 나선 친위대 중령 아이히만과 판이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연기에 넘어갔지만 법원은 아이히만의 법정 발언보다 홀로코스트 당시 관련 사실들을 살펴봤다.
아이히만은 어떤 경력을 거쳐 친위대에서 무슨 보직을 맡아 무엇을 했나?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이 전하는 사실들은 다음과 같다. 아이히만은 1906년 태어났다. 정유회사 세일즈맨으로 일하다 1932년 나치 친위대에 가입했다. 1934년 친위대 내 첩보기관인 보안국으로 진입해 이후 3년여간 유대인 사회를 조사했다. 1938년 빈에 ‘유대인 이민 중앙사무소’를 설치하고 그 책임자가 됐다.
마비된 참관인 중 대표적인 인물이 한나 아렌트였다. 이 책은 아이히만이 아렌트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 “평균 지능을 가진 사람이라도 고도의 지능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기대가 충족되는 것을 보고싶어하는 욕구를 자극해 그로 하여금 자가당착에 빠지도록 만들 수 있다”고 요약했다.
아렌트가 관찰한 법정의 아이히만은 유대인 학살에 적극 나선 친위대 중령 아이히만과 판이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연기에 넘어갔지만 법원은 아이히만의 법정 발언보다 홀로코스트 당시 관련 사실들을 살펴봤다.
아이히만은 어떤 경력을 거쳐 친위대에서 무슨 보직을 맡아 무엇을 했나?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이 전하는 사실들은 다음과 같다. 아이히만은 1906년 태어났다. 정유회사 세일즈맨으로 일하다 1932년 나치 친위대에 가입했다. 1934년 친위대 내 첩보기관인 보안국으로 진입해 이후 3년여간 유대인 사회를 조사했다. 1938년 빈에 ‘유대인 이민 중앙사무소’를 설치하고 그 책임자가 됐다.
1939년에는 프라하에도 유대인 이민 중앙사무소를 설치했다. 유대인 이민 중앙사무소는 해당국 유대인을 수도로 모은 뒤 가능한 한 빨리 국외로 이주시키는 업무를 벌였다. 1939년 12월 국가보안본부(RSHA)의 4국으로 옮겼다. (앞서 조직된 게슈타포(국가비밀경찰)가 RSHA가 만들어지면서 4국으로 편입됐다.) 1940년 1월부터 유대인 강제이송을 담당했으며 1941년 중령으로 승진했다.
나치는 전쟁 전부터 유대인과 정치적 반대자 등을 강제수용소에 가뒀고, 전쟁 중에는 게토와 강제노동수용소로 대규모 이송했다. 1941년 말부터는 유대인을 대량 살해하기 위한 절멸수용소를 가동했다. 아우슈비츠는 1940년 강제수용소로 문을 열었고, 이후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가 최대 규모의 절멸수용소가 됐다.
아이히만이 지휘한 강제이송 중 몇몇을 들면, 그는 1941년 11월 베를린 등지의 유대인 5000명을 동부로 강제이송했다. 이송된 유대인은 강제노동을 거쳐 대량학살됐고, 강제이송을 조직한 책임자는 아이히만이었다. 당시 그는 최종 해결이라는 말을 자신이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1944년 3월 독일이 헝가리를 점령하자 아이히만은 특수부대를 이끌고 부다페스트에 진입했다. 아이히만의 조직은 헝가리 유대인들의 강제이송을 계획하고 감독했다. 1944년 5월부터 7월 9일까지 헝가리 유대인 약 44만 명이 강제이송됐고 이들 중 대부분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내졌다.
종전 이후 아이히만은 미군에게 포로로 잡혔으나, 수용소에서 탈출했고 이름을 바꾸며 도피했다. 1950년 아르헨티나로 이주했다. 1960년 이스라엘 정보기관이 그의 위치를 확인했고, 5월 이스라엘 요원들이 그를 붙잡아 이스라엘로 압송했다. 예루살렘에서 전쟁범죄 등 15가지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판사들은 모든 혐의에 유죄 판결을 내렸고, 그는 1962년 6월 1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재판은 1심과 항소심으로 진행됐다. 1심 재판은 배심원 없이 이스라엘 직업판사 세 명으로 구성된 예루살렘 지방법원 특별재판부가 맡았다. 세 판사는 1961년 12월 만장일치로 아이히만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사형을 선고했다. 항소는 이스라엘 대법관 다섯 명이 심리했다. 대법원은 1962년 5월 1심 판결과 사형을 만장일치로 확정했다.
