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쥐락펴락’…권력이 된 여론조사

현경보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 “2번 패배 이회창 가장 큰 피해자, 박근혜 탄핵 근거로도 작용”

머니투데이 더리더 홍세미 기자 2020.01.06 09:54 카카오톡 네이버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현경보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사진=더리더
“여론조사가 대통령을 만들 수도, 그 자리를 박탈할 수도 있다.”


여론조사가 역대 선거에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분석한 <여론전쟁>의 저자, 현경보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은 여론조사가 권력이 됐다고 규정했다. 그는 SBS 기자로 재직하면서 네 번의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다섯 번의 지방 선거를 예측하는 일을 직접 담당했다. 그는 현재 빅데이터 스타트업 전문업체 빅디퍼 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여론조사는 대통령 후보를, 선거 구도를 결정하기도 한다. 현 위원은 여론조사 없이는 선거에서 이길 수 없다고 강조했다. 여론조사가 불법이던 시절에도 후보 판세 분석과 선거 전략의 기초로 진행했다는 것이다. 1% 포인트의 지지율 차이가 대세론을 만들어 대통령을 만들기도 한다. 또 여론조사의 힘으로 대통령 자리를 박탈하기도 한다. 여론조사로 본 우리나라 정치사(史)를 듣기 위해 지난달 17일 광화문에 위치한 빅디퍼에서 현 위원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여론조사가 언제 선거에 도입됐나
▶1987년에는 여론조사가 불법이었다. 선거에 대한 조사를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노태우 전 대통령이 속한 민정당에서는 여론조사를 진행하고 그걸 바탕으로 선거 전략을 짰다. 노 전 대통령의 당선은 여론조사를 이용한 과학적 선거운동의 결과라는 말까지 있었다. 심지어 선거 슬로건이 ‘보통 사람들’이었는데 이런 것도 후에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여론조사로 국민의 반응을 살폈다.

-1992년, 14대 대선에서도 여론조사는 중요했다
▶1987년 선거를 돌아보니 여론조사가 없으면 선거에서 이기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대선 후보자들이 알고 있었다. 여론조사로 민심을 듣고 그것을 바탕으로 전략을 짜야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1992년 14대 대선을 앞두고 여론조사는 선거법 위반이지만 국민들이 선거에 대해 논의해야 하니까 허용하는 분위기였다. 몇 군데 언론사가 정주영 전 후보가 지지율이 떨어지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발표해 정 전 후보로부터 항의를 받기도 했다.

1992년 4월에 14대 총선이 열렸다. 3당 합당 이후 열린 선거였는데 김영삼 전 대통령(YS)이 이끈 민자당이 패배했다. 대선 후보였던 YS가 총선 패배의 책임자로 지목됐다. 다른 대항마로 떠오른 이종찬 전 의원 등은 ‘YS로는 대선에서 이길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때 YS가 대선 지지율에서 앞선다는 한국일보 여론조사가 보도됐다. YS가 38%, 김대중 전 대통령(DJ)이 21%, 정주영 전 회장이 13%라고 조사됐다. 청와대를 드나들던 안기부 직원이 조사 결과를 YS 아들인 김현철 소장에게 전달하면서 외부로 유출된 해프닝이다. 이 여론조사를 근거로 YS는 총선 패배를 지우고 대선 후보자로 나섰다. 반대파는 있었지만 밀고 갈 수 있었던 근거로 여론조사를 제시한 것이다. 그렇게 강행한 면을 보면 YS는 상당히 순발력도 있고 추진력 있는 정치인이라고 평가한다. 5월에 민자당 조기 전당대회가 열리면서 YS가 당선됐다. 그 후로 YS가 당 후보자가 됐고 대선 길을 밟았다.

