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웅 광복회장 “친일 청산 없이 국민통합 불가능”

자주 독립국가 완성하는 것…모든 세대가 공감하는 ‘광복’

머니투데이 더리더 임윤희 기자 2020.08.11 09:12 카카오톡 네이버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 김원웅 대한광복회장/사진=머니투데이 홍봉진 기자
‘친일청산’은 ‘제2의 항일독립운동’이다.
18대 총선에서 낙선한 뒤 강원도 인제에서 농사를 짓던 김원웅 전 국회의원이 ‘친일청산’을 내걸고 광복회장으로 복귀했다. 광복회를 대한민국의 정신적 지주로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정했다.
지난해 광복회장에 취임한 김원웅 회장은 3선 국회의원(14, 16, 17) 출신이다. 의원 시절에는 통일외교통상위원장을 맡는 등 외교통으로 활약했다.
김 회장은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다. 부친 김수근 선생은 조선의열단 출신으로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모친 전월선 선생은 여성광복군 출신으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그의 부모는 백범 김구 선생의 중매로 연을 맺었다.
머니투데이 <더리더>는 광복절을 앞두고 김 회장을 인터뷰했다. 그는 “친일청산 없이는 국민통합이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또 “남북 분단 극복으로 자주 독립국가를 완성하는 것이 모든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광복’의 의미”라고 밝혔다.



제14대와 16, 17대에 걸쳐 3선 국회의원을 지내셨다. 정계 은퇴 후 10년 만에 대한 광복회장으로 취임했다. 그간 어떻게 지냈나



1992년 초선으로 국회에 입성했다. 당시는 지역감정을 이용한 정치가 판을 치고 있었다. 재선에서 지역주의 청산을 내걸었다가 낙선했다.
당시 낙선했던 이철, 제정구, 노무현, 김정길 등 10여 명이 모여서 한뜻으로 식당을 열었다. 식당 이름은 하로동선(夏爐冬扇, 여름의 화로(火爐)와 겨울의 부채라는 뜻으로, 아무 소용(所用)없는 말이나 재주를 비유)이었다.
내가 식당 사장을 하고 노무현이 감사를 맡아 4년간 운영했다. 그 이후 다시 국회에 입성해 노무현 정부도 일으켰다. 하지만 2008년 총선에 완패하고 막역한 사이였던 제정구(1944년 3월 1일, 경상남도 고성 - 1999년 2월 9일)와 노무현(1946년 9월 1일 - 2009년 5월 23일)이 10년 사이에 죽고 나니 뒤를 돌아보게 됐다. 당시 내 나이 60이 넘었고, 이미 3선 의원을 지냈으며 정권도 빼앗긴 상황이었다. 물러나자는 생각이 들어 강원도 산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10년간 농사일을 하다가 작년 5월에 광복회장 선거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출마를 결심했다.



오랜 침묵을 깨고 맡은 자리인 만큼 임하는 각오가 남다를 것 같다



정치에서는 원로지만 역대 광복회장 중에는 최연소다. 그만큼 적극적으로 임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선거 공약에서부터 역대 광복회장이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친일’이라는 단어를 수면으로 끌어올렸다. 친일찬양금지법 제정 등을 공약으로 내걸고 정면으로 문제 제기에 나섰다. 많은 회원이 공감해주고 있다.



‘친일청산’을 화두로 꺼낸 이유는



노무현 정부 전후로 국회 외교통상위원회에서 8년간 있었다. 웬만한 외교부 장관보다 기밀 문서를 더 많이 볼 수 있었다.
일제 패망 후 맥아더 장군이 들어와 미 국무성에 보고한 문서를 보면 조선을 독립시킬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은 일본에 이어 대한민국을 실질적 식민지로 만들고 싶어 했다.
민족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으면 관리가 어려워 친일파들이 정권을 잡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대원칙이었다. 맥아더가 일본 원로들에게 자문한 대화록이 미 국무성에 남아 있다. 이때 일본 원로들은 한국을 통치했던 노하우를 그대로 전해준다. 방법 중 하나가 조선사람들을 능란하게 잘 다루는 친일파를 활용하는 것이었다. 일본을 위해 충성을 했듯 미국을 위해 충성을 다할 것이란 조언이었다.
미국은 이 조언에 따랐고 해방정국에서 일본이 만들어놓은 관료체제와 경찰을 그대로 썼다. 75년이 지나다 보니 그런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상층부, 기득권층에 포진하게 됐다.
친일청산 없이는 국민통합은 불가능하다. 민족을 이간시키는 데 몰두하는 친일반민족 세력의 청산 없이는 남북통일도 불가능하다. 젊은이들에게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만들어주기 위해 친일청산을 제2의 항일독립운동이라고 생각하고 광복회가 앞장설 계획이다.



