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계 개편 때마다 등장한 ‘40대 기수론’ 히스토리

[신년 심층 리포트③]3김 시대 탄생 원동력, 386세대 등장 구호 이어 보수당도 차용

머니투데이 더리더 편승민 기자 2021.01.05 09:51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네이버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지난 4·15 총선. 180석에 이르는 거여의 탄생을 바라봐야 했던 국민의힘은 김종인발(發) ‘40대 기수론’으로 쇄신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김 위원장은 “1970년대에 출생하고 비전과 능력을 갖춘 사람이 국가적 지도자로 부상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보수 진영의 세대교체를 통해 당의 이미지를 바꿔야만 다음 대선에서 다시 야당이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 

세대교체론은 우리 정치사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용어다. 권위주의 시절 등장한 ‘40대 기수론’은 민주화의 진전과 함께 반민주 세력을 대체하는 구심점 역할을 했다. 이 시대를 풍미한 3김(金) 시대 주역들이 가장 활발하게 정치적 기반을 다졌던 때가 40대였다. 2000년대에도 ‘40대 기수론’은 또다시 등장했다. 민주화운동의 주역인 86세대가 한국정치 전면에 나서면서다. 개혁과 혁신, 세대교체의 필요성이 대두될 때마다 등장하는 ‘40대 기수론’은 우리 정치사와 맥을 같이한다.



3김 트로이카의 시대


192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정치계를 풍미한 김영삼(YS), 김대중(DJ), 김종필(JP). 이들 3김은 적과 동지를 넘나들며 숙명의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다. 

1969년 당시 42세의 4선 김영삼 신민당 원내총무는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제7대 대통령 선거의 신민당 후보 지명전 출마를 선언했다. YS는 “패배감과 무기력에 젖어 있는 당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박정희 독재에 신음하는 국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보여줘야 한다. 내가 그 십자가를 지겠다”고 밝혔다. 

1985년 3월 6일 DJ와 YS/사진=뉴시스 독자 정태원씨 제공
이듬해인 1970년 1월에는 3선의 김대중도 신민당 대선 후보 지명전에 나서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그의 나이 47세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을 막지 못한 뒤 그와 싸울 후보가 필요했고, 유진오 신민당 총재 대신 DJ가 나서기로 결심했다. 1970년 9월 신민당 후보경선 전당대회에서 DJ가 YS를 역전하며 제7대 대선은 박정희와 김대중의 승부가 됐다. 그러나 박정희는 부정선거 의혹을 일으키며 끝내 대선에서 승리했다. 

김종필은 1961년 처삼촌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쿠테타에 가담하며 정치에 발을 들였다. 그는 중앙정보부(현 국정원)를 창설해 초대부장에 취임했으며, 1963년 공화당 창당을 주도했고, 그해 치러진 6대 총선 당선 뒤 7·8·9·10·13·14·15·16대를 거치며 9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박정희 정권에서 국무총리 자리에 올랐을 때 JP의 나이는 45세였다. 

1967년 김종필 공화당 의장이 국회 본회의에서 대표연설을 하고있다./사진=운정재단 홈페이지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 대통령이 서거하고 1980년 대선에서 3김의 격돌이 예상됐지만 12·12 쿠테타와 신군부 정권이 장악하며 무산됐다. 이후 YS와 DJ는 민주화 투쟁에 나섰고 JP는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몰려 외유길에 올랐다.

1987년 6월 민주화운동 이후 신군부 항복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으로 오랜 군사 독재가 막을 내렸다. DJ와 YS가 공동대표로 있는 민주화추진협의회를 축으로 민주진영이 구성됐고, YS는 통일민주당 총재로 취임했다. DJ는 통일민주당을 탈당해 평화민주당을 창당했으며, JP는 귀국해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했다. 3김은 나란히 13대 대선에 출마했지만 야권의 분열은 여당 후보인 노태우 후보의 승리로 귀결됐다.

