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동안 생활비만 받다가 남편과 사별하고 22년 만에 처음으로 일해서 돈을 벌어봤어요. 작업이 힘들지 않고 재밌습니다. ‘일하는 밥퍼’ 덕에 우울증도 달아났어요.”
분주한 작업 소리와 조곤조곤 이야기 소리가 공존하는 이곳. 지난 1월 16일 ‘일하는 밥퍼’ 작업장 중 하나인 충북 청주시 서원구 열린행복밥집에서 30여 명의 어르신이 작업에 열중이었다. 어르신들은 하얀색 플라스틱 조각에 폼 형태의 커버를 끼우는 일을 반복했다. 부품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부서지거나 잘못 꽂힌 것은 없나 꼼꼼하게 검수했다. 이 부품은 자동차에 들어가는 체결 핀으로, 이날 어르신들은 다른 작업장에서 발생한 불량품을 재조립하는 업무를 맡았다.
열린행복밥집 작업장을 맡고 있는 구은영 소장은 “이 작업장에 오시는 어르신들이 베테랑이라 불량품 관련 작업을 담당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어르신들이 매일 작업장으로 모이는 이유는 충북도의 생산적 복지 정책인 ‘일하는 밥퍼’ 사업 때문이다. 도는 60세 이상 봉사활동 참여 희망자에게 간단한 일감을 제공하고, 봉사 시간과 온누리상품권을 지급한다. 어르신의 자아실현과 자존감 회복, 지역경제 활성화가 목적이다.
고령임에도 매일 작업장에 나온다는 이점순(90세) 어르신은 “집에서 가만히 있으면서 치매에 걸릴까 걱정했는데 할 수 있는 일거리가 있다는 게 좋다. 아침 7시에 먼저 나와 추위도 녹이고 사람들과 커피도 마시니 재밌다”고 말했다. 이어 “활동하며 모은 돈으로 손자손녀에게 맛있는 반찬도 해줄 수 있어 뿌듯하다”고 덧붙였다.
김재만(75세) 어르신은 “노인이 특별히 일할 수 있는 곳이 없는데 여기에 오면 일도 하고 온누리상품권도 받아 맛있는 것을 사 먹을 수 있다”며 “자녀들에게 손 벌리지 않고 움직이며 건강도 챙길 수 있어 일석이조”라며 웃었다.
오후 12시에 방문한 두꺼비시장 일하는 밥퍼 사업장은 더덕 향기로 가득했다. 25명의 작업자가 모여 앉아 더덕 50kg을 손질했다. 껍질을 까고 잔챙이를 다듬는 모습이 사뭇 진지했다. 이날 작업한 더덕은 인근 더덕삽겹살 가게로 납품됐다. 두꺼비시장 밥퍼 사업장은 마늘, 양파, 더덕, 파 손질 등 계절에 맞게 농산물을 수급해 전처리하고 있다.
오명숙(69세) 어르신은 “내가 벌어 내가 쓰는 기쁨이 크다”며 “일하며 받은 상품권으로 시장에서 고기와 반찬거리를 사는 즐거움, 여기 모인 언니 동생들과 화기애애하게 일하는 즐거움에 삶이 지루하지 않다”고 했다.
황성용 두꺼비시장 일하는 밥퍼 소장은 “사업에 참여한 어르신들의 만족도가 높다”며 “지난 12월에는 어르신들이 십시일반 모아 공동사회모금회에 기부도 했다. 사회봉사 차원에서 일하며 번 돈을 사회에 환원하며 어르신들의 자존감도 올라간다”고 밝혔다.