-1997년 대선에서는 여론조사 공표가 합법화돼 자유롭게 여론조사를 진행했다
▶민자당에서 이회창 후보, 민주당에서 DJ, 자민련의 김종필 후보(JP)가 출마했다. 연초 여론조사에서 이 후보가 다른 후보에 비해 앞섰다. DJ와 JP가 단일화를 해야만 비등했다. DJ 측근들은 색깔이 다르다는 이유로 JP와의 단일화를 반대했다. 그렇지만 DJ는 같이 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당시 유시민 전 의원이 <97대선 게임의 법칙>이라는 책을 썼는데 ‘DJ로는 대선에서 이길 수 없으니 제3의 인물을 내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후보가 한나라당 경선을 거쳐서 최종 후보가 됐다. 후보가 되는 과정은 어렵지 않았는데 경선 과정에서 이인제 후보의 인기가 급상승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닮은 외모’에 토론 당시 거침없는 언변으로 인기를 모았다. 이 후보가 대선후보가 되자마자 7월 말쯤 아들병역비리, 이른바 ‘병풍논란’이 벌어졌다. 이 후보는 병풍논란에 대해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대처를 잘못했다.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은 떨어지고 탈락한 이인제 후보가 올랐다. 심지어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를 두고 여론조사를 했더니 이인제가 1위를 했다. 경선에서 패배했으니까 물러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내 경선을 다시 치를 수 없으니 결국 경기도지사를 사퇴하고 당을 탈당하고 대선에 뛰어들었다.

민주당 쪽에서는 조순 후보가 등장했다. ‘DJ로는 안 된다’는 이야기가 도니까 등장했다. 서울시장이던 조순 후보가 등장하니 DJ의 인기가 더 높아졌다. 안정적 1위로 경선서 후보로 선출됐다. DJ와 이인제, 이회창이 후보로 나온 것이다. 대선이 가까워질수록 DJ는 안정적으로 1위였다. 그 다음이 이인제, 이회창 순이었다. 그래서 이인제와 이회창이 단일화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이인제는 끝까지 대선 레이스를 밟았다.

-여론조사로 가장 덕 본 대통령이 DJ라고 했는데 이유는 무엇인가
▶여론조사가 없었다면, 이인제 후보의 지지율이 급부상하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그랬다면 경기도지사를 사퇴하고 대선 레이스를 끝까지 밟았을까. 정치에는 만약이라는 게 없지만, 여론조사가 없었다면 이 후보가 경기도지사와 당을 탈당하고 대선을 끝까지 가지 않았을 것이다. 이인제와 이회창이 둘로 나뉜 것이 DJ에게는 호재였다. 여론조사로 가장 덕을 본 대통령은 DJ다.

▲현경보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사진=더리더
“가장 예측 불가능한 후보, 노무현”


-가장 예측하기 힘들었던 후보는 누구인가
▶가장 흥미로운 대통령은 아무래도 노 전 대통령이다. 이회창 후보가 DJ에 패배하고 2002년 재도전했다. DJ의 레임덕이 심해지고 ‘이회창 대세론’이 불었다. ‘이회창이 앉아 있어도, 드러누워도 된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인제 후보가 민주당으로 들어가 대선후보로 나섰다. DJ는 ‘통합의 정치’를 가장 강조했다. 다른 정당이었던 이인제 후보도 통합해야 한다는 차원으로 받아들였다. 이인제 후보가 민주당으로 입당하자 유력 대권 주자로 떠올랐다. 그리고 한화갑 후보, 노무현 후보가 있었다. 민주당은 대선을 앞두고 최초로 국민 참여 대통령 후보 경선을 진행했다. 전국을 순회하며 여론을 규합하려는 목적이었다.

노무현 후보는 대선에 나섰지만 군소후보였다. 국민경선제가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진행된 제주도 경선에서 1위를 하지 못했다. 광주 경선을 앞두고 SBS에서 노무현 후보와 이회창 후보가 1:1로 대결하면 1%p로 이긴다는 조사를 발표했다. 1:1 양자대결에서 이 후보를 이기는 상대는 처음이었다. SBS 내부에서도 결과에 대해 ‘이거 맞느냐’고 되묻기도 했다. 여론조사를 진행했으니 보도를 해야 한다. 보도 3일 뒤가 광주 경선이었다. ‘이 후보를 이길 수 있는 민주당 후보는 노무현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 이후 광주 경선에서 노 후보가 1위를 기록했다. 한화갑 후보가 호남 사람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뒤로 전국 경선에서 노무현 대세론이 나오면서 승승장구했다.

