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태아는 한 몸, ‘아빠’가 빠진 이유

[법으로 보는 세상]태아까지 챙긴 산재법, 소급 적용…남성은 연관성 확인 어려워

머니투데이 더리더 편승민 기자 2022.01.06 09:24 카카오톡 네이버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사진=이미지투데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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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제주의료원에 임신한 간호사 15명 중 5명은 유산했고, 2010년에는 임신 간호사 12명 중 5명이 유산하는 일이 발생했다.
태어난 아기 17명 중 8명은 선천성 심장질환을 갖고 있었다. 당시 임신한 간호사들은 제주의료원의 지시로 미국 식품의약처(FDA)에서 기형아 발생을 이유로 임산부에게 금지된 약물을 다뤘다.
간호사들은 근로복지공단에 업무상 재해를 신청했지만 자녀가 산재보험법 적용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승인을 반려당했고, 서울행정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2014년 1심은 원고가 승소했다. 하지만 2016년 2심 재판부는 ‘산재보험 급여의 수급권자와 청구권자는 동일해야 한다’는 이유로 1심 판결을 뒤집고 태아에 대해 산재보험을 적용하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 2020년 4월, 대법원은 유해물질에 노출된 제주의료원 간호사 자녀들의 선천성 심장질환을 업무상 재해로 인정했다. 태아는 어머니와 한 몸이기 때문에 태아에게 생긴 건강 손상 역시 임신한 여성, 즉 근로자에게 발생한 재해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12월 1일, 삼성전자 LCD(현 삼성디스플레이) 출신 남성 근로자인 최현철(가명, 40) 씨가 근로복지공단에 ‘태아산재’를 신청했다.
최 씨는 자신의 업무환경으로 인해 선천성 희귀질환을 앓는 아이를 출생했으니 태아산재를 인정해달라고 밝혔다.
최 씨의 아들 지후(가명, 14) 군은 차지증후군(CHARGE Syndrome)을 앓고 있다. 이병은 시각신경 이상, 난청, 심장질환, 생식기 이상, 발달장애 등 여러 증상이 동시에 나타나며 1만 명당 1명꼴로 앓는 선천성 희귀질환이다.
최씨는 2004년부터 2011년까지 삼성LCD 천안 사업장에서 일했다. 그는 유리기판 위에 화소를 조절하는 층을 만드는 ‘TFT 공정’에 배치돼 일했으며, 설비 관리와 독성유기용제인 이소프로필알코올(IPA) 용액을 흰 천에 부어 장비 닦는 일을 주로 했다.
산업안전보건공단 사이트에 공개된 물질안건보건자료(MSDS)에 따르면 IPA는 생식독성물질로 구분된다. 또 임신율 저하, 태아 사망 증가 등 생식독성이 나타났다는 동물실험 결과도 있다.
최 씨는 아내가 임신한 2007년에도 이 용액을 다뤘다. 정자의 생산주기를 감안했을 때 아버지의 경우 임신전 3개월의 유해요인 노출이 태아생성에 주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태아산재법 국회 통과


유해한 업무 환경에 노출된 근로자가 선천성 질병을 가진 아이를 출산할 경우 산재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지난 12월 9일 장철민 더불어민주당(대전동구) 국회의원이 대표발의한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일부개정 법률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본회의 참석 국회의원 175명 중 173명 찬성, 2명이 기권했다.

지난 12월 9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법률 개정안이 가결 처리되고 있다./사진=뉴시스

이번 개정안은 임신 중인 여성 근로자의 업무상 사고, 유해인자 노출 등으로 출산 자녀에게 질병, 장해가 발생하거나 사망할 경우 요양급여, 장해(障害)급여 등을 지급해 산업재해 피해로부터 보호하자는 게 주요 골자다.

특히 이번 개정안은 법안 시행일 이전 과거 피해자들에게도 산재보험 수급 자격을 부여하도록 적용례가 포함됐다. 업무상 재해를 인정받았거나 법원의 확정판결로 보험급여지급 거부처분이 취소된 경우, 법 시행 기준 과거 3년 이내 자녀를 출산한 경우 등 수급자격을 부여할 수 있도록 했다. 개정안은 대통령 공포 후 1년이 지난 시점부터 시행된다.

정부는 그동안 임신한 여성이 유해한 환경에서 일하다가 태아 건강이 나빠져도 이를 산업재해로 인정하지 않았다. 산재보험법은 근로자의 업무상 재해를 보상하도록 명시하고 있기 때문에 이 법을 근로자가 아닌 태아에게 적용하는 게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지난 2020년 대법원이 제주의료원 간호사 자녀들의 선천성 심장질환을 업무상 재해로 인정했다.

당시 대법원은 “산재보험법의 해석상 모체와 태아는 ‘한 몸’, 즉 ‘본성상 단일체’로 취급된다. 태아는 모체 없이는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으며, 태아는 모체의 일부로 모와 함께 근로현장에 있기 때문에 언제라도 사고와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고 판결했다.



개정안에 아버지인 남성노동자는 빠져 있다?


