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비가 왔냐는 듯 날이 맑았던 지난 4월 23일 오전 10시, 8명의 청년이 광주 무등산국립공원 원효사 입구에 모였다. 광주광역시 은둔형외톨이지원센터의 ‘명랑한 은둔자 모임’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은둔형외톨이란 심리적 어려움으로 한정된 공간에서만 생활하며 사회적 고립을 겪는 이들이다.
이날은 명랑한 은둔자 모임 ‘무등산 속마음산책’의 두 번째 시간이었다. 천천히 무등산을 산책하며 심신의 안정을 찾고 타인과 긍정적인 대인관계를 형성하자는 취지다. 무등산 속마음산책은 무등산국립공원사무소와의 협업 프로그램으로, 국립공원 직원이 고립은둔 당사자들과 동행하며 나무, 새 등 국립공원 생태를 자세하게 안내한다.
“단풍나무에 꽃이 있는 거 아셨나요? 자세히 들여다봐야 보일 만큼 작지만, 자연의 섭리에 따라 열심히 꽃을 피우고 있답니다.”
무등산국립공원 자연환경해설사는 은둔 당사자들에게 작은 확대경을 건네며 말했다. 당사자들은 ‘정말 꽃이 있네’, ‘꽃 개수가 엄청 많네요’ 등 소감을 말하기 시작했다. 딱따구리가 죽은 나무에 파놓은 구멍을 보고 함께 감탄하고, 산책길을 따라오는 새의 행동을 분석하며 각자의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당사자 중 한 명은 나뭇잎 모양의 차이에 대해 먼저 질문하기도 했다. 자연이라는 공통의 관심사를 관찰하며 소통이 시작되는 모습이었다.
생태 설명을 들으며 원효사에 도착하자 자연과 함께 휴식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망원경으로 건너편의 나무들을 관찰하기도 하고, 조용히 앉아 명상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맛있는 차를 마시며 즐기는 여유였다. 시험공부 중에도 프로그램에 참여했다는 이모씨(35)는 “무등산 프로그램이 공부에 방해가 되기보다는 환기가 되는 시간”이라며 “활동하고 집에 돌아가면 오히려 집중이 더 잘된다”고 말했다.
이씨는 해설사의 설명 중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고 했다. ‘민들레는 어디에 펴도 민들레이듯 나는 어디에 있어도 그 자체로 나’라는 말에 위로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은둔 당사자들은 조금씩 세상에 나올 용기를 얻고 있었다.
◇‘심리적 지지기반’ 바탕으로 상황별·단계별 접근
광주광역시는 은둔형외톨이 지원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지자체 중 하나다. 시는 2019년 전국 최초로 은둔형외톨이 지원조례를 제정하고, 실태조사와 기본계획을 수립했다. 이를 근거로 2022년 전국 최초의 지자체 주도 지원 기관인 은둔형외톨이지원센터가 설립됐다. 현재 센터는 광주광역시사회서비스원이 위탁 운영하고 있다.