봉사와 소일거리 결합…자존감 높이고 용돈도 마련

‘일하는 밥퍼’ 사업은 고령화가 가속화되며 발생하는 어르신의 사회적 고립과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기획됐다. 도는 봉사단체, 노인회, 경로당, 전통시장을 통해 △농산물 손질 △상품 포장 △공산품 조립 등 어르신에게 적합한 일거리를 제공한다. 어르신들은 최대 3시간 동안 활동하고 1만5000원의 온누리상품권을 받는다. 어르신들이 전통시장에서 상품권을 사용하면 지역경제도 활성화될 것이라는 계산이다. 재원은 충북적십자사, 충북사회복지공동모금회 기탁금으로 마련된다.
현재 전통시장, 사회복지시설, 경로당, 노인복지관, 종교시설 등에서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시범사업이 시작된 지난해 3월부터 지난 1월 7일까지 총 51개소에서 1만8000여 명의 어르신이 참여할 만큼 호응도가 좋다. 최근 작업장이 56곳까지 확대됐다.
김영환 충북도지사는 청주 상당공원에서 무료급식을 받기 위해 줄을 서 있는 노인들을 보고 ‘일하는 밥퍼’ 사업을 떠올렸다.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노인들이 생산적인 활동을 통해 직접 밥을 사서 먹을 수 있게 ‘자립’을 지원하자는 취지에서다. 사업명은 유명 무료급식 봉사단체 ‘밥퍼’를 본떠 지었다.
일하는 밥퍼 수행기관인 (사)함께하는나눔회의 이정우 단장은 “무료급식 봉사를 하다보니 어르신들이 여기에 익숙해지는 게 보였다”며 “‘일하는 밥퍼’를 통해 소외계층이 사회에 나와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일손이 모자라는 기업과 시장에도 도움이 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고 있다”고 설명했다.
어르신들의 반응은 폭발적이다. 매일 할 일과 갈 곳이 있다는 점 덕분에 우울감이 개선되고 가계에 보탬이 됐다고 말한다. 일감이 한정돼 있어 작업 시작 시간보다 먼저 작업장에 나오는 이들도 많다.
사업에 동참하고자 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CJ제일제당이 지난해 ‘일하는 밥퍼’ 사업을 위해 충북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지정후원금으로 1억5000만원을, 충북농협도 지난해 1억5000만원을 기탁했다. 이 밖에도 충북개발공사, 우리은행 등 기업들의 기부가 이어지고 있다. 지역의 종교단체도 함께 힘을 모으고 있다. 청주은성교회는 일하는 밥퍼 사업에 700만원을 기탁했고, 천주교 청주교구청은 김 지사와 만나 성당 내 유휴시설을 활용한 작업공간 제공 등을 협의했다.
충북도 관계자는 “어르신들이 일하는 밥퍼 사업에 참여하며 자존감을 회복하고 지역사회와 유대감을 강화하고 있다”며 “온누리상품권 지급 및 사용을 통해 지역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기업의 사회공헌활동 증대 효과도 기대한다”고 밝혔다.
“참여 인원 1만 명까지 확대 목표”…안정적 재원 마련 필요

충북도는 올해를 ‘일하는 밥퍼’ 도약의 해로 정하고 사업 확대에 나설 방침이다. 지난해 시범운영 결과 어르신들의 생계 지원을 넘어 지역사회와의 활발한 소통과 참여를 가능케 하는 새로운 복지모델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도는 지역 내 단체를 대상으로 설명회를 열어 참여를 유도할 계획이다. △경로당 △종교단체 △민간 자원봉사 단체 등에 홍보를 진행해 하루 참여 인원을 1000명, 장기적으로는 1만 명까지 확대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하고자 한다. 초기 시범 단계에서 일부 자원봉사단체와 사업을 추진해왔으나 올해는 지속적인 홍보를 통해 더 많은 단체가 참여할 수 있게 할 예정이다.
충북의 성공 사례를 바탕으로 전국 지자체와 협력해 사업을 확대한다. 김 지사는 지난 1월 6일 충북도청 출입기자들과의 자리에서 “서울시와 경북도가 조만간 ‘일하는 밥퍼’ 성공 사례를 벤치마킹하기로 했다”고 언급했다. 지난 1월 16일에는 경북도 어르신복지과 관계자들이 사업 현장을 방문해 정책 운영 방식과 성과를 확인했다.
사업의 성공적인 확장과 유지를 위해서는 보완해야 할 사항도 있다. 먼저 작업 물량 확보다. 참여 인원과 작업장이 많아지면 작업 물량이 부족해 사업 운영에 한계가 생길 수 있다. 한 일하는 밥퍼 작업장의 소장은 “더 많은 어르신이 참여하기 위해서는 농산물이나 공산품 등 작업 물량이 확보돼야 한다”고 말했다.
안정적인 재원 마련도 필요하다. 도가 지난 1월 16일까지 받은 후원금은 5억9000만원 가량이지만 참여자가 급증하면 사업 규모가 축소될 가능성이 있다. 지속가능한 사업 수행을 위해서는 후원금 부족 상황에 대비한 재원 마련이 시급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도는 도내 기업들과 협력해 어르신에게 안정적인 일감을 제공하고, 기업의 인력 부족 문제도 함께 해결하는 등 상생 모델을 구축할 예정이다. 도 관계자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 활동과 사업을 연계해 지속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필요하다면 예산 투입도 고려하고 있다”고 했다.
김 지사는 "일하는 밥퍼 사업은 어르신들이 단순한 복지 수혜자가 아니라 지역사회의 중심에 설 수 있음을 증명하는 혁신적인 도전"이라며 "어르신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수준을 넘어 삶의 활력과 자존감을 되찾는 귀중한 기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2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