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머리 초딩’ 되니 친구들이 생겼어요

['체험' 세상을 바꾸는 정책]울산 시니어초등학교, 새로운 관계망 통해 인생 2막 즐거움 제공

머니투데이 더리더 신재은 기자 2025.04.01 09:44 카카오톡 네이버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편집자주얼마큼 효율적인 정책을 펼치느냐에 따라 주민 삶은 크게 달라진다. 우리 동네에 ‘안심가로등’을 설치하는 것부터 출산과 양육 지원까지 모두 정책의 영역이다. ‘체험 세상을 바꾸는 정책’은 기자가 직접 정책 현장을 찾아가는 코너다.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해당 정책의 실효성을 검증한다. ‘더 좋은 정책’을 위해 대안을 제시, 독자들과 정책 대상자들에게 사랑받는 코너로 자리 잡는 게 목표다.
▲시니어모델반 학생들이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워킹 연습을 하고 있다./사진=신재은 기자

아이들이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곳, 초등학교. 은퇴 후 인생 2막을 시작하는 중장년층을 위한 초등학교가 있다면 어떨까. 학습의 공간을 넘어 새로운 ‘만남의 장’이 되는 시니어초등학교가 울산광역시에 있다.

지난 3월 19일 울산광역시 남구 가족문화센터에서 시니어초등학교 시니어모델반 수업이 진행됐다. 보라색 교복을 입은 학생들은 전신 거울을 앞에 두고 ‘손 허리’를 한 뒤 진지한 표정으로 ‘워킹’을 시작했다.

“고개를 살짝 들고 어깨 펴고 배에 힘을 주면서 중심을 잡아주세요. 그 상태에서 4박자에 맞춰 걸을게요. 바르게 걸으면 근력운동도 되고 자세도 곧게 만들 수 있어요.”

시니어 학생들은 강사의 지도에 따라 다리를 들고 펴며 걷기를 반복했다. 스텝이 꼬여도, 중심이 흐트러져도 괜찮았다. 자신감을 갖고 연습하자며 서로를 응원하고 독려하는 같은 반 친구들이 있기 때문이다.

시니어초등학교는 ‘만남의 장’이 됐다. 시니어모델반의 반장으로 선출된 임홍택씨(67·남)는 “학교에 입학하니 잊고 지냈던 동창생도 있고 직장동료도 만났다”며 “학교에 오지 않았으면 알지 못했을 새로운 친구들과 수업도 듣고 이야기도 나눌 수 있어 즐겁다”고 말했다. 입학식 후 두 번째 수업을 진행한 날이었지만 벌써 많은 이들이 친근해진 모습이었다.

시니어초등학교의 수업은 삶에 활력을 준다. 수업을 열심히 듣던 윤경애씨(64·여)는 “나이가 들어 자세가 구부정했는데 시니어모델 수업을 듣다 보니 벌써 자세가 교정되고 걸음걸이가 젊어진 느낌”이라고 했다. 또 “학교에 나오는 수요일과 목요일에는 아침부터 설레는 마음에 부지런히 준비하게 된다”며 웃었다.

▲스마트기기활용반 학생들이 수업을 듣고 있다./사진=신재은 기자

같은 시각 울산대공원 지관서가에서는 스마트기기 활용반의 수업이 진행됐다. 스마트폰 활용법, 메신저 기능 안내, 스마트폰 사진·동영상 촬영 및 편집, 키오스크 사용법 등을 배울 수 있는 강좌다. 이날은 카카오톡 오픈채팅방 사용법과 편리한 기능에 대한 강의가 있었다.

스마트기기 활용반 학생인 박영희씨(62·여)는 “집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다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시니어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됐다”며 “평소에 자주 쓰던 메신저 앱이지만 알지 못해 활용할 수 없었던 기능들을 배우니 새롭고 유익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수업이 끝난 후 시니어 학생들은 ‘어떤 동아리 활동을 하고 싶은지’, ‘오늘 수업이 어땠는지’ 이야기를 나누며 하교했다. 삼삼오오 모여 학교 이야기에 웃음짓는 시니어들의 모습은 50여 년 전 그때 그 시절 초등학생들과 똑같았다.

◇ 유익함에 재미를 더한 시니어초등학교 프로그램

▲지난 3월 5일 울산 시니어초등학교 3기 입학식이 열렸다./사진제공=울산 시니어초등학교

울산 시니어초등학교는 56~74세 시민이 참여할 수 있는 학교로 올해 운영 3회째를 맞았다. 김두겸 울산시장은 인생 2막을 시작하는 시니어들이 즐겁고 보람찬 삶을 보낼 수 있도록 공약사항이었던 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개교 3년 만에 이곳은 만남과 배움, 소통의 장이 됐다.

