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VB 사태에 화들짝…'예금자보호법' 개정안 향배는

[법으로 보는 세상] 예금자보호 한도 상향 목소리 커…도덕적 해이는 숙제

머니투데이 더리더 이하정 기자 2023.04.04 10:39 카카오톡 네이버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 3월 27일 오전 서울 여의도 KB국민은행 여의도영업부에서 고객이 상담받는 모습./사진=뉴시스

지난달 10일(현지시간) 미국 실리콘에서 가장 큰 상업은행인 실리콘밸리은행(SVB)이 파산했다. 미 연방예금보험공사(FDIC)에 따르면 SVB는 지난해 말 기준 미국에서 16번째로 큰 은행으로, 2008년 금융위기 때 무너진 저축은행 워싱턴뮤추얼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은행 파산으로 기록됐다. SVB 파산의 원인은 대규모 예금 인출, 즉 뱅크런 때문이다.

SVB의 주요 고객은 스타트업. 고금리로 인해 돈줄이 막힌 이들 기업의 예금이 줄어들면서 대부분 미 국채로 구성된 매도가능증권(AFS, 만기 전 매도할 의도로 매수한 채권과 주식)을 어쩔 수 없이 매각해야 했다. 채권 가격 급락으로 인해 은행이 대규모 손실을 봤다는 발표가 나오면서 위기가 시작됐다. 이후 불과 이틀도 안 돼 은행 주가가 60% 이상 폭락했다. 벤처캐피털 회사들이 “예금을 빼라”며 은행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나서자 고객들의 예금 인출은 가속화됐다. SVB는 회사 매각을 발표했지만, 미 금융당국은 인수자가 나타나길 기다리는 대신 은행 폐쇄를 결정했다.

SVB 파산 이틀 후 가상화폐 거래 주요 은행으로 꼽혀온 시그니처은행이 폐쇄됐다. 예치금 가운데 가상화폐 부문 비중이 커 최근 실버게이트 은행 청산의 여파로 역시 뱅크런을 맞았다. 잇따른 금융권 파산에 미 재무부와 연방준비제도(Fed),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는 이들 은행에 고객이 맡긴 돈을 보험 대상 한도와 상관없이 전액 보증하고 유동성이 부족한 금융기관에 자금을 대출하기로 했다. “당신의 예금은 안전하다”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선언 이후 나온 조치로, 사태가 금융시스템 전체의 위기로 확산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해법이었다.

미국 SVB 파산으로 시작된 은행 부실화에 대한 공포는 크레딧스위스(CS)를 거쳐 독일 최대 투자은행인 도이체방크까지 번지고 있다.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이 긴급 유동성 지원에 나서고 있지만 ‘제2의 SVB’가 나타날 수 있다는 긴장감은 지속하고 있다.

◇ 국내서도 ‘예금 전액 보호’ 검토

SVB와 시그니처은행의 연쇄 파산에 대해 미 정부와 연준이 내놓은 ‘예금 전액 지급 보증’ 방침은 적정성 논란 속에 다소 오락가락하는 행보를 보이기도 해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적어도 금융시장 불안 확산을 차단하는 데는 큰 성과를 거뒀다는 분석이다. 이번 사태를 겪으며 우리 금융당국도 예금 전액 보호 조치가 가능한지 관심이 쏠린다.

금융위원회는 김주현 위원장 지시에 따라 만일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 고객이 맡긴 예금을 전액 지급보증하는 방안에 대한 검토에 들어갔다. 금융위 관계자는 “SVB와 같은 특이한 케이스의 은행은 우리나라에 없지만 다른 나라에서 예금 전액을 보호하는 사태가 있었던 만큼 우리도 만에 하나 그런 상황이 온다면 어떤 절차를 갖고 있는지 내부적으로 살펴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금융당국은 SVB와 시그니처은행의 예금을 전액 정부가 보증한다는 미국 당국의 정책 결정 배경과 제도적 근거를 면밀히 파악하기 위해 연방예금보험공사(FDIC) 등에 질의서도 보낼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 현재 5천만원까지 보호…23년째 제자리

▲ 2011년 2월 21일 오전 부산 진구 우리상호저축은행 앞에는 수천여 명의 예금자들이 몰려 예금 인출을 요구하고 있다. 부산저축은행에 이어 부산 계열사 등 4곳에도 영업정지 조치가 내려지면서 대규모 인출사태가 타 저축은행으로 확산됐다./사진=뉴시스

은행이나 증권사 등 금융기관들이 정리 절차에 들어갈 경우 이 기관에 돈을 맡긴 고객들에게는 ‘예금자보호법’이 적용된다. 예금자보호법은 예금자 보호 보험금의 한도를 1인당 국내총생산, 보호되는 예금 등의 규모를 고려해 대통령령으로 정하도록 하고 있다. 현재 대통령령은 예금자 보험금 지급 한도를 5000만원으로 하고 있다. 예금보험공사를 통해 동일한 금융회사 내에 예금자 1인이 원금과 이자를 포함해 5000만원까지 보호받을 수 있는 것으로, 예금자가 해당 금융사에 대출이 있다면, 예금에서 대출금을 먼저 상환시키고 남은 예금을 기준으로 한다.