1990년 YS와 JP는 집권여당인 민정당과 3당 합당에 참여해 거대여당인 민주자유당을 만들었다. 1992년 대선에서 JP는 YS를 지원해 그가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되는 데 일조했다. 1995년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한 JP는 1997년 자민련 후보로 대선에 출마했으나 선거 막판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와 ‘DJP연합’을 결성하며 DJ를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다. JP는 국민의 정부 초대 총리를 지냈다. 

1998년 YS가 퇴임하고, 2003년 DJ의 퇴임, 그리고 JP는 2004년 10선 도전에 실패하며 정계를 은퇴했고 그렇게 3김 시대는 막을 내렸다. 3김은 그들의 40대를 기점으로 우리나라 근대화, 민주화를 이끌었으며 동시에 지역주의, 보스정치라는 독특한 정치지형을 만들었다.



2000년대…386세대가 외친 ‘新 40대 기수론’


1980년대 반독재와 민주화 투쟁의 주역인 386세대 정치인들이 16~17대 국회를 거쳐 한국정치의 전면에 등장했다. 경쟁의 단초는 열린우리당 당의장 경선에서 시작됐다. 정동영·김근태라는 대선주자급 주자에 맞서 386세대가 40대기수론을 내걸고 출마했다. 386세대 맏형인 김부겸(서울대 76학번), 80년대 학원자율화 1세대 김영춘(고려대 81학번), 전대협 의장 출신의 임종석(한양대 86학번) 의원 등이 그 주인공이다. 

한편 ‘서울의 봄’ 시절 서울대 학생운동을 이끌었던 우리당의 유시민(서울대 77학번)은 2006년 초 개각에서 보건복지부 장관에 내정되면서 광주 민주화운동 세대로서는 가장 빨리 차세대 지도자로 입지를 다졌다. 

김부겸 의원은 긴급조치로 대학의 자유가 억압당하던 70년대 후반 학생운동을 했던 긴급조치 세대이자, 80년 광주 민주화운동 시절 학생운동 지도부였기 때문에 ‘민주화운동 세대’로도 불렸다. TK(대구·경북)-서울대 정치학과-재야운동-3김 극복의 국민통합추진위-친화력의 대가라는 그의 이력은 당의 결속과 전진에 경쟁력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8년 11월 14일 교육과학기술위원회 김부겸 위원장/사진=뉴시스
김영춘 의원은 1984년 학원자율화 조치 이후 학생운동의 전면에 등장했다. 그는 ‘신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우리당 당의장 경선에 출마했다. 김 의원은 우리당의 리더십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40대가 정치전면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0년 10월 8일 김영춘(49) 전 열린우리당 의원/사진=머니투데이 DB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그후 민주화 운동을 주도한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세대에서는 전대협 3기 의장 출신의 임종석 의원도 경선에 출마했다. 만 40세로 40대 재선그룹 막내였던 임종석은 출마선언에서 “40대가 명실상부하게 한국 정치의 중심에서 개혁과 통합을 아울러나가야 할 때”라고 밝혔다.

2012년 1월 18일 민주통합당 신임 사무총장으로 임명된 임종석 전 의원/사진=뉴시스
하지만 2006년 2월 18일 치러진 임시전당대회에서 정동영 상임고문이 김근태 의원을 제치고 당 의장에 선출됐다.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출마했던 임종석(21.6%), 김부겸(14.7%), 김영춘(3.8%) 후보는 모두 고배를 마셨다.

2·18 전당대회에서 신 40대 기수론은 비록 찻잔 속 돌풍으로 끝났지만 유의미한 평가도 있었다. 임종석은 전대협 의장다운 열정과 대중성을 보여주면서 차세대 정치인의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평을 받았다. 386세대 초선의원은 “이번 전대 최고 스타는 임종석”이라고 평가했다.



