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호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장 “기획부터 사업까지 ‘이어달리기’ 돼야”

R&D 전략, 패스트팔로워에서 퍼스트무버로 전환할 시기

머니투데이 더리더 편승민 기자 2019.12.04 08:37 카카오톡 네이버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정양호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장
지난 7월, 일본이 시행한 반도체 핵심 부품·소재에 대한 수출규제가 대한민국 전체를 흔들어놨다. 일본의 조치로 우리나라 주력 산업에 위기가 닥치자 범국민적인 일본산 제품 불매운동이 일어났다. 또한, 제조업의 핵심인 소재·부품·장비(이하 소부장) 산업의 구조적인 취약점이 드러나면서 수입선 다변화와 함께 국산 원천기술 강화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KEIT)은 우리나라 산업기술 R&D 예산집행을 전담하고 있다. 정양호 KEIT원장은 “우리나라가 지금까지 선진기술을 쫓아가는 패스트팔로워 방식의 R&D 전략을 취해왔다면, 이제는 기술을 선도하는 퍼스트무버로 전환해야 할 시기”라고 강조했다. 정부의 핵심투자 분야인 시스템반도체, 바이오, 미래차와 함께 소부장 분야도 국산기술화에 주력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R&D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업화로 이어지기 위해 “대기업이 R&D 기획 단계부터 참여해 원하는 품질의 제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중소기업이 기술을 개발하면 사업화와 백엔드 단계까지 이어질 수 있는 ‘R&D 사업화 이어달리기’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KEIT, Korea Evaluation Institute of Industrial Technology)은 어떤 기관인지 소개 부탁한다
▶KEIT는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공공기관으로 산자부에서 집행하는 R&D 자금 중에서 산업기술 예산집행을 전담하고 있다. 올해 정부의 국가 R&D 예산 20조원에서 KEIT는 1조 5000억원(7.5%)을 집행했다.
구체적인 예산이 정해지면 어떤 기술개발 과제에 지원할 것인지, 연구개발에 참가할 기관들은 어떻게 선정할 것인지, 그리고 선정된 기업이나 기관들이 예산 집행을 잘하는지 등 R&D 과제 기획-평가-관리를 담당하고 있다. 이와 함께 기술개발이 완료된 뒤에도 성과를 점검하는 등 사후관리도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바탕으로 산업기술 경쟁력을 강화하고 건전한 산업기술 생태계를 조성하는 데 힘쓰고 있다.

