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복규제” 돌부리 걸린 ‘검정고무신법’

[법으로 보는 세상] ‘제2의 이우영 예방’ 문화산업 공정유통법, 부처 이견에 제자리

머니투데이 더리더 이하정 기자 2023.05.08 10:46 카카오톡 네이버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3월 27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열린 ‘검정고무신’ 故 이우영 작가 사건 대책위원회 기자회견에서 고인의 동생 이우진 작가가 발언 중 눈물을 닦고 있다.

80년대 이전 출생자들이라면 한 번쯤은 보고 웃음 지었을 만화, 추억의 ‘검정고무신’이다. 1960년대 서울을 배경으로 기영이와 기철이네 가족의 일상을 코믹하게 그려낸 만화로, 만화가 이우영이 그림을 그렸고, 이영일이 스토리를 썼다. 1992년 ‘소년 챔프’에 연재된 이후 2006년까지 연재를 이어가 한국 코믹스 만화 사상 최장수 연재 기록을 세웠다. TV 시리즈로 더 높은 인기를 얻고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도 개봉했다. 1999년 YWCA 우수만화 추천 작품으로 선정됐고, 2000년에는 문화관광부 주관 출판만화 영상문화대상 등을 받았다.

지난 3월 11일, ‘검정고무신’의 이우영 작가가 숨졌다. 이우영 작가는 출판업체와 저작권 문제로 법적 다툼 중이었다. 이 작가는 숨지기 이틀 전 1심 재판부에 제출한 최후 진술서에서 “창작자의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이 작가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에 만화계를 비롯한 문화계에서는 안타까움과 함께 공분이 일었다. 창작자의 저작권 보호를 위한 근본적인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출판업계의 불공정 계약 관행도 도마 위에 올랐다.



‘불공정계약’ 도마 위에


▲신일숙 한국만화가협회장 (이우영작가사건대책위원장) 이 3월 2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열린 검정고무신 故 이우영 작가 사건 대책위원회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 작가가 법정 다툼 중이던 소송은 ‘검정고무신’의 사업권 일체를 가지고 있는 업체 ‘형설앤’과의 계약 문제다. 이우영 작가와 형설앤은 지난 2007~2008년 사업권설정계약을 맺는다. ‘검정고무신’ 사업권 일체를 형설앤에 양도하는 내용이다. 이후 형설앤은 2019년 ‘이우영 작가가 검정고무신 캐릭터를 창작물에 무단 활용했다’는 이유로 이 작가를 고소했다.

‘이우영사건대응대책위원회’는 3월 27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애니메이션 제작업체 형설앤 측이 ‘검정고무신’(저작권)을 사용하면서 15년 동안 1200만원을 지급했다”고 주장했다. 또, “무기한 사업권을 갖고 원작을 통해 총 77개의 사업을 진행시켰다”고 밝혔다. 신일숙 대책위 위원장은 “창작자의 열악한 환경은 만화, 웹툰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라고 지적했다.



칼 빼든 정부, 표준계약서도 재점검


▲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4월 17일 서울 용산구 한국저작권위원회 서울사무소에서 검정고무신 법률센터 (저작권법률지원센터) 개소식을 마치고 만화계 관계자를 만나 검정고무신 법률센터 활성화 대책 및 창작자 권리보호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3월 30일 특별조사팀을 꾸렸다. 이번 사태와 관련, 예술인권리보장법 위반 여부를 조사하고 창작자의 권익 강화를 위한 법적, 제도적 보완 장치를 마련하겠다는 취지다. 강정원 문체부 대변인은 “이번 경우는 사회적 관심이 집중된 사안이기 때문에 특별조사팀을 꾸려 최대한 신속하게 조사를 마무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조사를 통해 법 위반 사항이 발견될 경우 예술인 권리보장위원회의 심의·의결을 거쳐 출판사에 시정명령을 내리고 필요하면 수사 의뢰를 하게 된다. 불공정 계약 강요 사안이 발견되면 공정거래위원회 등 관계 기관에 통보해 후속 조치를 취할 예정이다.

이와 별도로 저작권법률지원센터도 구축하기로 했다. 신진 문화예술인을 위해 저작권 서비스를 강화하고, 저작권 교육도 확대한다. 창작자의 권익을 강화하기 위한 법·제도적 보완 장치도 강구한다.

문체부는 표준계약서도 전면 재점검할 방침이다. 만화를 포함한 15개 분야의 표준계약서 82종이 대상인데, 문체부는 우선 만화 분야의 표준계약서 6종에 ‘2차적 저작물 작성권 이용허락계약서’와 ‘양도계약서’를 신설하겠다고 밝혔다.



국회에선 ‘문화산업 공정유통법’ 서둘러 처리


▲3월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가 열리고 있다.

국회에서는 ‘문화산업의 공정한 유통환경 조성에 관한 법률 제정안’이 3월 29일 소관위인 문화체육관광위원회를 통과했다. 문화콘텐츠 산업의 불공정 관행을 규제하는 내용이다. 이우영 작가가 숨진 지 2주 남짓 지난 시점이었다. 이 법안이 국회에 제출된 건 2020년 12월이었다.

