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혜지 아르플래닛 대표, “서울이라면 이만큼 주목받았을까요?”

[청년, 지역을 택하다]창작 오픈랩 통해 기획사 창단, 1800여명 모은 공연 잇단 성공

머니투데이 더리더 최현승 기자 2025.05.07 09:18 카카오톡 네이버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편집자주청년 인구 유출은 지역 소멸 위기의 주요 원인 중 하나다. 많은 청년들이 일자리를 찾아 수도권으로 향하지만, 지역에서 미래를 꿈꾸는 청년도 적지 않다. 이들은 지역에서 가능성을 발견하고 스스로 무대를 만들어가고 있다. 머니투데이 <더리더>는 지역을 택한 청년들과 이들을 지원하는 정책을 조명한다.
▲최혜지 아르플래닛 대표/사진제공=아르플래닛
청년이 지역을 떠나고 있다. 올해 1월 통계청이 발표한 ‘2024년 국내 인구이동 통계’에 따르면, 서울·경기·인천 등 수도권으로 향한 20~39세 청년은 무려 8만4835명에 달했다. 반면 비수도권에서는 청년 유출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경남에서 1만419명, 경북 8821명, 전북 7570명, 전남 5944명, 대구 5740명, 그리고 광주에서는 5860명의 청년이 지역을 떠났다.

청년들이 지역을 등지는 가장 큰 이유는 일자리 때문이다. 중소벤처기업부와 행정안전부, 통계청에 따르면 전국 사업체의 절반에 가까운 49.1%(약 301만 개)가 수도권에 몰려 있다.

예술 분야는 이보다 상황이 더 심각하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2021년 발표한 ‘공연예술분야 인력구조 및 일자리 수요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 예술단체 1744개 중 63.8%인 1113개가 수도권에 집중돼 있었다. 공연장, 미디어, 협업 기회 등 모든 인프라가 수도권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많은 청년들이 수도권으로 향하는 흐름과 다르게, 지역이 바로 ‘청년 블루오션’임을 발견한 이들도 있다. 고향인 광주광역시에서 클래식 기반의 문화예술단체 ‘아르플래닛’을 운영하고 있는 최혜지 대표도 그중 한 명이다.
▲2024년 12월 8일 광주예술의전당 소극장에서 열린 ‘아르플래닛 협주곡의밤’ 공연에서 연주를 하고 있는 최혜지 대표/사진제공=아르플래닛
◇연주자에서 기획자로, 직접 무대를 만들다
“제가 지금 하고 있는 활동들을 서울에서 했다면, 이만큼 주목받을 수 있었을까요?” 최 대표는 아르플래닛 창단 1년 만에 6회의 공연을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이 중 2회는 전석 매진이었다. 수도권이 아닌 지역에서, 그것도 창단 초기 청년단체가 이뤄낸 성과였다.

아르플래닛은 1인 기획사로 현재 최 대표가 공연기획 전반을 혼자서 운영하고 있다. 기획부터 포스터 디자인, 보도자료 배포, 세금계산서 발행, 연주자 섭외 및 관리에 이르기까지 공연의 모든 과정을 직접 수행한다. 공연 전 과정을 도맡아 운영하는 모습을 보면 노련한 공연기획자의 면모를 보여주지만, 최 대표의 또 다른 정체성은 피아니스트다.

그는 비교적 늦게 피아노를 시작해 대학 입학이 순탄치 않았다. 삼수 끝에 고향 광주에 있는 전남대 음악학과에 입학했다. 전공자로서 예술가의 길을 고민하던 최 대표는 공연장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문화예술기획 분야에 막연한 호기심을 가졌고, 2023년 ‘청년문화예술기획자 양성학교’를 수료하면서 본격적인 공연기획자의 길을 걷게 됐다.

최 대표의 데뷔작은 청년문화예술기획자 양성학교의 마지막 프로젝트였던 ‘리멤버 아티스트’다. 당시 100만원이라는 지원금에 사비를 더해 올린 프로젝트로 8개월간 배웠던 기획을 직접 현실화하는 것이었다.

해당 프로젝트는 광주시장상을 수상하며 실질적인 성과로도 이어졌다. 이후, 그의 데뷔작은 공연기획자로 프로그램 공모에 지원할 때 주요 실적의 밑거름이 됐다.

프로그램 수료 후 진료를 고민하던 최 대표는 양성학교를 통해 만난 멘토의 조언에 따라 단체 창단을 결심했다. 혼자 활동하는 데서 벗어나, 함께 무대를 만들 동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문화예술단체 ‘아르플래닛’이다. “1기 단원을 직접 모집했고, 공간을 알아보고 공연장을 섭외했습니다. 포스터 디자인부터 회계 정산까지 전부 제 손을 거쳤죠.”
▲2024년 11월 7일 광주 북구 광주디자인진흥원 대세미나실에서 열린 ‘아르플래닛 2024년 성과보고 및 2025년 사업계획 공유 설명회’에서 최혜지 대표가 설명하고 있다./사진제공=아르플래닛
최 대표는 서울에서도 공연을 열어본 경험이 있다. 가장 많은 공연이 올라가는 도시인 만큼, 체계적인 시스템을 배우고 싶었다. 그가 경험한 서울은 역시 선택지가 확실히 많았다. 최 대표는 “드레스숍, 메이크업숍, 공연장 등 선택의 폭이 넓고, 시스템도 체계적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만큼 경쟁도 치열했고, 자신이 주체가 되는 무대를 만들기 어려웠다고 덧붙였다.

