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성 건축가 “헤이리는 공동의 가치 찾으려는 노력”

[지역을바꾸는건축]예술마을의 중심인 주민들이 약속 정하고 이행하는 공동체가 기반

머니투데이 더리더 임윤희 기자 2019.10.25 09:59 카카오톡 네이버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김준성 건축가/사진=더리더
운생동 건축사사무실의 두 대표가 번갈아 건축계를 대표하는 건축가들을 만나 대담을 진행한다. 건축가들이 생각하는 한국 건축계의 문제점을 자연스럽게 들춰본다. 또 지역을 변화시키고 있는 건축의 힘을 전문가의 시선으로 분석한다. 이번 달엔 김준성 건축가를 만났다.
그는 브라질 상파울루 매켄지 도시건축대학에서 건축 공부를 시작했으며 미국 프랫 인스티튜트 건축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하고, 컬럼비아 건축대학원에서 건축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브라질의 시드니 드 올리베이라(Sydney de Oliveira), 미국의 마이어스앤드시프(Mayers & Schiff), 포르투갈의 알바루 시자(Alvaro Siza), 미국의 스티븐 홀(Steven Holl) 건축사무소에서 실무를 익히고, 1991년에 귀국하여 김준성 건축사무소를 열었다. 현재 건국대학교 건축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하면서 핸드플러스 hANd+ 건축사무소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방인 건축가 김준성
“설명할 수 없는 결정이 가장 좋은 결정”
신창훈: 연세대 건축학과에 입학 후 브라질로 이민을 가셨는데 브라질과 뉴욕에서 건축을 공부를 하며 느낀 것들은 무엇인지요? 다양한 배경에서 경험하신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김준성: 언어로만 따져도 한국어, 브라질은 포르투갈어, 미국은 영어로 세 곳의 문화권에서 공부하면서 건축을 생각하는 근본적인 태도가 다른 것을 많이 느꼈다. 연세대에 다니다가 갔지만 한국의 건축 맛은 못 본 상황이었다. 브라질에선 건축도시학교를 3년 다니다가 길을 잃었다. 언어적인 부분도 있었지만 ‘이런 것이 건축 공부일 것이다’ 생각했던 것과 실제 건축 공부는 괴리감이 컸다. 언어의 끈적함 때문인지 몰라도 건축을 사회적 관계 속에서 보려 하는 부분이 어린 나이엔 어려웠다. 내가 상상하던 건축과 달라 실망감이 들었다. 그래서 건축을 관두고 다른 걸 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건축을 표현하는 방식 중 영상을 이용하는 방식을 보고 영화에 대한 매력을 느꼈다. 방황기였다. 그 당시엔 영화 매체가 궁금했다.
영화를 공부해볼까 하는 생각으로 뉴욕에 갔는데 일이 잘못되는 바람에 건축을 계속하게 됐다. 뉴욕에서의 건축 공부는 달랐다. 늦게 시작했지만 실제로 형태를 다루기 시작하니까 방황기에 아꼈던 에너지를 쏟아부을 수 있었다. 주변에서 신기해할 정도로 몰입했다.
브라질에선 졸업을 못했고 뉴욕에선 2학년에 편입했다가 월반을 했다. 학부를 2년 반 만에 졸업했다. 그 후엔 교수님 밑에서 일하다가 건축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대학원에 진학하게 됐다.

신창훈: 그런 과정이 김준성만의 건축을 만드는 데 직접적으로 어떤 영향을 줬는지요?
김준성: 어떤 걸 ‘김준성 건축이다’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알게 모르게 그 당시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 같다. 건축도 결국엔 땅에 대한 해석인데 내가 지냈던 대륙의 문화가 반죽이 돼서 나오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신창훈: 많은 평론가가 ‘감성 건축’의 대가로 꼽는데, 왜 그런 평가를 하는지 스스로 생각하시는 게 있다면요?
김준성: 아마 그 말의 시작은 알바루 시자(포르투갈 지역주의 건축의 거장) 선생님에게 배우고 일하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거라 생각한다. 시자 선생의 건축을 시적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지 않나. 현상학을 많이 언급하는 분이라 건축을 들여다보는 기본 발상에서부터 많은 질문을 한다. 예를 들어 도서관 건축은 책이 나한테 주는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책이 주는 정보를 받으면 무엇이 제일 먼저 반응하나. 이런 질문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다보니 남들에겐 감성적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감성은 이성과 반대 의미로 사용되는데 건축은 사실 그렇진 않다. 매우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계산을 바탕으로 나온다. 내가 감성 건축을 한다는 말도 긍정적으로 보면 나이가 차서 영리해졌다고 할까. 요즘 친구들과 만나면 ‘설명할 수 없는 결정이 가장 좋은 결정인 것 같다’는 이야기를 종종 한다.
▲김준성 건축가의 방에서 신창훈 운생동 대표와(왼쪽) 김준성 건축가가 담소를 나누고 있다./사진=더리더