예금자보호법은 1995년에 제정됐다. 법에 따라 1996년 예금보험공사가 설립되면서 은행에 대해 예금자 보호 한도 2000만원이 설정됐다. 이듬해인 1997년 말에는 외환위기로 금융사들의 구조조정 충격을 줄이기 위해 2000년까지 한시적으로 전액 보호 제도로 전환된다. 하지만 부실 금융회사가 고금리로 예금을 무리하게 유치하는 등 ‘도덕적 해이’가 드러나면서 전액 보호는 종료된다. 이에 따라 1998년 8월 이후 가입한 예금에 대해 원금 2000만원 이하 시 원리금 2000만원까지 보호, 원금 2000만원 초과 시에는 원금만 전액 보호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2001년 1월에는 부분 보호 제도로 변경됐다. 보호 한도는 지금의 5000만원. 지금까지 22년 넘게 보호 한도는 유지되고 있다.

예금자 보호는 ‘예금자 보험’을 통해 이뤄진다. 예금보험공사가 평상시 금융회사에서 보험료를 받아 예금보험기금을 적립하고, 금융회사가 예금 지급이 불가능해질 때 보험금을 지급하는 것이다. 현재 보호 대상 금융회사는 은행, 생명.손해보험사, 증권사, 종합금융회사, 상호저축은행이다. 최근 고금리 예·적금을 앞다퉈 내놓은 신협, 새마을금고, 지역농협·수협 등은 개별법에 따라 각 업권 중앙회가 예금자를 보호한다. 우체국 예금은 정부가 전액 보호해준다.

◇ “예금자 보호 한도 높이자”…예금자보호법 개정안도 6건 발의

▲ 유재훈 신임 예금보험공사 사장이 지난해 11월 21일 서울 중구 예금보험공사에서 열린 취임식에 참석해 취임사를 하고 있다./사진=뉴시스

예금자보호법이 예금자 보호 보험금의 한도를 1인당 국내총생산 등을 고려해 대통령령으로 정한다고 하고 있음에도 지난 22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조정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제 보험금 한도를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2001년과 비교해 2021년 기준 1인당 GDP는 2.7배, 부보예금액(보호되는 예금액)은 5배 증가했다는 점이 핵심 근거다. 국가별 1인당 GDP 대비 보호 한도 비율도 주요국에 비해 낮다. 우리나라는 1.25배인 데 비해 미국 3.6배, 영국 2.56배, 독일 2.35배, 일본 2.27배 등이다. 미국은 계좌당 25만 달러(약 3억3000만원), 영국 8만5000파운드(약 1억4000만원), 일본 1000만 엔(약 1억원) 등이다.

예금자 보호 한도를 높이자는 주장의 근거는 금융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다. 금융회사가 부실화됐을 때 보호받지 못하는 예금이 많을수록 예금 인출은 가속화되고, 금융회사의 파산도 그만큼 앞당겨진다. 예금자 보호 한도를 높이면 금융회사의 위기를 선제적으로 막을 수 있다는 논리다.

금융위원회가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9월 말 기준 국내 금융회사의 부보예금 중 5000만원 이하 예금자 수는 전체의 98.1%였다. 여기에는 금융회사의 확정기여(DC)형 퇴직연금과 개인형 퇴직연금(IRP) 예치금 등이 모두 포함됐다. 즉, 국내 금융회사에 예금한 대부분 일반 고객은 예금자 보호 한도 내에서 저축했다는 의미로, 대부분 예금을 보호받을 수 있기 때문에 급격한 자금인출 사태는 일어나기 힘들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같은 자료를 고객 수가 아닌 예금 규모로 나눠보면, 금융회사 부보예금 중 예금자보호법으로 보호받는 돈의 비중은 51.9%로 절반을 겨우 넘는 것으로 나타난다. 고객 수로는 2%가 채 되지 않지만 이들이 맡긴 예금 규모가 커서 전체 48.1%의 예금이 보호되지 않는 것이다. 고객 수는 소수지만, 이들이 일시에 거액을 인출하게 되면 금융회사는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지난해부터 현재까지 국회에는 예금자 보호 한도를 높이는 것을 골자로 하는 예금자보호법 일부개정법률안이 6건 발의됐다. 이 가운데 3건은 미 SVB 사태 이후 제출됐다.