반면 광주에서는 연주자를 기억해주는 관객, 함께 무대를 만드는 동료들, 익숙한 공간과 드레스숍이 있었다. 최 대표는 “광주에도 클래식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며 “서울처럼 공연이 자주 열리진 않지만, 그만큼 관객들이 더 집중해서 봐주고, 더 오래 기억해주는 느낌이 있다”고 말했다.

물론 지역에서의 활동이 쉬운 것만은 아니다. 특히 청년 예술가로서 처음 무대를 올릴 때, 지역 내에서도 보이지 않는 장벽을 체감했다. 그럼에도 최 대표는 계속 도전했다. 그는 “도전 자체에 의미를 두고 시작했다”며 “운도 따랐지만, 결국은 제대로 기획하고, 성실히 준비한 게 결과로 이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그 결과 최 대표는 아르플래닛 창단 후 1년 동안 6건의 공연과 1건의 전시, 2건의 지원사업에 선정, 총 1800여 명의 관객 유치 등 가시적인 성과를 거뒀다.

“클래식 공연이 자주 열리지 않는다고 해서 광주 사람들이 클래식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에요. 즐기고 싶은 마음은 똑같아요. 그래서 공연이 있으면 많은 분들이 찾아주시죠. 한번은 서울에서 온 연주자와 광주에서 공연했는데 이렇게 관객이 가득 찬 공연장에서 연주해본 적이 없었다고 말했을 때 뿌듯했어요.”

창단 2년 차를 맞은 최 대표는 최근 자신의 모습을 보고 용기를 내는 후배들이 하나 둘 생겨나는 걸 느끼고 있다고 했다. 그런 후배들을 위해 “광주 안에서 꾸준히 무대를 만들어가며 지역에서도 청년 예술인이 활동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겠다”고 말했다.
▲청년문화기획자 양성학교 ‘호랭이스쿨’에서 강의하고 있는 정두용 대표/사진제공=(사)청년문화허브
◇지역을 꽃피울 문화 기획자, 지역이 직접 키운다
최 대표가 공연기획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사)청년문화허브 정두용 대표가 운영하는 청년문화예술기획자 양성 프로그램 ‘호랭이 스쿨’이 있었다. 2013년에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2020년부터 시의 지원을 받아 문화기획 교육을 운영하고 있다. 정 대표는 “공연을 기획하려면 사업계획서 작성, 홍보, 예산 운영 등 다양한 실무 능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예술 전공자들이 이 부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경우가 많았다”며, 프로그램의 시작 배경을 설명했다.

‘호랭이 스쿨’은 예술가가 기획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실무 중심으로 구성된 문화기획 교육 프로그램이다. 총 8개월간 진행되는 60강 규모의 커리큘럼은 기획서 작성, 예산 수립, 프로젝트 운영 등 현장에서 필요한 내용을 중심으로 구성됐다. 수료생에게는 약 100만원 내외의 소규모 예산을 배정해 실제 프로젝트를 실행할 기회를 제공한다. 

수강 인원은 15명 내외로 제한되어 개별 피드백과 현직에 종사하고 있는 기획자와 연결해 밀도 높은 멘토링을 제공한다. 초기에는 정두용 대표가 직접 강의를 맡아 소규모로 운영됐지만, 2020년부터 시의 지원을 받으면서 공간, 예산, 강사 섭외 등 다양한 면에서 규모를 확장할 수 있었다.

수료 이후에도 활동은 계속된다. ‘호랭이 소굴’이라는 창작 오픈랩 공간을 통해 수료생들은 회의, 창작, 실험 등을 자유롭게 진행할 수 있다. 이 공간에서는 선배 기획자와 후배 기획자가 함께 모여 협업하거나 진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교류의 장도 자주 열린다.
▲2023년 9월 7일에 열린 멘토링 수업/사진제공=(사)청년문화허브
현재까지 많은 수료생들이 광주와 전남 지역에 정착해 공연기획자, 큐레이터, 독립기획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장에서 직접 청년들을 마주하는 정 대표는 “요즘은 수도권으로 향하기보다, 지역에서 활동하고자 하는 청년 예술가와 문화기획자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며 “이들을 위한 지원 정책이 더 많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시 또한 호랭이 스쿨 외에도 청년 예술인의 창작과 정착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운영 중이다. 청년예술인 창작 활동비 지원, 창작 공간 제공, 전시·공연 기회 확대, 전문가 멘토링은 물론, 전국 최초로 문화예술활동 안심보험을 도입해 예술인의 안전망을 마련했다. 세무·법률·상담을 지원하는 ‘광주예술인복지센터’도 함께 운영되고 있다. 시는 청년 예술인이 지역에서 안정적으로 창작 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 있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5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hs1758@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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