신창훈: 여전히 하나로 규정하기 어려운 말이다. 선생님은 감각적 건축을 표면적으로 보여주지만 그 안의 현상학적인 부분에 대해 깊이 고심하는 것으로 안다. 건축을 대할 때 이슈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에 대해 많이 배운다.
김준성: 무슨 작업을 하든 왜 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주어진 것이라서가 아니고 바로 그 땅에서 왜 그것을 해야 하는지부터 생각해야 한다.

“협업 통해 타성에 젖은 나를 일깨운다”
신창훈: 유명 작가들과 협업작업을 국내에서 제일 많이 하시는 거 같다.
김준성: 나는 문하생 생활을 하며 스승을 모시던 마지막 세대로 두 분의 스승이 있다. 한 분은 대학원에서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졸업하고도 1년여 함께 일한 스티븐 홀(다양한 개념을 통해서 건축을 적용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건축가)이고, 또 한 분은 알바루 시자로 2년여 동안 포르투갈에 있는 그의 설계 사무실에서 일했다. 그 두 분과는 배울 점도 있고 나 자신을 추스르는 동기가 되겠단 생각이 들어서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 그러다보니 해외 건축가와 협업 사례가 많은 거 같다. 또 과거엔 건축주가 아닌 나 스스로의 존재성을 찾기 위해 작업을 했다면 요즘에는 그렇지 않다. 세상이 건축가에게 요구하는 게 달라졌다. 새로운 해석을 함께 하길 원하고 있어 다른 작가들과 해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나에게도 큰 도움이 된다. 

신창훈: 협업 과정 속에서 건축적, 인간적 에피소드가 많을 것 같습니다. 몇 가지만 들려주신다면요.
김준성: 협업의 스타일도 여러 가지다. 세상이 소통하는 시대라 해외 다른 문화권의 건축가들의 사고가 엄청나게 다르진 않다.
협업 파트너가 되어 서로 거침없이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작업이 영글어가기도 한다. 또 모시던 대가 스승이 프로젝트를 한국에서 현실화하기 위한 도우미 역할을 할 때가 있다. 한국에 살면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타협적 습관을 그분들을 통해 다시 일깨우는 기회가 된다.
시자 선생님과 파주출판단지 내에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을 진행할 때 창문 디테일에 대해 2시간 토론한 적이 있다. 그때 “건축 행위에 대한 기본인데 왜 이걸 잊고 살았나. 오셔서 나를 다시 일깨워주시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김준성 건축가가 질문에 답하고 있다/사진=더리더

신창훈: 이 시대의 젊은 건축가들은 스승 외에 다른 것에 주목하는데 이 시대에 스승은 어떤 존재여야 한다고 보시는지요?
김준성: 과거 20년간 건축 미디어가 많이 변했다. 도구가 변했다. 건축에서 엄청난 변화가 왔지만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아름다움이 변한 건 아니다. 인간이 변한 게 아니듯이.
요즘 젊은 세대는 스승을 맺는 과정에 시간이 걸린다. 또 한 군데서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유혹도 많아서 딴 데 정신을 팔다 보면 인간적 연륜을 쌓을 기회도 없어진다. 앞서 말했지만 인간이 변하는 게 아니라 시대가 변하는 게 아쉽다.