2019년 4월 1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정문 앞에서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임신 중 여성노동자 업무에 기인한 태아 건강손상 산업재해 인정을 위한 위헙법률심판제청신청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사진=뉴시스

다만 이번 개정안은 산재보험 수급권을 임신 중인 근로자로 규정했기 때문에 아버지인 남성노동자의 업무로 인한 태아 산업재해는 인정하지 않는다.

지난달 1일, 삼성전자 LCD 공장에서 일했던 남성노동자가 근로복지공단에 태아 건강손상을 산재로 신청했지만, 이번 개정안에는 적용받지 않는 것이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아버지 업무로 인한 태아 산업재해는 업무 연관성 확인이 어머니보다 더 어렵다”고 설명했다.

개정안을 발의한 장철민 의원은 “이번 개정안이 태아산재 문제 해결의 시작으로, 법 시행까지 많은 피해자분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관계부처와 피해자 발굴 지원, 태아산재 신청 홍보를 강화할 것”이라며 “최근 삼성디스플레이 남성 근로자도 태아산재를 신청했는데 이러한 분들도 소외되지 않도록 향후 부(父)의 유해요인 노출, 생식독성물질 관리 강화 등 후속 법 개정도 함께 해결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유산 여성 10명 중 6명은 직장인…


지난해 8월 국민건강보험공단이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16년부터 2020년까지 5년간 유산을 경험한 여성은 45만8417명이었다.

해마다 평균 9만1600여 명이 유산한 것이다. 같은 기간 분만 여성은 평균 26만2700명으로 기록돼 임신 여성 4명 중 1명은 유산을 겪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이점은 취업자와 미취업자의 유산율 격차다. 지난 5년간 직장 여성의 유산율은 미취업 여성 유산율보다 매해 약 7%포인트 높았다.

직장 여성의 유산율은 2016년 27.2%로, 미취업 여성의 유산율 20.3%보다 6.9%포인트 높았다. 또 2017년 각각 28.4%와 21.3%, 2018년 30.2%와 23.1%, 2019년 30.8%와 23.7%, 2020년 31.3%와 24.5%로 나타났다.

이처럼 유산과 노동 인과성이 드러나는 통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유산한 직장 여성의 산재는 거의 인정받지 못했다. 근로복지공단의 자료에 따르면 2017년부터 2020년까지 임신·출산·산후기로 인해 업무상 질병을 신청한 건수는 총 8건이며 이 중 산재 인정을 받은 건수는 3건뿐이다.



임신중 육아휴직·출퇴근시간 변경 가능해져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 11월 19일부터 개정 남녀고용평등법(남녀고용평등 및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이 시행됨에 따라 임신 근로자도 육아휴직이 가능해졌다.

기존에 육아휴직은 만 8세 이하 또는 초등학교 2학년 이하 자녀를 둔 근로자에게만 허용됐다. 이 때문에 임신 중인 근로자들이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휴직이 필요한 경우에도 육아휴직을 사용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왔다.

임신 중 육아휴직을 사용하려는 근로자는 휴직 개시 예정일 30일 전까지 사업주에게 신청하면 된다. 유산과 사산의 가능성이 있다면 7일 전까지 신청 가능하다.

또 임신 중 육아휴직은 횟수 제한 없이 분할 사용이 가능하다. 그간 육아휴직은 1년을 2회에 걸쳐 나눠 쓸 수 있었지만 임신 중에는 횟수 제한을 없앴다.

임신 중 육아휴직을 썼다면 출산 후에 출생 자녀를 대상으로 남은 육아휴직 기간에 대해서 2회에 한해 분할해 사용할 수 있다. 이는 근로자가 필요에 따라 제도를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다.

정부는 임신 중 사용한 육아휴직 기간에도 고용보험기금을 통해 육아휴직급여를 지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현행 고용보험법은 근로자가 육아휴직을 30일 이상 부여받았으면 고용보험기금으로 1년 동안 육아휴직 급여를 지급하도록 하고 있다.

육아휴직 시작일로부터 3개월 동안은 매월 통상임금의 80%가 지급되는데 월 상하한은 각각 150만원, 70만원이다.

현재 근로자에게 30일 이상 육아휴직을 부여한 사업주에 대해 월 30만원의 지원금을 지급하고 있는데, 임신 근로자 육아휴직을 부여한 사업주에게도 지원할 예정이다.

고용부는 “임신 근로자도 육아휴직을 사용할 수 있게 되면 유산·사산 위험으로부터 건강을 보호하고 경력단절 예방에도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한편, ‘근로기준법’ 개정에 따라 임신근로자는 1일 소정근로시간을 유지하면 출퇴근 시간 변경도 가능해졌다. 그간 임신 12주 이내 또는 36주 이후에 있는 여성 근로자는 근로시간 단축(1일 2시간)제도를 활용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근로시간 단축을 활용하지 못하는 임신 근로자(임신 12주 이후~35주 이내)는 출퇴근 시간 변경이 어려워 혼잡한 대중교통 이용 등으로 건강상 피해 발생 우려가 있었다.

출퇴근 시간을 변경하고자 하는 근로자는 업무시간 변경 개시 예정일 3일 전까지 신청서에 임신 사실 확인을 위한 의사의 진단서를 첨부해 사용자에게 제출해야 한다. 이에 대해 사업주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임신 근로자의 출퇴근시간 변경을 허용해야 한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1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carriepyu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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