센터는 은둔당사자 발굴 및 은둔 성향별·단계별 지원을 진행한다. 모든 프로그램에 센터 직원이 함께하며 당사자와의 라포(상호신뢰관계) 형성에 집중한다. 이것이 당사자의 프로그램 참여도를 높이고 은둔을 벗어나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센터는 당사자나 지인, 가족을 통해 사례를 발굴한 후 전문 상담사와의 1:1 상담을 통해 문제점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한다. 외출을 어려워하는 경우엔 방문상담도 진행한다. 이후 대인관계 향상, 생활습관 개선, 사회생활 연습을 위한 활동프로그램과 일 경험 및 취업 연계를 제공한다. 백희정 광주광역시 은둔형외톨이지원센터장은 “심리상담을 통한 정서적 지지를 시작으로 온라인 소통과 활동프로그램으로 이어지는 단계적 지원 구조를 통해 당사자가 부담 없이 참여할 수 있도록 운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센터가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사자의 속도와 선택이다. 천편일률적인 방식으로 이끌기보다는 당사자의 상황과 회복 단계에 맞춰 접근한다. 주윤하 은둔형외톨이지원센터 주임은 “개인별로 은둔의 정도, 사회훈련 속도가 다르기에 맞춤형 대응이 필수”라며 “활동프로그램도 꾸준히 안내할 뿐 강제하진 않는다. 당사자들이 용기를 낼 수 있게 기다려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사회화 근육 키우기’…활동프로그램 인기
센터의 프로그램은 은둔 당사자들의 상태와 욕구에 맞춰 세밀하게 짜여 있다. 당사자들이 부담을 느끼지 않는 선에서 내면을 들여다보고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게 한다. 생활습관 개선 ‘원원원해요!’는 정해진 기간 동안 포춘쿠키 속 질문에 대해 하루에 한 번 센터 직원과 1:1로 소통하는 프로그램이다. 발굴 초기 집 밖으로 나오기 어려워하는 당사자를 위해 온라인으로 진행한다.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하며 내면을 탐색하고, 정해진 시간에 소통하며 일상의 리듬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다.
‘명랑한 은둔자 모임’은 소그룹 활동을 통해 외부 활동에 대한 부담을 낮추고 대인관계를 형성하도록 유도한다. 시기에 따라 산책, 요리, 베이킹, 공예 등 다양하게 진행하는데, 참여도와 만족도가 높다. 향수만들기 프로그램에 참여했다는 최씨(28)는 “다양한 향을 맡으며 나만의 취향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사회기술훈련인 ‘아무튼 출근’도 있다. 가상회사인 ‘아무튼 회사’에 출근해 직무역량, 소속감, 공동체 활동을 경험하게 한다.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으로 출근하며 취업 등 본격적인 사회 복귀를 준비하도록 돕는 프로그램이다. 지난해 프로그램에 참여한 김씨는 “동료들과 친해지면서 분위기가 편안해졌다”며 “서로 응원하고 지지해주는 분위기 덕분에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센터의 세심한 배려는 공간에도 나타났다. 지난해 6월 확장 이전하며 당사자가 자유롭게 머물 수 있는 ‘누구나올’을 조성한 것. 공유주방과 홀, 스터디룸, 집단활동 공간 등으로 꾸며 당사자들이 언제든 라면을 끓여 먹거나 차를 마시고, 보드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집 밖으로 나오려 하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는 은둔 당사자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공간이다. 센터와 1시간 거리에 사는 최씨는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꼭 센터에 방문하려 노력한다. 그는 “센터를 알기 전엔 의욕이 생기는 날이라도 갈 곳이 마땅치 않았는데, 이제는 센터 공용공간에서 시간을 보내곤 한다”고 했다.
센터는 올해 자조 프로그램과 지원 대상을 확대했다. 관심사가 비슷한 청년을 모아 △일본어교실 △연극 △정책발굴 △영화감상 소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연극을 통해 스스로의 이야기를 전하고, 타인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연습을 할 수 있다. 고립의 당사자로서 정부와 지자체에 실질적인 정책 제언을 하는 정책발굴 소모임도 눈길을 끈다.
센터는 중장년 은둔당사자 대상의 ‘해보면 챌린지’도 새롭게 시작한다. 상담, 당사자 자조모임, 온오프라인 기반 치유회복 프로그램이 운영될 예정이다. 백 센터장은 “중장년 은둔당사자는 외부로 드러나지 않아 정책과 연결되지 못하는 사례가 많다”며 “올해는 중장년 타깃의 프로그램으로 이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겠다”고 말했다.
‘조금 천천히 가도 괜찮아!’ 은둔형외톨이지원센터는 각기 다른 상처와 아픔으로 고립된 당사자에게 느려도 괜찮다고, 조금만 힘을 내라고 다독이고 있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5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