#꿈의 도시 헤이리 예술마을
“헤이리 의식으로 지탱…마을은 계속 변화한다”
신창훈: 헤이리 예술마을은 도시를 만들어가는 과정과 방식 등 모든 부분에서 이제껏 진행되어온 답습을 버리고 새로운 꿈의 도시로 구축하셨다. 헤이리 예술마을의 정신은 무엇인지? 어떤 것에 가장 중점을 두셨는지 궁금하다.
김준성: 사실 헤이리 예술마을의 중심은 거기 사는 주민들이었다. 주민들이 약속을 정하고 그 약속을 이행하는 공동체를 만든 거다. 그 안에서 건축은 약속을 기반으로 깔려 있었기 때문에 주목할 만한 과정들이 있었다.
파주출판도시는 국가 산업단지이기 때문에 법규상 문화나 거주에 관련된 프로그램을 넣을 수 없다. 물론 출판은 산업적 측면으로만 접근할 수 없는 분야이기 때문에 문화적인 작동을 위해 북카페 등의 부속시설이 필요했다. 이것이 그 옆에 위치한 헤이리 예술마을이 탄생한 배경이다. 헤이리라는 이름은 파주 지방의 농요에서 비롯됐다. 모를 심을 때 부르는 노래의 후렴구인 ‘헤이리, 헤이리’에서 따왔다.
초기 주축은 출판인들이다. 연세대학교 도시공학과 김홍규 교수님이 마스터플랜을 맡고 김종규 건축가와 내가 코디네이터(마을을 지을 때 최소한의 방향을 정해주는 사람)를 맡았다.
헤이리는 오늘날 내가 있게 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2001년부터 9년 동안 헤이리 예술마을 건축 코디네이터를 맡았다. 많은 사람과 관계를 성립한 중요한 시기였다.
첫 해에 <건축 지침서>라는 책을 냈는데 지침서를 만들어 신경 쓴 부분은 바로 건물의 형태가 아니라 건축물이 들어서지 않는 땅에 대한 것이었다. 헤이리의 절대녹지나 도로 같은 공용부는 전체의 47%이고 개인별 필지의 합은 53%로 구성된다. 파주시 조례에 의하면 부지의 건폐율은 50%로 헤이리 전체 건물이 들어서는 것은 27%가 채 안 됐다. 나머지 70%의 땅을 어떻게 운영할지 고민했고 그것을 중심으로 지침을 세웠다.
마을을 위해 꼭 지켜야 할 공동의 가치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예술가 세 사람만 모여도 지진이 난다는데 300여 명의 예술인이 함께 살 공간에 대해 작업한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어려웠다. 그러나 의외로 전적으로 믿고 따라와줬다. 놀라운 출발이었다.
설계가 끝나면 안을 제출해서 심의를 받는데 지침대로 했는지 확인하는 것도 코디네이터의 역할이었다. 이러한 약속은 법적인 효력은 없었지만 모든 회원이 약속을 지켜줬다.