아이히만 1심 판결문의 핵심은 그가 ‘작은 톱니바퀴’가 아니라, 상부의 포괄적인 명령을 구체적인 학살 절차로 바꾸어 부하들에게 실행시킨 중추적 지휘자였다는 것이다. 요지를 열거하면, 아이히만은 작은 톱니바퀴가 아니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손에 들린 꼭두각시가 아니었다, 그의 위치는 줄을 당기는 사람들 가운데 있었다, 그는 상부의 일반 지침 아래에서 폭넓은 재량권을 행사했다, 명령이 그의 아래로 내려가면서 구체화됐다. 범죄를 중단할 시간이 충분했으나 그는 멈추지 않았고, 갈수록 활동을 확대했다, 단순한 맹목적 복종만으로는 그의 효율성과 헌신을 설명할 수 없다 등이다.
종전 이후 아이히만은 미군에게 포로로 잡혔으나, 수용소에서 탈출했고 이름을 바꾸며 도피했다. 1950년 아르헨티나로 이주했다. 1960년 이스라엘 정보기관이 그의 위치를 확인했고, 5월 이스라엘 요원들이 그를 붙잡아 이스라엘로 압송했다. 예루살렘에서 전쟁범죄 등 15가지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판사들은 모든 혐의에 유죄 판결을 내렸고, 그는 1962년 6월 1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재판은 1심과 항소심으로 진행됐다. 1심 재판은 배심원 없이 이스라엘 직업판사 세 명으로 구성된 예루살렘 지방법원 특별재판부가 맡았다. 세 판사는 1961년 12월 만장일치로 아이히만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사형을 선고했다. 항소는 이스라엘 대법관 다섯 명이 심리했다. 대법원은 1962년 5월 1심 판결과 사형을 만장일치로 확정했다.
아이히만 1심 판결문의 핵심은 그가 ‘작은 톱니바퀴’가 아니라, 상부의 포괄적인 명령을 구체적인 학살 절차로 바꾸어 부하들에게 실행시킨 중추적 지휘자였다는 것이다. 요지를 열거하면, 아이히만은 작은 톱니바퀴가 아니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손에 들린 꼭두각시가 아니었다, 그의 위치는 줄을 당기는 사람들 가운데 있었다, 그는 상부의 일반 지침 아래에서 폭넓은 재량권을 행사했다, 명령이 그의 아래로 내려가면서 구체화됐다. 범죄를 중단할 시간이 충분했으나 그는 멈추지 않았고, 갈수록 활동을 확대했다, 단순한 맹목적 복종만으로는 그의 효율성과 헌신을 설명할 수 없다 등이다.
재판부는 아이히만이 친위대 사령관 하인리히 히믈러나 국가보안본부(RSHA) 본부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같은 최고 정책결정자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RSHA의 제4국 게슈타포는 하인리히 뮐러가 이끌었고, 아이히만은 그 아래 B부 4과장으로 유대인 강제이송을 담당했다. 아이히만은 B부에 속했으나 유대인 절멸에 대한 사안은 B부 부서장을 거치지 않고 직접 뮐러에게 보고하고 지시를 받았다.
판결문은 나치의 명령체계가 책임 있는 명령자와 책임 없는 복종자로 양분된다는 주장도 배척했다. 히틀러를 제외하면 나치 조직의 모든 구성원은 위에서 명령을 받는 동시에 아래로 명령을 내렸다. 상부에서 내려온 추상적인 명령은 여러 조직 단계를 거치면서 점점 구체화돼 실제 행동이 됐다. 아이히만은 특히 상부의 명령을 포괄적이고 적극적으로 이행한 절멸의 실행자였다. 조직을 동원해 각국 유대인의 수와 소재를 파악했고, 체포와 집결 절차를 마련했으며, 국영철도와 협의해 열차를 확보했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낮은 계급을 내세워 책임을 축소하려 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공식 계급보다 실제로 행사한 권한을 중시했다. 그는 베를린의 책상에 앉아 전보와 전화 등 당시의 통신수단을 이용해 유럽 각지의 ‘유대인 문제 담당관’을 통제했다. 필요한 경우에는 직접 작전 현장을 방문했다. SS 중령급이라는 직급에도 불구하고 여러 나라에 파견된 담당관들이 그의 지시를 받고 강제이송을 수행했다.
재판부는 단순한 맹목적 복종만으로 아이히만이 그토록 효율적이고 헌신적으로 범죄를 수행한 사실을 설명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유대인 절멸을 중요한 국가적 임무라고 믿었으며,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지속해서 방법을 연구하고 부하들을 감독ᆞ독려했다. 1944년 헝가리에서의 행동은 아이히만의 독자적 의지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냈다. 독일 최고지도부에서 일부 헝가리 유대인의 출국을 허용할 가능성이 제기됐지만, 아이히만은 이에 반대했다.
재판정의 아이히만은 평범한 관료를 연기한 학살 책임자였다. 그가 학살 책임을 피하려고 쓴 가면은 ‘악의 평범성’이라고 오해됐다. 아렌트는 그 가면에서 무사유를 읽었지만, 법원은 가면 뒤의 의도된 행동을 보았다. AI 시대의 리더에게 특히 요구되는 것도 그럴싸한 말이나 인상에 현혹되지 않고 실체를 찾고 확인하는 사고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9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