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소리’ 흉물이 된 ‘억소리’ 공공조형물

[이슈인사이드]조례 없이 마구잡이 설치, 거액 들여놓고 철거해 혈세 낭비

머니투데이 더리더 홍세미 기자 2025.04.07 09:54 카카오톡 네이버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서울 여의도한강공원에 설치된 영화 <괴물> 속 괴물 조형물이 지난해 6월 철거됐다./사진=뉴스1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 공공조형물을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많은 예산이 쓰였지만 ‘흉물스럽다’는 민원에 애물단지로 전락한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설치 후엔 너무 많은 예산이 들어갔다며 ‘혈세 낭비’라는 비판이 나오는 조형물도 있다. 사기 전과가 있는 조각가에게 속아 복제품을 거액에 사들인 지자체도 있다. 공공조형물을 제작·설치하는 과정에서 검증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7일 국민권익위원회에 따르면 권익위는 2019년 관련 통계를 발표했는데 당시 국내에 설치된 공공조형물 수는 1만5000여 점이었다. 6년 전 자료인 점을 감안하면 이후 더 많은 조형물이 설치됐을 것으로 추산된다. 당시 1점당 평균 제작비는 1억7900만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공조형물 설치가 본격화된 1990년 이후 설치된 공공조형물 조성비용을 모두 합하면 1조원이 넘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서울시 여의도 한강공원에 설치된 영화 <괴물> 조형물이 지난해 6월 철거됐다. 이 조형물은 2014년 마포대교와 원효대교 사이에 설치됐으며, 비용만 1억8000만원이 들었다. 10년간 흉물 논란에 휩싸였고, 결국 서울시 공공미술심의위원회가 철거 결정을 내렸다.

경북 포항시 남구 포항경주공항 인근에 만든 꽁치 꼬리 모양 조형물도 같은 신세다. 이 조형물은 포항이 과메기 특구라는 점을 널리 알리자는 차원에서 2009년 3억원을 들여 만들었다. 하지만 비행기가 추락하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민원이 잇따르자 2019년 철거됐다. 이 밖에도 1억500만원을 들여 만든 세종시 ‘흥겨운 우리가락’ 조형물은 저승사자를 연상시킨다는 민원에 철거됐다. 또 2017년 설치한 대구시의 순종황제 조형물은 역사왜곡 논란이 일자 지난해 4억원을 들여 철거했다.

필요 이상의 사업비가 들어가 논란인 곳도 있다. 지난 2월 대구시 수성구는 상화동산 화장실 리모델링 공사에 국비 9억원을 들였다. 화장실은 스페인 건축가인 다니엘 바예가 리모델링을 맡았다. 시 관계자는 “단순히 공중화장실만을 위한 리모델링이 아닌 공공시설에 예술성을 접목한 프로젝트”라고 설명했다. 경북 군위군 ‘대추화장실’도 공중화장실 겸 조형물이다. 특산품인 대추를 홍보하기 위해 2016년 6억9500만원을 들여 의흥면 수서리에 ‘어슬렁대추정원’을 조성하고, 정원 한가운데에 대추 조형물을 설치했다. 당시 과도한 예산 집행이라는 논란이 일었고, 군은 “건축비가 과대했던 것은 아니”라고 해명하기도 했다.

예산 낭비나 미관을 둘러싼 문제가 전부는 아니다. 경북 청송군과 전남 신안군에서는 사기 전과가 있는 조각가에게 속아 복제품을 거액에 사들이는 일까지 발생했다. 신안군과 청도군 등에 따르면 세계적인 조각가로 사칭한 70대 남성 최씨에게 징역형이 선고됐다. 최씨는 자신을 파리 유명 대학 교수로 사칭했지만 실제로는 사기 혐의로 복역한 전과자로 밝혀졌다. 최씨는 신안군에 ‘천사상’ 등 318점을, 청도군에 조형물 20점을 설치하고 각각 19억원, 2억9000여만원을 군으로부터 받았다.

▲전남 신안군 하의도 ‘천사상 미술관’의 소망의 거리/사진제공=신안군
◇지자체 절반이 공공조형물 건립·관리 조례 없어

국민권익위는 무분별한 공공조형물 설치로 인한 예산 낭비를 막기 위해 2014년 9월 전국 지자체에 ‘공공조형물 건립 및 관리체계 개선 방안’ 마련을 권고한 바 있다. 권고안에는 △조형물의 목적과 정의 △건립신청과 선정의 기준 △건립심의위원회 운영과 심사위원의 공정성 △관리주체의 관리의무 △공공조형물의 효율적인 활용 등의 규정을 포함하도록 했다.

그러나 2019년 기준 공공조형물 건립·관리 관련 조례를 만든 지자체는 243개 시군구 중 137곳에 그쳤다. 권익위가 관련 조례를 제정할 것을 지자체에 권고했지만, 절반가량이 이를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조례조차 없는 곳은 심의 절차 없이 공공조형물을 설치한다. 공공조형물 제작에 막대한 예산이 들지만 충분한 의견 수렴이나 타당성 조사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제대로 된 절차가 없어 공공조형물 설치를 둘러싸고 비리 사건이 벌어지기도 한다. 2019년 강원도 내 7개 지방자치단체에서 공공조형물 입찰을 둘러싼 비리 커넥션이 드러나기도 했다. 당시 춘천지방검찰청 강릉지청에 따르면 도내 업체가 브로커와 함께 공무원, 대학교수(심사위원)를 매수해 사업을 독식하다가 적발됐다. 이들 지자체가 발주한 공공조형물 공모 규모는 91억원이다.

최호택 배재대학교 행정학과 교수는 “공공조형물이 도시미관이나 주민 정서 안정 등을 위해 설치되지만 세금이 투입되는데도 불구하고 관련 조례가 없어 계약 과정 등이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지자체마다 조례를 마련해 공공조형물의 무분별할 난립을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4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semi4094@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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