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영과 번성의 흰쥐 “우리가 주인공”

출마하거나 불출마하거나…‘총선의 해’ 각계에서 맹활약 기대

머니투데이 더리더 편승민 기자 2020.01.02 09:02 카카오톡 네이버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편집자주2020년은 육십간지의 37번째 해인 경자년(庚子年)이다. ‘경’은 흰색을 뜻해 ‘하얀 쥐의 해’라고 풀이된다. 또한,자’는 쥐나 자녀를 뜻하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 잉태된 만물의 씨앗이나 다산과 관련시켜 ‘번영과 번성의 해’라는 의미도 있다. <더리더> 신년호에서는 경자년 쥐의 해를 맞아, 쥐띠 정치인들을 찾아봤다. 올 한 해 동안 자신 띠의 해인 만큼, 쥐띠 정치인들이 어떤 활약을 하게 될지 기대해본다.
김세연 자유한국당 의원(1972년 7월 15일생)
김세연 자유한국당 의원이 11월 1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긴급기자회견을 열고 총선 불출마 선언 후 회견장을 나서고 있다./사진=뉴시스
1972년 부산에서 태어나 금정고등학교, 서울대 사회과학대학 국제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LG EDS(현 LG CNS)에 입사했다가, 할아버지인 김도근 씨가 창업한 동일고무벨트로 직장을 옮겨 근무했다. 그는 부친이 돌아가신 후, 부산 금정구 정가가 ‘공천현금사건(17대 총선에서 당선된 의원이 지방의원들을 상대로 공천헌금을 요구한 사건)’에 빠지자 2008년 18대 총선에서 출마에 결심하며 정계 입문하게 됐다.
당시 김세연은 무소속으로 출마해 64.76%라는 높은 득표율을 기록하며 당선됐는데,이는 그의 아버지가 17대 총선을 제외하고 금정구에서 5선을 했던 김진재 전 국회의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당선 후 한나라당에 복당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낸 개혁파로 분류된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 의원은 새누리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당시 김 의원의 1공약은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을 골자로 하는 국회선진화법이었다. 그는 국회선진화법 발의자 중 한 사람으로서 국회선진화법 개정 요구가 있을 때마다 이를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는 2016년 헌법재판소에서 선진화법 유지 판결에 대해 “앞으로 선진화법을 정쟁의 대상으로 삼아 에너지를 헛되이 낭비하지 말고 대화와 타협이라는 선진화법의 취지를 살리면서도 보다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국회가 되기 위한 개선방안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2016년 총선에서 새누리당 공천을 따내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3선의 고지에 오르게 된다.
이후 김 의원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 유승민 의원과 함께 새누리당을 탈당해, 바른정당(현 바른미래당)을 창당하고 당헌·당규를 설계했다. 창당 이후에는 유승민 대선후보 선거대책본부장 등을 역임했다가 2018년 자유한국당으로 복당했다.
누구보다 무난하게 21대 총선에서 4선 당선이 예상됐던 그가 두 달전, 돌연 총선 불출마 선언을 했다. 김 의원은 지난해 11월 17일, “한국당은 수명을 다해 존재 자체가 역사의 민폐”라며 “이 당으로는 대선은 물론이고 총선도 승리할 수 없으며, 무너지는 나라도 지킬 수 없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 다 함께 물러나자”는 일침을 가했다. 이어 12월 3일에는 여의도연구원장직에서도 사퇴했다.
총선 이후 그의 행보에 대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경영하던 동일고무벨트로 돌아가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지만 그는 결정된 것은 아직 아무것도 없다며 우선 “시민의 자리로 돌아가려 한다”고만 말했다. 경제민주화를 역설하며 ‘따뜻한 보수’를 지향했던 그를 정계에서 언제쯤 다시 볼 수 있을지 아직은 미지수다.


주호영 자유한국당 의원(1960년 12월 10일생)