신창훈: 세부 건축 지침을 보면 그전까지 도시개발공사의 바둑판식 도시를 생각하던 사람들은 다 놀랐다. 자연을 훼손하고 산을 깎는 방식의 평면적 도시를 생각했는데 자연을 기반으로 입체적인 도시 지침을 만드셨다. 자연을 피해서 사람이 어떻게 움직일지에 대해 하나하나 세세하게 지침을 세웠던 게 기억이 난다.
김준성: 사실 그 지침이 10여 년이 지나서도 지켜질까 싶었는데 놀랍게도 지켜지고 있다. 과거 방식 그대로 지켜지고 있는 헤이리 의식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새삼 느낀다. 마을을 위해 사적인 이득을 내놓은 용기 있는 사람들이다.
신창훈: 몇 주 전 헤이리 마을을 가족과 찾았다. 차가 정말 엄청나게 많더라. 초기에 선생님이 생각하신 헤이리와 지금의 모습은 거리감이 있을 것 같은데 어떠신가요?
김준성: 헤이리의 역사는 아직 15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마을이라는 건 적어도 50~60년은 지나고 3세대는 거쳐야 진정한 모습을 갖춘다. 그전까진 많은 시행착오를 겪는다.
초기 한 10년 정도는 카페촌과 유사해 보였고, 프로그램이 대부분 그런 것이라 당황스러웠다. 우리는 주중엔 굉장히 조용해서 24시간 주 7일 작동되는 마을을 생각했는데 주말에 그렇게 북새통을 이룰 줄 몰랐다.
아직 성장하는 마을이고 점차 인구밀도가 높아지면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다만 나는 헤이리의 공동체 의식을 믿는다. 헤이리를 이루는 의식들이 결국 오류를 고쳐나가고 좋은 방향을 찾을 거란 믿음을 가지고 있다.
신창훈: 헤이리 예술마을 같은 마스터플랜을 또 해볼 생각은 있으신지요?
김준성: 당연히 하고 싶다. 헤이리의 4/1 규모로 모든 것이 구체적으로 설정되어 모든 이가 동의하는 마을. 운영에서도 서로 이견 없는 마을을 꿈꾼다. 현실적으론 어려운 일이겠지만.
▲건축사무소 hANd+의 마당 앞 계단에서 김준성 건축가(왼쪽)와 신창훈 대표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사진=더리더
#실존과 
실험의 건축
“엑시옴 물류센터, 뮤지엄 같은 공장의 경계를 허물다”
신창훈: 김준성의 건축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고 설명하기 곤란합니다. 실존과 실험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개념 속에서 최근 선생님 건축을 들여다보려고 합니다.
그 예로 엑시옴 물류센터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외관을 보고 미술관이라 생각했습니다. 프로그램을 그대로 따르지 않은 과감한 실험 건축으로 느껴집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상상하는 박스형 물류센터의 모습은 아니었거든요. 어떤 메시지를 담고 싶었는지 궁금합니다.
김준성: 공장 건축은 변화가 많은 분야다. 과거 공장의 유형과 공장주 그리고 거기서 일하는 사람과의 관계나 업무가 있었다면 최근엔 공장도 자동화가 많이 됐다. 창의적인 환경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 엑시옴 같은 경우엔 운이 좋게도 건물주가 그런 부분을 전제로 했다. 너무 다행스러웠다.
엑시옴의 전신은 탁구대를 만드는 챔피온이라는 회사였다. 탁구 전성기를 지나면서 사양산업이 되어가는데 창업주 아드님이 물려받아서 탁구대뿐만 아니라 탁구 관련 사업을 친환경적으로 하면서 고급화시켰다. 세계 탁구 시장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건축가 몇 분을 정해서 인터뷰를 하는 거 같았는데 이야기 끝에 “사무공간의 책상 폭은 150cm에 의자 폭은 180cm여야 한다”고 하더라. 우리의 상식과 달라서 왜냐고 물으니 1년에 좋은 아이디어 두 개면 회사 운영이 가능한데 그 아이디어는 책상 앞에 앉아 있다고 나오는 게 아니라고 하더라. 누운 채 공상을 펼치면 더 잘될 거란 이야기였다. 그 답을 들으면서 얼마 전 새로운 시도로 만들어놨던 안이 떠올라 보여줬다.
첫 반응이 “1cm도 고치지 말고 이대로 만들어 주세요”였다. 무엇 때문에 바로 결정했는지 후일 물으니 설계안이 탁구공과 탁구채로 보여 바로 자기 것이라고 느꼈다고 한다. 게다가 공장 공사비가 보통 평당 250만원 정도인 것에 비하면 이 공장은 평당 500만원이 넘었다. 못 짓겠다고 생각한 순간에도 건축주는 과감하게 밀어붙였다. 인복이 있었던 덕에 2018 한국건축가협회상을 받았다. 

신창훈: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으니 더 재미있게 느껴집니다.
김준성: 사실 비현실적이다. 들어가는 입구에 3개의 정원과 호수가 있고, 물 위에 건물이 떠 있는 것 같은 형태다. 

신창훈: 음성은 시골 풍경인데 반해 지역과 생경한 형태에 매스와 프로그램의 물류센터가 자리 잡았습니다. 지역주민은 어떤 반응이었는지요?
김준성: 음성혁신 도시에 위치한 물류공장은 사실 주변과 관계 지을 만한 것이 없다. 다만 그 옆 하천지역과 대로변에 5m 폭의 녹지 띠가 있어서 그것을 공장이라는 프로그램에 어떻게 끌어들일까를 고민했다. 그런 연유로 물의 정원, 녹지의 정원, 하늘의 정원이 되는 스토리로 이어졌다. 공사할 때 음성시 공무원들이 공장 운영 안 하면 박물관으로 써도 되겠다는 우스갯소리를 했다고 한다. 요즘 세상이 그런 거 같다. 뮤지엄과 공장의 경계가 사라지고, 뮤지엄 같은 환경에서 직원들이 일한다.