지난달 24일 양기대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예금자보호법 개정안’은 예금자 보호 한도 최소 금액을 1억원으로 높이도록 하고 있다. 1억원 이상 범위에서 예금보험위원회가 의결을 통해 결정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또, 예금보험공사가 매년 금융업종별 특성을 반영해 보호 한도를 다르게 설정할 수 있도록 했다. 양 의원은 “경제 환경에 맞는 실질적 예금자 보호책이 필요하다”고 발의 배경을 밝혔다.

◇ 예금자 보호 한도 상향 부작용 우려도

▲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3월 23일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주현 금융위원장, 추경호 부총리,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사진=뉴시스

금융권 안팎에서는 예금자 보호 한도를 높일 경우 따를 부작용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가장 큰 우려는 도덕적 해이를 유발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정부는 1997년 말 외환위기 당시 2000년까지 한시적으로 예금액 전액을 보호했다가 1998년 전액 보호를 종료했다. 도덕적 해이 때문이었다. 예금자들은 예금액 전액이 보호되는 만큼 금리가 높은 금융회사를 찾게 되고, 부실 금융기관은 고금리로 예금을 무리하게 유치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안정적인 금융 환경을 만들려다 일부 부실 금융기관의 빚을 전 국민이 떠안게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재원 마련도 쉽지 않다는 지적이다. 예금자 보호 한도를 높이려면 예금보험기금을 늘려야 하고, 기금을 늘리려면 은행의 예금보험료를 높여야 한다. 파산 가능성이 낮은 현 상황에서 은행들이 보험료 인상을 수용할 가능성은 낮다. 보험료를 인상하게 되면 결국 예금금리를 낮추거나 대출금리를 높여야 하는 만큼 결국 고객들이 부담을 안게 된다. 보험료 부담을 지우지 않고 정부가 예금보험기금을 충당하는 방안도 있지만, 이는 국회 논의 등의 과정을 거쳐야 가능하다.

제1금융권의 경우 예금자 보호 한도가 높아지면 고객을 제2금융권에 빼앗길 수 있다는 고민도 있다. 은행권 관계자는 “예금자 보호 한도가 늘어나면 과도한 예금금리 경쟁으로 높은 금리로 한꺼번에 자금이 이동하는 뱅크런의 새로운 형태가 발생하는 등 금융시장의 불안정성이 커질 수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미국에서 일어난 은행 파산 사태는 국내 상황과 다른 만큼 단순히 미국과 비교해 보호 한도가 적다는 지적은 현실을 무시한 포퓰리즘적 발상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한 금융기관에 예치한 예금이 5000만원까지 보호되는 만큼 여러 금융기관에 분산 예치하는 고객이 일반적인 상황에서 괜한 불안감을 조장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 금융당국 “개선 검토”…금융안정계정 도입도 국회 논의 중

▲ 우체국예금은 전액 정부가 보장한다는 내용의 현수막이 광화문우체국 앞에 걸려있다.

예금보험공사는 지난해 3월 금융위원회, 금융업권 등과 함께 민관 합동 태스크포스(TF)를 출범시켰다. 예금보험제도 전반의 개편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서다. 유재훈 예보 사장은 지난달 9일 예금자 보호 한도에 대해 “아직 입장이 없고, TF에서 논의하고 있다”며 신중한 답을 내놨다. TF는 오는 8월까지는 결과물을 내놓을 예정이다.

정부는 지난해 12월 20일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예금자보호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개정안은 금융안정계정 설치를 주요 내용으로 한다. 금융안정계정은 일시적인 유동성 부족에 처한 금융회사들이 부실화되기 전에 예금보험공사가 선제적으로 자금을 지원할 수 있게 하는 제도다. 2009년 은행자본확충펀드와 금융안정기금, 2020년 금융안정특별대출 등 과거에 운용했던 금융회사 자금지원 체계를 상설화한 것이다. 미국, 일본, 유럽에서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이와 비슷한 선제적 지원 체계를 구축한 바 있다.

개정안은 2월 27일 국회 정무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 회부됐다. 이후 미 SVB 사태가 촉발돼 논의에 속도가 붙을 것으로 보인다. 금융당국은 금융안정계정이 도입되는 자체로도 시장 참여자들의 불안 심리를 잠재울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4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hjlee@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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