주호영 자유한국당 의원/사진=머니투데이 이동훈 기자
1960년 강원도 울진에서 태어나 대구 능인 고등학교, 영남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제24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군 법무관으로 임관해 복무했고, 전역 후 1988년부터 2002년까지 판사를 역임했다.
주호영 의원은 제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대구 수성구을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정계에 발을 들여놨다. 2007년에 치러진 17대 대선에서는 한나라당 대통령후보 선출 전당대회에서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면서 친이계, 비박계로 분류됐다.
제18대 총선에서 대구 수성구을에 출마해 재선에 성공했는데, 당시 무소속 유시민 후보를 꺾고 당선됐다. 그는 2008년부터 2009년까지 한나라당 원내수석 부대표를 역임했고, 2009년부터 2010년까지는 특임장관을 지냈다. 2010년부터 2011년까지는 한나라당의 여의도연구소장을 지냈다. 2012년 제19대 총선에서는 새누리당 후보로 대구 수성을에 재도전해 3선 고지를 밟았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는 계파 갈등으로 인해 공천에서 배제되자 그는 새누리당을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해 4선에 성공했다. 이후에 복당하였으나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 선거에서 낙선하면서 김무성 의원 등과 함께 집단 탈당해 개혁보수신당인 바른정당을 창당하게 됐다. 그 이후 원내대표와 당대표 권한대행 등을 맡았으나, 바른정당 통합파 8인과 함께 보수 통합을 외치며 탈당했고, 자유한국당에 복당했다.
다가오는 총선에서 현역의원들의 물갈이론이 거듭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그는 “우리 속담에도 ‘늙은 말이 길을 안다’는 이야기가 있지 않나. 그렇지 않아도 대구·경북(TK)은 초선비율이 66%나 된다”며 “TK는 보수정당 지지율이 높으니까 공천권을 쥔 사람들이 자기 멋대로 사람 바꾸기에 그걸로 인한 피해가 이만저만 아니다. 이번에도 TK가 이런 피해를 입으면 큰 소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주 의원은 지금까지 ‘계파색은 옅지만 4선 중진의원으로서 존재감이 크지 않아 아쉽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랬던 그가 최근 여론의 주목을 받은 것은 지난해 대정부질문에서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조국 씨’라고 호칭하면서부터다. 그는 “조국 씨를 법무부 장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거의 없다. 하지만 따로 부를 방법이 없어서 그냥 장관으로 하겠다”고 말했다.
주 의원은 이 발언으로 인터넷 포털사이트 실시간 1위를 차지했고, 이후 각종 방송 토론자 섭외 1순위가 됐다. 최근 TV와 라디오 방송에서 거침없는 입담으로 보수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건강한 보수 세력이 뭉쳐서, 이 나라가 다시 바로서는데 앞장설 것”이라고 말했다. 2020년 총선에서 보수의 중심을 바로 세우는 데 그가 어떤 무게감을 보여줄 것인지 궁금증이 쏠린다.

이언주 국회의원(1972년 11월 8일생)
이언주 의원이 2017년 4월 23일 열린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후보 '국민과의 약속, 미래비전선언' 선포식에서 안 후보의 지지를 호소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사진=머니투데이 홍봉진 기자
1972년 부산에서 태어났고, 싱가포르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이후 영도여자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했고, 노스웨스턴 대학 법학 석사, 연세대 법무대학원 경제법 석사학위를 받았다. 제39회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르노삼성 법무팀장과 S-Oil 법무총괄 상무 등을 역임했다.
그가 마흔 살이던 2012년, 한명숙 대표 체제의 민주통합당(현 더불어민주당)은 기업인 출신의 이언주를 영입했다. 이 의원은 19대 총선에서 경기도 광명시을에 전략공천을 받아 출마해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당시 그는 당 특별선대위원장이었던 손학규 현 바른미래당 대표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고 현직 의원이자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한 새누리당 중진 의원인 전재희 후보를 꺾으면서 화려하게 국회에 입성했다. 19대 국회에서 이 의원은 원내대변인, 정책위원회 부위원장, 원내부대표 등을 역임하며 민주당의 간판스타로 활약했다.
그렇게 민주당 소속으로 승승장구하며 이 의원은 20대 국회의원 재선에도 성공했으나, 19대 대선을 한 달여 앞둔 2017년 4월 5일 안철수 전 대표가 문재인 당시 민주당 대표에 반기를 들며 탈당하자 돌연 안철수를 선택하며 탈당 후 국민의당에 입당했다. 그는 국민의당에 입당하며 ‘정치의 대변화를 이루고 새 역사를 쓰는 데 함께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안철수 지지연설을 하며 “난 안철수에게 정치생명을 걸었다”며 눈시울을 붉힌 일화로도 유명하다. 안철수의 대선 패배 후 국민의당이 바른정당과 합당하면서 이 의원의 소속은 다시 한번 바른미래당으로 바뀌었다.
2019년 4월 이 의원은 다시 한번 바른미래당을 탈당했다. 그는 탈당 메시지를 통해 “광야에 선 한 마리 야수와 같은 심정으로 보수 대통합과 보수 혁신이라는 국민의 절대적 명령을 좇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의원이 주도하는 신당인 ‘미래를 향한 전진 4.0’은 지난달 28일 부산에서 창당대회를 가졌다. 전진4.0조직총괄위원장인 이종혁 부산시당 창당준비위원장은 앞서 창당대회 취지에 대해 “우리가 자랑스러워하고 세계가 부러워하는 자유대한민국을 만들고 싶어 이언주 의원과 함께 신당을 창당한다”며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먼저 정치부터 바꾸고 세대교체를 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의원의 정치 행보에 대해 그의 정치성향이 ‘진보에서 보수’로 바뀌었다는 분석과 함께 ‘지나친 권력욕으로 인한 철새 행보’라는 의견도 있다. 그의 정치행보가 후에 ‘국민의 명령에 따른 변화무쌍한 유연함’이 될지, ‘막말과 배신의 아이콘’이 될지 지켜볼 일이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1961년 1월 4일생)