“영주 대한복싱전용훈련장, 공간과 시간에 공동의 의미를 부여”
신창훈: 영주 지역의 커뮤니티 변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대한복싱전용훈련장은 실존적 가치의 또 다른 해석으로 다목적 공간을 제안하고 있는 듯하다. 계획의 주안점이 무엇인지?
김준성: 공모전에 냈다가 당선됐다. 태릉의 복합 연습장을 제외하면 우리나라에는 대한복싱협회 전용 훈련장이 없었다. 영주에 최초로 탄생하게 됐다. 실내 수영장과 복싱훈련장이 동시에 공모에 나왔다. 두 설계 주체들이 짝을 지어 접수하고 배치를 하되 별도의 계획안을 제출하는 방식이었다. 제자인 숨비건축의 김수영 소장이 수영장을 설계하고 내가 복싱훈련장을 만들어 함께 제출했는데 당선됐다. 다루기 쉬운 재료로 모형을 만들어 흑백으로 사진을 찍어 제출했는데 심사위원들이 좋게 봐줬다.
주어진 대지는 한쪽으로는 도로에 접해 있고 다른 쪽은 체육공원에 면해 있었다. 언덕이라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높이가 7m나 차이 났다. 경사진 언덕길을 따라 내려가며 건물의 지붕이 만나도록 해 공원을 연장시키는 것이 주 개념이었다. 기존 체육관들이 그라운드에서 독립된 형태의 안이었다면 이곳은 지형과 함께 존재하고 여러 사람이 와서 즐기는 공공 편의시설이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걸 취지로 적고 타이틀을 ‘퍼블릭 라운드’라고 해서 제출했다.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공동의 의미를 갖는 시설을 짓자는 제안이었다. 꼭 복싱이 아니더라도 지나다 슬쩍 커피를 마셔도 되고 계단에 앉아 공연을 해도 되는 공공의 장소를 꿈꿨다.
사실 제출하면서도 신선한 안이라서 이게 뽑힐까 싶었는데 세상이 좋아지다 보니 그런 안이 뽑히더라.

신창훈: 복싱뿐만 아니라 다양한 행사를 했을 때 색다른 공간 느낌을 주는 건축물이다. 영주에서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하면 좋겠다.
김준성: 복싱 역사 100년 만에 꿈으로 지어진 곳이다. 예산이 많이 삭감되다 보니 어려운 상황이었다. 실용적으로 짓기 위해 마감의 치열함보다는 땅 모양 안에서 건축적 자세만 지켜진다면 괜찮다는 마인드로 케주얼하게 진행했다. 모든 사람이 좋아해줬다. 지방의 업체가 감리와 시공을 했는데 자부심을 가지고 안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주인 없는 건축물? 실제적 디자인 지켜지도록 제도 필요”
신창훈: 다양한 공공건축물을 설계하셨다. 공공건축은 완공 후에도 프로세스가 엄청나게 많은데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건 어떤 부분인가요?
김준성: 공공건축물을 설계하고 나서 ‘내가 한 게 아니다’라는 건축물이 많은 게 안타깝다. 설계경기가 나와서 지어질 때까지 건축사가 관리 운영하는 체계가 돼야 한다. 설계경기 따로, 관리 따로 하다 보면 단계별 책임만 다하면 된다는 생각에 편하게 결정하기 때문에 원작자가 사라진다. 운영체계만 잘 잡아서 지어질 때까지 한길로만 가면 되는데 왜 안 되는지 모르겠다. 설계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사람들도 원작자와 상의해서 선정한 안이 좋은 방향으로 가는지, 약속이 지켜지는지를 확인하는 시스템이 갖춰지면 좋겠다. 