2010년대…보수당도 ‘세대교체’ 촉발


2010년 6·2 지방선거 결과 정치권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이명박 정부 3년 차에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집권여당인 한나라당이 패하고 친노(친노무현) 386 세대가 주축이 돼 승리를 거머쥐며 40대 신진 정치세력이 전면 등장했다.

한나라당은 20~40대 젊은층의 표심을 놓친 것을 지방선거 패배의 원인으로 분석하고 당 지도부의 인적 쇄신 움직임을 본격화했다. 

2011년 한나라당 7·4 전당대회는 신구 대결이라고 할 만큼 대치가 뚜렷했다. 전대에 나선 남경필, 홍준표, 권영세, 박진, 원희룡, 나경원 유승민(당시 선수·가나다 순) 등 7명의 후보는 막판까지 치열한 접전을 펼쳤다. 

전대의 최대 관심사는 40대 대표의 탄생이냐 혹은 비주류 대표의 당선이냐였다. 7명 중 40대는 남경필, 원희룡, 나경원 후보 3명이었다. 이들은 ‘40대 기수론’, ‘젊은 대표론’을 전면에 내세워 표심을 공략했다. 

2011년 7월 4일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한나라당 제12차 전당대회’에서 남경필 후보가 정견발표를 하고 있다./사진=뉴시스
한나라당 7·4 전당대회에 출마한 원희룡 후보가 2011년 6월 2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사진=뉴시스
한나라당 7·4 전당대회에 출마한 나경원 후보는 2011년 6월 29일 오전 대전시당에서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사진=뉴시스
비주류 출신 당 대표 후보로는 홍준표가 꼽혔다. 홍 후보는 슬롯머신 사건 수사를 이끈 ‘모래시계 검사’로도 유명했다. 그는 여의도 입성 후에 4선에 성공했지만 뚜렷한 계파에 속하지 않아 비주류로 평가됐다. 

남경필 후보는 “40대의 열정, 4선의 경륜으로 일을 완수할 것”이라고 했고, 나경원 후보는 “40대 젊은 대표가 나와 30~40대와 소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희룡 후보는 “40대인지 50대인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답답해하는 부분에 대해 소통하고 아픔을 함께할 수 있는 공감과 소통의 리더십이 필요하다”며 “젊은 세대, 서민들과 함께할 수 있는 리더십이 ‘젊은 리더십’”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홍준표 의원은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이 40대 기수론을 외칠 때 이미 정치경력은 20여 년이 됐다”며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보수당의 캐머룬도 당력이 수십 년이다. 나이만 젊다고 여당을 이끌 수 있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전당대회 결과 홍준표 후보가 당대표에 당선됐고, 친박계 대표선수인 유승민 후보가 2위로 약진했다. 40대 기수론의 나경원, 원희룡, 남경필 후보가 3,4,5위로 그 뒤를 이었다. 홍준표 대표는 당선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나를 당 대표로 뽑은 것 자체가 한나라당의 변화”라며 “비주류인 데다 계파도 없지만 이런 내가 대표로 뽑힌 것은 위기를 돌파하라는 요구가 있기 때문이다”라며 첫 과제를 계파 타파로 꼽았다.

한나라당 7·4 전당대회에서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된 홍준표 후보와 최고위원들이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남경필, 유승민 최고위원, 홍준표 대표최고위원, 나경원, 원희룡 최고위원./사진=뉴시스
한나라당 신임 지도부는 57세 홍준표 대표를 비롯해 유승민(53), 나경원(48), 원희룡(47), 남경필(46) 최고위원 등 50대 2명, 40대 3명으로 구성됐다. 전임 대표가 줄곧 60~70대였던 것과 크게 비교됐다. 특히 40대 기수론을 내걸었던 3명의 의원이 모두 최고위원이 된 것도 한나라당에서는 최초였다. 보수진영에서 40대와 50대의 전면 등장은 정치권 전반 세대교체의 신호탄이 됐다.

carriepyu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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