SBS가 열흘 뒤에 ‘이회창 대 노무현’, 양자대결 조사를 진행했더니 노 후보가 10%p이상 차로 이기는 걸로 나왔다. 처음에는 1%p였는데 열흘 만에 10%p 이상 차이가 난 것이다. 여론조사가 그 대세론을 만들어준 것 같다.

-여론조사 불운의 아이콘은 누구인지
▶이회창 후보다. 이 후보는 지지율이 없던 사람이 아니다. ‘대쪽 같은 정의감이 있는 정치인’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다. 다만 이 후보의 대항마들은 여론조사를 토대로 단일화하는 등 이합집산했다. 그런 것으로 시너지가 일어나 선거에서 이 후보를 꺾었으니 여론조사의 가장 큰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2007년 대선 때 한나라당 경선에서 여론조사가 어떤 영향을 끼쳤나
▶참여정부 말기에 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이 10%대를 기록했다. ‘식물정부’라고 부를 정도로 지지율이 낮았다. 경제도 좋지 않았다. ‘국민성공시대’를 꿈꾸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그런 측면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MB)이 대중적인 인기를 모았다. 서울시장을 하면서 청계천을 복원했고, 버스환승체계를 만든 업적도 높이 샀다. 또 현대건설 샐러리맨으로 사장에 오르고 정치인을 하는 모습에 ‘서민도 부자 될 수 있다’는 희망이 반영됐다. 일반 여론 지지가 같은 당 대선 후보였던 박근혜 후보보다 MB가 높았던 것이다. 박 후보는 한나라당 대표를 맡으면서 ‘선거의 여왕’이라고 불렸다. 2004년 탄핵 열풍 때 천막당사로 총선 승리를 이끌며 당원의 신뢰를 확보했다. 당원 사이에서는 MB보다 박근혜 후보의 지지가 더 높았던 상황이다. 그런데 대부분 언론이 일반 여론에서 MB가 6~7% 정도 이기는 것으로 보도했다. 실제 경선 뚜껑을 열어보니 일반여론에서 MB가 단 1.5%p로 이겼다. 

▲현경보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사진=더리더
-당시 변수는 무엇이었나
▶2007년 MB와 박근혜 후보의 지지율을 합하면 60%에 육박했다. 그 밑에는 손학규 후보가 있었다. 정동영, 김근태, 강금실은 개인 지지율이 5% 정도를 기록했다. 당시 분위기는 한나라당 경선에서 이기는 사람이 대통령 후보가 되는 것이다. 본선보다 경선이 더 중요했다. 여론조사에서 손 후보를 민주당에다가 놓고 조사하면 정동영을 꺾고 1위를 하기도 했다. 김진명 작가의 <나비야 청산 가자>라는 소설, 손 후보가 민주당 후보가 되어서 대통령 후보가 된다는 이야기의 소설까지 나왔다. 그런 분위기가 형성되니 손 후보도 유혹을 거절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민주당으로 입당해 정동영 후보와 붙었다. 여론조사가 손 후보의 결정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경선에서 손 후보가 정 후보에게 졌다. 아무래도 조직력에서 싸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2012년 대선을 앞둔 상황은 어땠나
▶2010년 지방선거 때 무상급식 문제가 떠올랐다. MB정부를 지내면서 빈부격차가 심해져 우리 사회의 분배에 대한 논의가 진행됐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시장 직을 던지면서 무상급식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2011년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가 열렸다. 그때 안철수 후보의 지지율이 높았다. 출마하면 당선되는 것으로 나왔다. 안 후보는 의사였다가, 컴퓨터 공학자로 백신을 개발해서 무료로 공급했다. 그런 면들이 무상공급과 겹쳐지면서 시대적으로도 맞아떨어졌다. 안 후보는 서울시장 후보자리를 참여연대 사무총장이었던 박원순 후보에게 양보했다. 아무런 대가 없이 단일화하는 모습으로 ‘아름다운 양보’로 불렸다. 그러자 안 후보의 대선 지지율이 급상승했다.