신창훈: 좋은 안을 뽑아놨는데 서로 피드백을 해서 더 좋은 안을 만들면 좋을 텐데….
김준성: 젊은 건축가가 뽑히면 더 그런 거 같다. 젊은 건축가들은 이상적인 안을 많이 제출하는데 실제로 만들다 보면 당선안과는 완전히 다른 안으로 지어진다. 심사가 끝나서 완결될 때까지 심사의 책임 소재를 분명히 했으면 좋겠다.

신창훈: 젊은 사람들은 쉽게 포기하는데, 뽑아준 심사위원에게 자문을 한다면 본안이 지켜지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심사위원은 실무적인 부분을 체크해 조언을 해주면 더욱 바람직한 관계가 될 것 같다.
김준성: 좋은 말이다. 실제적 디자인이 지켜지도록 하는 제도가 필요하다. 어렵지 않은 건데….

“교육, 사회에서 받는 유일한 자극”
신창훈: 교육자로서 오랜 시간 많은 제자를 배출하셨습니다. 경기대에 대학원도 만드시고, 새로운 배움 건축실험도 했는데. 교육자로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지요?
김준성: 지금 나에게 가르친다는 건 무척 소중한 일이다. 사회에서 자극을 받는 유일한 길이다. 그 자극이 없으면 내가 소위 말하는 매너리즘에 빠지게 된다. 나의 편의를 위해 습관적으로 포기하는 부분을 못하게 잡아주는 게 바로 가르치는 작업이다. 

신창훈: 건축, 태도는?
김준성: 학생들은 경험이 짧아 눈앞에 두고서도 못 느끼는데 터득하는 것, 체험하는 것들을 가르쳐주는 게 올바른 건축이라고 본다. 건축에서 설계를 잘하는 방법이 있다고 믿진 않는다. 학생들의 아이디어가 나랑 맞지 않더라도 좋은 건축이 아니라는 식으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길로 들어섰건 부딪혀보는 모습을 보고 나 역시 가능성을 터득하고 발견한다. 나에게 교육은 양자 간에 주고받는 작업이다.

신창훈: 선생님은 항상 옆에서 뵈면 언제나 청춘처럼 느껴진다. 이는 삶의 태도에서 오는 듯한데 비결이 무엇인가요?
김준성: 결국엔 학생들을 만나는 게 제일 큰 거 같다. 격의 없이 서로 교감한다. 건축 외 아이들의 어휘도 접하고 문화도 느껴보는 것이 젊게 사는 방법인 거 같다.

신창훈: 최근 <개념에서 건축으로>라는 책도 내셨다.
김준성: 책 제목을 듣고 개념을 가지고 어떻게 건축을 할까 하고 다들 생각하시는데 그런 뜻은 아니다. 젊을 때는 건축 개념을 중시하고 논리적이고 싶어서 그런 방향으로 열매를 맺길 원했는데 연륜이 쌓이다 보니 말로 되는 게 아니라 쌓여 있는 걸로 된다는 것을 느낀다. 논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일부러 내세울 필요는 없단 이야기다. 이런 의미로 고른 제목인데 많은 사람이 반대로 생각한다.
책을 내니 잊었던 흔적을 대면한 것은 물론이고 건축을 처음 시작했을 때의 모습까지 떠올랐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서 20여 년이 지난 현재의 내 자신까지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신창훈: 앞으로 하고 싶은 건축이 있다면요.
김준성: 밀도가 높은 건축을 하고 싶다. 그리고 디테일이 있는 건축을 하고 싶다. 우리 사회가 건축 전문인들이 없어서 모든 책임이 건축가에게 오는 탓에 건축이 우아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우아한 설계를 해보고 싶은데, 기본적으로 사회가 다 같이 올라와야 가능한 일이다. 전문인력이 생겨서 함께 만들어나가야 한다. 건축은 설계만 잘해서 되는 건 아니다. 그런 걸 발견하고 네트워크를 하는 건 건축가의 힘이다. 또 개인적으로는 내가 제공한 공간에 방문한 분들이 “근사하다”라고 말하기보다 뭔가 잊어버렸던 걸 되찾는 느낌이 드는 장소가 되길 바란다.

김준성 건축가
1956년, 서울특별시 출생/프랫대학교 건축학 학사/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 건축학 석사/경기대학교 건축대학원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건축과 객원교수/건축사무소 hANd+ 소장/건국대학교 건축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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