독립운동가 김근수, 전월선의 장남으로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다. 과거 독립운동가의 삶은 어땠나



어릴 때 우리 집에서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조촐한 술자리가 있을 때면 항상 막걸리 심부름을 하곤 했다. 8.15가 다가오면 어른들이 그때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8.15 광복절 행사에 참석하고 싶지 않다. 단상 아래에서 박수치는 사람은 독립군 출신이고 단상 위에 있는 사람들은 독립군 토벌자가 아닌가.”
독립운동가들은 해방 후에도 친일파로 인해 고통받았다. 친일파들은 일제강점기 때와 마찬가지로 자리를 보전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해방 후에도 독립운동가나 그의 후손이라는 것을 밝히면 불이익을 당하기 일쑤였다. 독립운동가라는 타이틀이 죄가 되는 시대에 살았다. 가족뿐 아니라 먼 친족들까지도 모두 그 사실을 발설하지 않고 살았다.
내가 14대 국회의원이 되고 난 뒤 부친이 독립운동가라는 기사를 보고서야 고향(대전) 친구들이 그 사실을 알았다. 얼마나 오랜 시간 침묵하며 살아왔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김원웅 대한광복회장/사진=머니투데이 홍봉진 기자



독립 유공자들의 처우 개선에 대한 활동을 많이 했다. 광복회 차원에서 독립운동가의 후손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 있다면



광복회는 다른 보은기관보다 예산이 많지 않은 편이다. 취임하자마자 정관을 개정하고 수익사업을 시작했다. 유인태 전 국회사무총장(1948년 9월 5일, 충청북도 제천)이 꽤 역사 의식이 있는 분으로 국회에 작은 카페 자리를 내어줬다. ‘헤리티지 1919’라는 카페를 지난 5월 오픈했다. 유사한 방식으로 여러 곳에서 시작해보려 한다. 수익금은 가난한 독립운동가의 후손을 위해 사용할 계획이다.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던 ‘친일찬양 금지법’을 추진 중인데



유럽에선 나치 및 나치 협력자처벌법을 소급입법으로 만들었다. 나치 깃발을 들거나 히틀러를 찬양하는 발언 등은 모두 형사 처벌을 당한다. 반인륜적 전범에 대해서는 시효 없이 끝까지 처벌한다는 게 국제적 조류지만 우리는 동참하지 않고 있다. 본격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자는 생각으로 ‘친일찬양 금지법’을 추진하게 됐다.
이 외에도 ‘국립묘지법’을 개정하는 초안을 만들었다. 국립묘지에 있는 친일인사의 묘를 이장하든가 이장을 원치 않으면 친일 행적비를 세운다는 안이다.
지난 2월 총선을 앞두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질문서를 하나 보냈다. 1109명에 달하는 모든 당 국회의원 후보의 정책 의견에 대해 설문조사를 실시, 이를 공개하겠다는 것이었다.
조사 내용은 두 가지였다. ‘친일찬양 금지법’에 대한 찬성과 반대 여부, ‘국립묘지법’ 개정에 대한 찬반 여부였다. 찬반 여부를 공개하는 것은 선거법과 무관하다는 답변을 듣고 조사를 했다.
그 결과 지역구 당선자 253명 중 3분의 2가 넘는 190명이 찬성 의견을 줬다. 특히 고무적인 것은 통합당 지역구 당선자 84명 중 과반인 44명이 찬성했다는 것이다. 그중엔 주호영 원내대표도 포함돼 있다. 올 정기 국회 때 법안을 통과시킬 계획이다.



광복절의 의미가 많이 퇴색하고 있는 느낌이다



광복절은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가 일제 식민통치로부터 벗어나 자주독립을 되찾은 날이다. 하지만 곧바로 분단국가로 나누어졌다. 남북 분단을 극복해 자주 독립국가를 완성하는 것이 모든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광복’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지만 분단이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통일을 하면 한국경제에 다시 불이 붙을 것으로 본다. 영토대비, 인구대비 가장 많은 국방비를 지출하는 곳이 한반도다. 국방비 지출을 교육 복지로 돌리면 지상낙원이 될 수 있다. 경제는 살아나 한반도가 세계의 중심축이 된다. 골드만삭스가 내놓은 보고서에도 한국이 통일되면 몇 년 안에 프랑스, 독일, 일본을 따라잡을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김원웅 프로필 
출생 1944년 3월 8일, 중국/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대전고등학교/독립기념관 이사/제14대, 16대, 17대 국회의원/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위원장

☞대한광복회는?
일본에 의해 국권이 침탈되기 시작한 1895년 을미사변으로부터 광복 때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에 항거하다가 순국했거나 옥고를 치른 사람 및 후손을 대상으로 한다. 정부로부터 독립유공건국훈장·독립유공건국포장·독립유공대통령표창을 받은 사람과 그들의 유족으로서 연금(年金)을 받고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다.
1965년에 설립됐으며 독립운동가의 후손 8100명으로 구성돼 있다. 자손이 많고 적고를 떠나 단 한 명의 후손만 등록이 가능하다.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의 고귀하고 숭고한 독립운동 정신을 이어받아 국민을 선도하며 역사적 소임을 다해나가고 있다.
회원의 친목단결을 위해 여러 가지 회원경조지원(會員慶弔支援)을 시행한다. 민족정기의 선양을 위해 해마다 광복절에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무후선열추모제(無後先烈追慕祭)를 지낸다. 매년 11월 17일에는 독립운동선열추모제를 가진다. 1981년부터는 애국선열유적지 순례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주요 사업 
민족통일, 민족정기 선양 및 애국정신 함양을 위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또 순국선열 및 독립유공자의 희생정신 계승, 승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독립운동관련 각종 학술회의 및 홍보활동 사업을 활성화하고 내외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사업을 내실화 및 다각화하고 있다. 이 외에도 독립유공자 후손을 위한 장학사업과 독립유공자 유족의 수권 확대를 강화하는 일도 맡고 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 국가 환수에 대한 정부 예산관리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8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yunis@mt.co.kr

정치/사회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