오세훈 전 서울시장/사진=머니투데이 홍봉진 기자
서울 출생으로 대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에 입학했다가 고려대 법학과로 편입했다. 이후 고려대 대학원에서 법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오세훈’이라는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는 1993년 인천 ‘경남아파트 일조권 침해’ 소송이었다. 당시 대기업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13억 원의 배상금을 받아내면서 환경 전문 변호사로 유명세를 타게됐다. 이후 그는 <그것이 알고 싶다>, <뉴스 따라잡기>, <갑론을박 동서남북> 등 시사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으면서 대중에게 훤칠한 외모와 ‘스마트’한 이미지의 변호사로 각인됐다.
방송을 통해 국민들에게 친숙해진 그는 이를 발판삼아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공천을 받아 서울시 강남구을에 출마해 59.4%의 득표율로 화려하게 국회에 입성했다. 환경 전문 변호사 출신답게 그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으로 활동했으며, 소장 개혁파로 분류됐다. 이후 정치개혁 법안을 통과시키는 등 활동을 했으나, ‘5,6공 인사 용퇴론(5,6공화국 시절 인사들과 민주화 운동 탄압 출신들은 물러 나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17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잠시 숨 고르기를 한 그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 뒤를 이어 2006년 민선 4기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했다. 그는 당시 61.1% 득표율을 달성하며 열린우리당 강금실 후보(27.3%)를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당선됐다. 총선 불출마 선언이 오히려 정치적 도약이 된 셈이었다. 또한 그는, 2010년 서울시장 선거에서도 다시 한 번 승리하면서 민선 사상 최초의 재선 서울시장이자, 최연소 시장이 됐다.
서울시장으로 재임하면서 이룬 성과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우선 서울시 통합민원서비스인 다산콜센터(120)를 설립해, 민원 관련 문의전화를 하나로 통합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리고 인천광역시, 경기도와 협의를 통해 그동안 각각 운영하던 대중교통 환승제를 수도권 통합 대중교통 환승제로 변경했다. 오 전 시장이 했던 사업 중 또한 유명한 것은 ‘디자인 서울’이다. 한강 세빛섬, 고척 스카이돔, DDP 등 모두 오 전 시장 재임기간 중 만들어졌다. 하지만 당시에는 건설 이후 사용방식에 대한 불분명성으로 운영이 되지 않다가 박원순 시장 당선 이후에 운영계획이 나오면서 현재는 정상화됐다. 논란이 됐던 부분은 서울의 역사나 상징성을 고려하지 않고 도시의 미관개선이나 서구 건축을 따라하는데만 치중하면서 예산 낭비와 중복투자가 많았다는 것이다. 2010년 재선에 성공했으나 2011년 시장직을 걸고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실시했다가 투표율 미달로 개표가 무산되면서 임기도중에 자진사퇴하는 일이 벌어졌다.
오 전 시장이 정치계에 다시 나타난 것은 지난 20대 총선이었다. 그는 2016년 1월 새누리당 후보로 종로구 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3월 여론조사에서는 더불어민주당 정세균 후보에 약 17% 포인트 앞선 것으로 조사됐으나, 4월 여론조사에서 격차가 2% 포인트로 줄어들었고, 점차 치열한 접전 양상을 보였다. 그는 4월 13일 총선 개표결과 39.7%를 획득하면서 낙선했다. 당시 새누리당 지지자 상당수가 정권심판론에 맞물려 이탈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서울시장직 중도사퇴로 인한 신뢰감 하락 또한 낙선의 원인 중 하나인 것으로 분석됐다.
낙선 이후에도 그는 계속해서 대권주자 지지도 조사대상에 포함됐으며, 새누리당 대권후보 지지도에서도 꽤 높은 지지율을 보였다. 그러나 2017년 1월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고, 바른정당 최고위원으로 선임됐다. 이후 2018년 2월 바른정당과 국민의당 통합을 앞두고 바른정당을 탈당했고, 2018년 11월 자유한국당에 복당했다. 그는 2019년 1월부터 자유한국당 서울특별시당 광진구을 당협위원장을 맡고 있다.
올해 4월 21대 국회의원 총선을 앞두고 지난달 17일 총선 예비후보자 등록이 시작됐다. 오 전 시장은 서울 광진을에 출사표를 던졌다. 현재 광진을 현역의원인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되면서 후임으로 이낙연 국무총리가 나설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이런 경우 ‘빅매치’가 성사될 것으로 보인다. 오 전 시장이 ‘서울시장’이라는 화려한 이력을 업고 다시 여의도에 입성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1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carriepyu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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