-2012년 총선이 있었다
문재인 후보는 부산에 내려가서 출마해 당선됐다. 문 후보도 자기 정치 운을 건 것이다. 한나라당에서는 서울시장 패배, 경선 돈봉투 사건 등 여러 문제가 많았다. 박근혜 후보가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혁신적인 모습을 보였다. 또 김종인 비대위원을 영입해 진보진영에서 내걸어야 할 경제민주화를 들고 나왔다. 무상급식, 분배문제를 중요하게 다루겠다는 의미였다. 새누리당이 총선에서 쉽지 않았지만 박 후보가 앞장서 승리를 이끌었다.

-총선에서 승리하니까 박 후보 지지도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문 후보는 뒤쫓아가지 못했다. 안 후보가 박 후보 다음으로 2등을 기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선거가 끝나자마자 안 후보에게 빨리 결정을 내리라고 압박했다. 문 후보가 먼저 단일화하자고 제안했다. 결국은 혁신을 한다는 조건으로 안 후보가 응하게 됐다. 단일화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어떤 문항을 외부로 노출시켰다는 등 잡음이 생겼다. 과정이 순조롭지 못했다. 여론도 좋지 않았다. 분위기가 좋지 않으니까 안 후보가 사퇴했다. 문재인-안철수, 두 후보의 단일화가 여론조사 시너지를 발휘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2017년에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됐다
▶탄핵 이전에 2012년 19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공천 과정에서 ‘옥새파동’을 겪으며 지지율이 떨어져 패배했다. 그 이후 박 전 대통령의 지지율도 곤두박질쳤다. 국정농단 사태가 벌어지자 지지율이 10% 밑으로 떨어졌다. 대통령 지지율이 낮아지면 힘도 빠진다. 아무것도 먹히지 않는다. 당시 여론조사를 진행하니까 대통령 탄핵에 찬성하는 비율이 70% 정도 나왔다. 전체 국민의 70%가 찬성한다는 것은 그만큼 분위기가 전국적으로 심각하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야권의 대선주자들도 탄핵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았다.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처음으로 탄핵을 주장했다. 탄핵에 찬성하는 여론조사가 높게 나오면서 야권의 정치인들이 탄핵을 밀어붙이는 근거로 작용했다.

-19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반기문 전 UN사무총장의 지지율이 높게 나왔다
▶반 전 UN사무총장이 2016년 대권주자 중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박 전 대통령이 주저앉자 보수진영에서는 반 전 총장을 내세웠다. 그런데 반 전 총장의 지지율이 지속되지는 못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준비가 덜 됐다. 정치적으로 ‘정체성이 무엇이냐’는 질문도 많았다. 조직화도 안 됐고 가는 곳마다 구설수도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스스로 사퇴했다.

-19대 대선에서 안철수 후보의 지지율은 어땠나
▶안철수 후보는 2016년 총선에서도 보여줬지만 호남에서 지지기반이 있었다. 오히려 민주당 후보였던 문 대통령보다도 호남 지지기반이 있었다. 또 중도보수의 지지를 받았다. 흥미로운 것은 민주당 경선에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선전했는데 경선이 끝나자 그 지지층이 안철수에게로 갔다. 대선 막바지에 양자대결을 하면 문 대통령과 비등하게 나왔다. 그만큼 안철수가 위협적이었다. 그러다가 TV토론 등이 나오면서 안 후보로는 안되겠다는 여론이 만들어졌다. 결국 홍준표 후보로 보수세력이 모여 2등을 했다.

현경보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 학사•석사•박사
SBS 보도국 기획취재부 부장
SBS 보도국 부국장, 논설위원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위원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1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semi4094@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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