‘문화산업의 공정한 유통환경 조성에 관한 법률 제정안’은 문화산업의 공정한 유통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금지행위의 유형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 콘텐츠 분야 국정과제의 하나로 추진된 법안이기도 하다.

법안은 금지 행위로 정당한 이유 없이 △문화상품 제작 활동을 방해하는 행위 △문화상품의 수령 또는 판매를 거부하는 행위 △문화상품 납품 이후 수정·보완을 요구하면서 그 비용을 보상하지 않는 행위 △문화상품 관련 기술자료 및 정보 제공을 강요하는 행위 △자기가 제작한 문화상품을 다른 사업자의 문화상품과 차별해 취급하는 행위 △문화상품 제작에 통상 지급되는 대가보다 현저히 낮은 수준으로 대가를 정하거나 공급계약에 명시된 대가를 감액하는 행위 등을 명시했다.

위반 시 시정명령 등 제재 조치를 부과하기 위한 근거도 마련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법을 위반한 문화상품 사업자에게 시정조치를 명할 수 있고, 시정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2년 이하의 징역이나 1억5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했다.



문체부-방통위·과기부 이견


홍익표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장은 법안 의결 당시 ‘본회의 통과 이전에 정부 부처 간 합의가 이뤄지면 문체위에서 재심의할 수 있다’는 단서 조항을 달았다. 방송통신위원회가 법안 의결 과정에서 반대 의견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방통위는 법안에 대해 ‘방송이나 포털 등에 대해 중복 규제 우려가 있다’며 반대 의견을 내놨다.

법안은 ‘문화산업’의 정의를 ‘문화산업진흥기본법’ 제2조 제1호를 근간으로 내리고 있다. △영화·비디오물과 관련된 산업 △음악·게임과 관련된 산업 △출판·인쇄·정기간행물과 관련된 산업 △방송영상물과 관련된 산업 등이 ‘문화산업’에 포함된다. 법 적용 대상에는 △문화상품제작업자 △문화상품유통업자 등이 포함된다. 즉, ‘방송영상물과 관련된 산업’에서 ‘문화상품(콘텐츠)을 제작·유통하는 사업자’도 법 적용을 받게 된다. 방통위는 이미 방송법과 IPTV법, 전기통신사업법 등으로 이들 사업자들이 금지행위 규제를 받고 있는 만큼 중복·과잉 규제 논란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방통위 의견에 대해 법안 발의자인 문체위 소속 유정주 의원(더불어민주당)은 “윤석열 정부의 대국민 약속을 방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방통위가 의견과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더 많은 협의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비판하고 나섰다. 문체부는 방통위에 ‘전기통신사업법’, ‘방송법’, ‘인터넷 멀티미디어 방송사업법’ 등에 대해 우선조치권을 제안했지만 방통위가 거절했다고 밝혔다. ‘우선조치권’은 문체부가 사실 조사 결과 위반 사실이 밝혀지면 해당 부처에 필요 조치를 요구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도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과기부는 4월 중순 문체부에 법안 제5조와 제6조, 제11조, 제12조에 대해 ‘방송통신발전기본법’에 따른 사업자에게는 해당 조항을 적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또, 법안 제4조에 방송통신발전기본법과 ‘정보통신 진흥 및 융합 활성화 등에 관한 특별법’을 추가해 특별법으로 규정하라고 요구했다. 방통위와 마찬가지로 중복 규제에 대한 우려를 나타낸 것이다.



“콘텐츠 업계 전반에 미칠 영향 고려해야”


▲유정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월 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저작권법 개정안 지지 선언회에서 환영사를 하고 있다.

2년 넘게 국회에 계류돼 있던 ‘문화산업 공정유통법’이 이우영 작가의 별세를 계기로 ‘검정고무신 사태 방지법’으로 불리며 소관위에서 신속히 처리됐지만, 과연 충분한 논의가 이뤄졌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국회 문체위 법안 심사 과정을 보면, 방통위가 제기한 반대 의견에 대한 토의는 진행되지 않았다. 3월 29일 문체위에서 법안 설명부터 처리까지는 2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향후 부처 간 협의 과정에 따라 법사위와 본회의 통과도 장담할 수 없게 된 셈이다.

비슷한 내용을 다른 법이 다루고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공정 계약 조건 강요나 적정 수익배분 거부 등의 금지행위 규정은 ‘예술인권리보장법’에도 담겼다. 이 법은 시행 1년도 안 됐다.

‘창작자의 권익 보호’에 치중한 나머지 콘텐츠 유통업계 전체를 바라보지 못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최경진 가천대 법학과 교수는 “문화산업의 공정한 유통환경을 조성해 문화다양성은 증진하고 문화상품의 창작과 제작 기반을 보호한다는 법안의 기본 목적에 공감하지만, 강력한 제재 규정이 관련 산업의 진흥을 넘어 강력한 규제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기존 법률과의 관계, 부처 간 규제 권한의 중복 문제, 미디어 생태계 참여자의 특성과 역할을 고려한 합리적인 규제 수준 설정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5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jenny0912@mt.co.kr

정치/사회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