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일선 지자체에 따르면 전국 17곳 광역시도 중 9곳은 2024년에 모금된 고향사랑기부금을 아예 사용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17곳 광역시도 본청의 전체 모금액 144억여원 가운데 실제 집행된 금액은 7억여원으로 집행률이 5%도 되지 않았다. 지역 특산품을 답례품으로 제공하는 등 적극적으로 홍보했지만, 기부금 상당수가 사용되지 못한 채 통장에 묶여 있는 실정이다.
머니투데이 <더리더>가 전국 17개 광역시·도의 2024년 고향사랑기부금 운용 현황을 조사한 결과 17곳 지자체의 지난해 모금액은 144억원이었지만 실제 지출은 7억5500만원에 그쳤다. 지자체에서 활용처를 찾지 못하면서 현재까지 137억원 가까이 적립된 기금이 통장에 잠들어 있는 것이다. 조사는 하위 행정구역(시군)을 제외하고, 지자체 본청만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지난해 고향사랑기부금을 가장 많이 모은 곳은 제주도로, 35억9200만원을 기록했다. 뒤이어 △전남 8억8000만원 △대전 6억8600만원 △충북 5억610만원 △강원 4억5600만원 △부산 4억5500만원을 모금한 것으로 나타났다.
우선 한 해 동안 기부금이 얼마나 걷힐지 예측하기 어렵다 보니 사업 계획을 미리 세우기 힘들다는 게 지자체들의 설명이다. 지자체의 한 관계자는 “모금액을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사업 규모, 방식 등을 계획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며 “모금이 특정 시기에 몰리는 등 계획을 한다고 하더라도 중장기 계획은 세우기 어렵다”고 말했다.
기금을 활용할 수 있는 범위가 좁은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현행법에 따르면 고향기부금은 △사회적 취약계층 지원 및 청소년 육성·보호 △지역주민의 문화·예술·보건 등 증진 △지역공동체 활성화 지원 △그 밖에 주민 복리 증진에 필요한 사업에만 쓸 수 있게 규정하고 있다.
지난해 지자체가 기금을 운용했던 사업은 생활 복지 분야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기존 정책과 중복되지 않아야 해 사업 추진까지 이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충북 옥천군은 영유아 의료비 지원에 쓰려고 했지만, 보건복지부가 건강보험과 중복된다는 이유로 제동을 걸었다.
◇지방 소멸 막고 재정자립도 올리자는 취지인데…중앙 규제의 그림자고향사랑기부제는 지자체의 재정자립을 돕기 위한 제도로 도입됐지만, 중앙정부가 정한 규정과 운영 방식의 한계로 실효성 확보와 제도 정착에 시간이 걸렸다는 지적도 나온다. 초기에는 기부자가 자신의 주소지 지자체에는 기부할 수 없고, 연간 기부 한도도 500만원으로 제한돼 불편하다는 민원이 잇따랐다. 이에 따라 현재는 고향이 아닌 다른 지역에도 기부할 수 있으며, 기부 한도 역시 2000만원으로 상향됐다.
재난 발생 시 기부금 활용에 대한 절차가 지나치게 복잡하다는 지적도 있다. 현행 ‘재해구호법’ 제18조 1항에 따르면 자연재난이 발생했을 경우, 지자체는 의연금품을 직접 모집할 수 없고 전국재해구호협회를 통해서만 모금·배분이 가능하다. 이 조항은 의연금품이 정치적으로 이용되거나 불균형하게 배분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마련됐다.
하지만 여름 폭우, 겨울 폭설, 대형 산불 등 대규모 재난·재해의 경우 피해 규모가 워낙 커 국비만으로는 복구하는 데 한계가 있다. 지난해 12월 경기 안성시는 폭설 피해를 입은 농가를 돕기 위해 모금함 개설을 추진했지만, 행안부에 질의하는 과정에서 시간이 보름가량 지체 되기도 했다.
한국지방자치학회 고향사랑기부제 특별위원장을 맡고 있는 권선필 목원대학교 경찰행정학부 교수는 “재난 발생 후 모금이 가장 활발한 시기는 보통 1주일 정도”라며 “신속한 모금이 중요한데 각종 절차를 거치다 보면 개시까지 시간이 지연되고, 모금 후에도 협의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곧바로 집행하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대부분 지자체가 별도의 재난 대응 예산을 갖추고 있지 않은 만큼, 자체 기금을 신속히 활용할 수 있다면 대응 효과가 훨씬 클 것”이라고 했다.
이에 따라 지난해부터 행안부는 고향사랑기부금을 재난·재해 복구와 피해자 지원이 가능하도록 지침을 변경했다. 아울러 피해 지자체의 빠른 모금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지방의회의 사전의결 대신 보고만으로도 모금을 진행할 수 있도록 지정기부 사업개시 요건을 완화했다.
하지만 해당 내용이 ‘지침’에 불과해 법 조항을 보다 유연하게 개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다. 고향사랑기부제의 롤모델인 일본의 고향세 제도는 재난·재해 발생 시 피해 복구와 구호 활동을 위해 각 지자체가 ‘고향세 기부금’을 모아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박정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4월 지자체가 의연금품을 직접 모집하고 이를 지원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고향사랑 기부금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안’을 발의했지만, 아직 국회 통과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기부하면 이렇게 쓰인다’…활용에 초점 맞춰야전문가들은 고향사랑기부제도의 장기적인 정착을 위해 ‘기부’보다는 ‘활용’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말했다. 단순히 ‘기부하면 답례품을 준다’는 유인책보다, ‘기부금이 어떤 사업에 쓰이는지’를 명확히 밝혀 신뢰를 높이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고향사랑기부제는 자치단체에 기부하는 일반 기부와 특정 사업을 지정해 기부하는 ‘지정 기부’로 나뉜다. 초창기에는 특정 지자체를 선택해 기부하는 방식이었지만, 최근에는 아동, 복지, 지방소멸, 노인, 동물 등 다양한 분야 가운데 기부자가 원하는 사업을 직접 선택해 기부할 수 있도록 제도가 확대됐다.
7월 기준 고향사랑기부제 정부 포털인 ‘고향사랑e음’에는 110여 건의 지자체별 지정 기부 사업이 올라와 있다. ‘산불 피해 복구’부터 ‘소아과 운영’, ‘유기동물 구조·보호 지원’ 등 주제도 다양하다. 전국의 지자체가 앞다퉈 지정 기부사업 아이템을 개발하고 모금을 독려하고 있는 것이다.
권선필 교수는 “현재 고향사랑기부금이 많이 모였지만 상당수 지자체에서는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며 “규제 등의 이유가 있겠지만 집행이 지체될수록 기부자의 신뢰를 잃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지자체장이 적극적으로 다양한 사업을 기획하고 이를 홍보하면, 기부자 입장에서도 자신의 기부금이 어디에 어떻게 쓰였는지 확인할 수 있어 보람도 더 클 것”이라고 덧붙였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8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