박선구 울산 시니어초등학교 교장은 “울산은 공업도시다 보니 직장을 따라 타지에서 온 분들이 많다”며 “이들이 퇴직하고 나면 삶이 무료해 고향으로 돌아가기도 하는데, 이들을 위해 친구도 사귀고 배울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시니어초등학교는 매 기수마다 신청 첫날 모집이 완료되는 등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올해는 신청 접수 첫날 180명 정원에 318명이 지원해 176%의 높은 경쟁률을 기록했다. 3기 시니어초등학교에 입학한 한 학생은 “입학하기 위해서는 선착순으로 현장접수를 해야 하는데 경쟁률이 높다는 이야기를 듣고 새벽 4시부터 줄을 섰다”고 말했다.

시니어초등학교는 △시니어모델반 △일본문화탐방반 △스마트기기 활용반 △울산역사 플로깅반 △시니어힐링체조반 등 전문 분야 5개 반을 운영한다. 매주 목요일에는 역사, 재테크, 노후건강관리, 교양 등을 주제로 한 명사의 강의가 진행된다. 박선구 교장은 “시니어들의 삶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인 주제에 사회 봉사, 성취 등을 함께 느낄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반을 구성했다”고 밝혔다.

◇‘관계망 형성’이 차별점…졸업 후에도 봉사단체 운영

▲울산시니어 동백봉사단의 집 청소 및 정리 수납 봉사활동 모습/사진제공=울산 시니어초등학교

알찬 수업 내용도 있지만 시니어초등학교가 사랑받는 이유는 따로 있다. 새로운 관계망 형성을 돕는 색다른 프로그램들 때문이다. 최근엔 평생학습센터, 백화점 문화센터, 복지관 등에서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지만 ‘즐거움’과 ‘재미’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은 많지 않다. 시니어초등학교는 3월부터 11월까지 1,2학기 동안 △봄소풍 △수학여행 △현장체험학습 △운동회 △동아리활동 △플리마켓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깊은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게 돕는다.

김성두씨(72·남)는 작년까지 플랜트 엔지니어로 근무하다 은퇴 후 공허함을 느끼던 중에 시니어초등학교를 알게 됐다. 김씨는 “우리 나이에는 전문 지식을 배우는 것도 좋지만 사람을 만나 인연을 맺고 알아가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2기 선배가 이곳에서는 다양한 사람들과 깊이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해서 신청했다”고 설명했다.

동호회 활동도 시니어초등학교의 큰 매력이다. 학생들은 정규 수업시간 외에 △파크골프 △당구 △트레킹 등의 동호회 활동을 할 수 있다. 시니어들의 선호가 높은 종목 중 건강에 도움이 되는 체육활동이나 친목을 도모할 수 있는 단체활동으로 구성했다.

시니어초등학교를 계기로 시작된 인연은 봉사단체로 이어졌다. 졸업생들은 비영리단체 ‘동백봉사단’을 만들어 저소득층과 독거노인 등을 위한 봉사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봉사단의 회원수는 1기 졸업생 101명과 2기 142명 등 모두 243명이다.

이들은 관내 독거노인과 장애인 등 관내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집청소와 정리수납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울산재가노인복지협회와 연계해 사업을 발굴한다. 자연 정화와 농촌일손돕기 활동에도 나선다.

박선구 교장은 졸업생들이 사회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단체들을 조직할 계획이다. 박 교장은 “동백봉사단 외에도 여러 분야 공무원, 기업체 등 다양한 분야의 퇴직자를 모아서 울산에 필요한 재능기부를 할 수 있는 방안도 구상 중”이라고 말했다.

◇“시니어의 잠재력과 역량 개발 위해 힘쓸 것”

개교 이후 울산가족문화센터 일대에서 ‘더부살이’를 해왔던 시니어초등학교는 자체 교사 건립을 추진 중이다. 울산시가 부지를 제공하고, BNK울산경남은행이 건물을 지어 시에 기부채납하는 형태로 사업이 진행될 예정이다. 매년 지역사회공헌사업을 진행하던 BNK울산경남은행과 시니어초등학교 건물을 신축하고자 했던 시의 이해관계가 맞았다.

BNK울산경남은행은 신축건축물에서 ‘시니어금융지원센터(가칭)’를 토지 임대료 없이 무상으로 운영하고, 나머지 공간에서는 시니어초등학교 수업을 진행하는 방향으로 공간 활용을 협의하고 있다. 건립 시기는 시가 당초 학교 신축을 예정했던 2028년쯤이 될 것으로 보인다.

매년 신입생 모집 때마다 신청자가 몰리는 등 인기를 끌자 시는 학사 일정을 1학년 2학기제에서 3학년으로 늘리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울산시 관계자는 “시니어초등학교에 대한 학생들의 수요가 크기 때문에 2028년쯤에는 학년을 늘리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시니어초등학교는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는 시니어들에게 ‘소통’의 플랫폼이 되고 있다. 김두겸 시장은 “‘아무렇게 사는 젊은이보다 목표가 있는 노인이 더 활기차고 희망이 많다’는 말을 시니어초등학교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며 “우리 시는 사회 변화에 맞춰 실생활에 유용하고 어르신들이 원하는 교육을 통해 잠재력과 역량을 개발해나갈 수 있도록 더욱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4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jenny0912@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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