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雜s]쓰지 않을 용기, 인포데믹 차단을 위해

머니투데이 더리더 김준형 전무 2020.03.12 10:30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네이버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편집자주50대가 늘어놓는 잡스런 이야기, 이 나이에 여전히 나도 스티브 잡스가 될 수 있다는 꿈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의 소소한 다이어리입니다.

-바이러스의 독성과 전파력(생존력)은 배치관계이다. 독성이 강하면 전파력이 약해지고 전파력이 강하려면 독성이 약해야 한다. 인포데믹을 일으키고 있는 미디어 바이러스는 어떨까-

'제2인생'을 멋지게 살고 있는 친구 중에 목수가 있다. 나무로 집 짓는 일을 한다. 강화도에서 학원 하다가 목수로 변신했다. 서너 명이 한 팀으로 움직이는데 같이 일하는 팀원들도 화이트칼라 직종을 접고 제2인생을 사는 '형님'들이다. 
내가 못 하나는 잘 박으니까 내 자리도 하나 마련해 두라고 만날 때마다 그 친구에게 작업을 하는 중이다. 

입으로만 먹고 살아 온 내가 나무에 못박는 재주라고 있을 리 없다. 그럼? 사람들 가슴에 못 박는 기자질을 30년씩이나 해왔다. 내 기사 한 줄로 인해 상심하고 걱정하고 곤란해진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특정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나의 글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못자국을 남긴 일이 있을 것이다(그렇다고 못만 박은건 아니라고 위안은 한다). 

코로나19로 사람들은 두렵고 우울하다. 엘리베이터만 같이 타도 감염됐다는 전파력이 공포의 근원이다. 하지만 잘 갖춰진 공공의료 시스템과 행정서비스 덕에 우리나라 코로나 감염 사망자 수는 교통사고 사망자보다 훨씬 낮은 선에서 방어되고 있다. 특파원 시절, 미국의 열악한 공공의료체계와 한심한 공무원들을 겪어본 터라 한국인인게 고맙다는 걸 잘 안다('한국인인게 미안하다'는 별 희한한 소리를 쓴 기자도 있는 모양이지만)

정작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더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건 사람들끼리의 싸움이다. 그 싸움의 복판에 언론이 있다. ‘흥정은 말리고 싸움은 붙여라’는게 농반진반 언론계 수칙이다. 싸움이 붙어야 기사가 된다는 말이다. 
그 원칙에 충실하자는 건지, 나라와 나라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간질하는 기사를 끊임없이 내놓는 언론사들 천지다. 싸움을 붙이는 것도 모자라 아예 싸움판에 끼어들어 치고 팬다. 코로나19를 하늘이 내린 기회나 되는 것으로 여기는 모양새다.

의도적인 가짜 정보, 과장된 비난이 미디어에 의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는 ‘인포데믹(Information+Pandemic)’이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기자와 정자의 공통점은? 사람될 확률이 극히 희박하다는 점'이라는 비아냥을 일찍부터 듣어 온 터이긴 하다. 그래도 사람 될 가능성은 열려 있었는데, 이젠 아예 사람 되기는 애초부터 틀린 바이러스 취급을 받을 지경에 이르렀다. 

바이러스는 시간이 가면 독성을 줄이고 숙주 사회에 토착화해 공존하는 ‘지혜’를 발휘한다. 독성이 강하면 숙주가 죽고 자신도 죽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텍스트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일부(라고 쓰고 '많은'이라고 읽을 수 밖에 없는게 현실이다ㅠ) 언론의 독성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바이러스 세계의 지혜를 적용하자면 독이 오를 대로 오른 ‘치명적 언론’은 사회도 죽이고 스스로도 죽어갈 것이다.(바이러스 세계에서도 통하는 상식이 언론계에는 예외일 거라는 생각은 하고 싶지도 않다).

그 공멸의 싸움 최전선으로 몰리고 있는 게 일선 기자들이다. 기자의 글이 사람들의 피부를 후벼파는 비수가 되고 사람의 눈과 귀를 통해 침투하는 악성 바이러스가 된다. 
혐오와 분열을 조장하고 즐기는 선동, 그리고 정치적 목적과 낚시질을 위한 작업질에 기자들이 히틀러 유겐트처럼 활용되고 있다. 오스카를 두고 기생충과 경합했던 영화 '조조 래빗'에서 어린 소년 조조는 히틀러 유겐트가 돼 증오와 선동의 최전방에 선다. 유대소녀를 숨겨주고 반나치 운동을 하던 엄마(스칼렛 요한슨)가 나치에게 처형당한 뒤에야 그는 ‘해야 할 일’이 뭔지를 깨닫는다. 그것은 증오와 혐오가 아니라 포용과 사랑이었다. 어린 조조가 피해자였듯이 증오의 키보드 자판을 두드려야 하는 기자들도 피해자다.

언론사 밥 30년 가까이 먹어온 선배로서 후배에게 '쓰지 마라'는 말을 하기는 쉽지 않다. 데스크와 국장 시절, 뭘 쓰라고 지시할 때보다 쓰지 말라고 이야기하는게 더 힘들었다. 그래도 가끔은 이런 이야기를 후배들에게 했다. 
"기자란 직업이 때론 쓰지 않을 용기도 필요하다"

군사독재시절엔 쓰는 데 대단한 용기와 희생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반대다. 
사회적 이슈가 터질 때마다 창궐하는 인포데믹을 막기 위해서는 쓰지 않을 용기가 절실하다. 
내 밥그릇을 채우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타인이나 사회에 독이 되는 기사라면 외면할 용기가 필요하다. 계산된 의도에 의해 던져진 먹이를 두고서는 ‘단독’이라는 달콤한 미련을 버리는 결단이 요구된다. 그래서 무능해진다면 어쩔 수 없다. 무능한게 사악한 것보단 낫다. 
자신이 쓴 기사가 어떤 결과를 나을지를 생각하지 않는(혹은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기자는 사회를 향한 대못질의 공범이 된다. 지금 하고 있는 못질은 자신의 가슴에도 부끄러운 생채기로 남는다. 해봐서 안다.
막심 고리끼의 소설 '어머니' 마지막 장면은 이렇게 끝난다. 
자신의 목을 조르는 러시아 차르 비밀경찰에게 어머니는 숨을 거둬가며 “불쌍한 것, 너는 지금 네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말한다.


navido@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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