-우리나라 산업기술 R&D 환경의 특징은 무엇인가
▶우리나라 발전 과정에 따라 R&D 환경도 비슷하게 맞춰서 변화해왔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선진국의 기술을 빨리 따라잡는 패스트팔로워(Fast-Follower, 빠른 추격자) 전략을 취해왔다. 이제는 산업기술의 상당부분이 선진국 수준이 되었기 때문에 앞으로는 퍼스트무버(First-Mover, 선도자) 전략으로 전환해야 할 시점이다. 과거의 패스트팔로워식 전략으로 뒤떨어진 기술이 뭔지 빨리 찾아내서 그 부분만 개발해서 따라갔던 방식을 이제는 미래먹거리 산업을 선도적으로 점하고 중국과 같이 빠른 속도로 기술격차를 좁히고 있는 개발도상국과 기술력 격차를 벌려야 한다.
이를 위해서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R&D 사업의 추진이 필요한데, 최근 KEIT는 초고난도 기술개발 난제 해결에 도전하는 ‘알키미스트 프로젝트’를 시범 추진하고 이를 지속적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현재 KEIT에서 가장 주목하고 있는 미래 유망 산업기술 분야는 무엇인가
▶반도체, 디스플레이, 선박과 같은 주력산업 쪽에 지원하는 부분이 있고, 앞으로 미래 먹거리가 될 수소·자율주행차와 바이오, 지능형 반도체 등 신산업 분야에도 주목하고 있다. 또한, 지난 7월에 있었던 일본의 수출 규제와 관련하여 소재·부품·장비 산업의 원천기술 확보와 기술 국산화가 중요한 시점이다.
KEIT는 미래 메가트렌드를 반영해 ‘산업기술 R&D 투자전략’을 수립하고, 5대 미래핵심산업군과 25대 전략분야를 선정했다. 나아가 25대 전략분야에서 차세대 100대 핵심기술을 선정해 집중 투자할 예정이다. 최근 정부는 시스템반도체, 바이오헬스, 미래차 분야에 자금을 지원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소부장 분야는 외세적 요인으로 우리나라가 직접 개발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예산이 늘어났다. 올해 예산이 1조 5000억원이었는데, 내년은 2조원으로 늘었다. 예산 증가분의 상당부분이 3대 핵심 신산업과 소재부품 분야다.
문재인 대통령이 10월 15일 오후 경기도 화성시 현대자동차 남양연구소에서 열린 미래차산업 국가비전 선포식에서 발언하고 있다./사진=청와대 제공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AI, 로봇 등 융합신산업을 지원하는 R&D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 바뀌어야 하는 부분은 무엇인가
▶지금은 바이오면 바이오, 자동차면 자동차 식으로 개별 기술 중심의 칸막이 기획이 되고 있다. 하지만 기술과 산업이 경계를 넘어 진화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칸막이 기획으로는 글로벌 속도전을 따라갈 수 없다. 앞으로 산업경쟁력은 한 개의 기업 경쟁력이 아니라 자율주행차 시장, 수소경제 등 큰 단위의 플랫폼 경쟁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칸막이를 없애고 융합신산업 R&D 과제를 늘려나가야 한다.
KEIT는 기술분야별로 고착화된 칸막이를 극복하기 위해 올해부터 융합기획협의체를 구성해 운영하고 있다. 협의체의 목표는 전략적으로 대형 융합기술을 공동기획하고 집중 투자하는 것이다. 또, 융합기술의 진출을 가로막는 제도와 규제에 대한 개선사항까지 함께 검토해 혁신적인 기술을 조기에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런 융합 R&D가 장기적으로는 국가 전체 경쟁력이나 일자리 창출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올해 국가 간 수출규제 갈등으로 인해 원천기술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됐다. 소부장 R&D에도 속도가 붙을 것으로 보이는데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내년도 예산에서 크게 증가한 곳이 소부장 분야다. 일본에서 당장 수출에 규제를 건 만큼, 수입선을 다변화하는 등 노력이 뒤따를 것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R&D를 통해 국산 기술을 가져야 한다. 소부장 산업은 제조업의 허리이자 핵심인데 이번 사태로 우리나라 소부장 산업의 구조적인 취약점이 드러난 것이다. 일본은 대를 이어 100년 이상 된 기업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압축성장으로 그 부분이 약했다. 최소한 5년 이상 장기 투자가 돼야 한다.
지금은 R&D와 사업화가 따로 되고 있는데, 함께 가기 위해서는 대기업이 R&D 과제 기획 과정부터 참가하도록 해야 한다. 대기업이 원하는 수요와 품질의 부품과 소재를 개발하면, 자연스럽게 판로로 이어지는 정책적 뒷받침이 돼야 한다. 또한, 개발 후에도 제품을 기업이 원하는 성능을 갖췄는지 점검하고, 부족하면 개량도 해야 한다. 연구개발 후 데스밸리(Death Valley, 유동성 위기를 겪는 3~5년 차)를 넘기 위해 지적재산권 확보와 품질인증, 사업화까지 이어져야 한다. 이것을 ‘R&D 사업화 이어달리기’라고 이름 붙였다. 최근 국내 18개 관련 기관과 MOU를 맺고, ‘소부장 R&D지원단’을 출범했다. 연구개발-신뢰성·인증·테스트베드-사업화 지원으로 역할이 나눠져 있다. 이러한 체계적 지원을 통해 핵심전략기술에 대한 국산화가 앞당겨질 것으로 기대한다.
정양호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KEIT) 원장을 비롯한 각 기관장들이 11월 12일 오후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소재·부품·장비 국산화 위한 '소부장 R&D 지원단 협약식'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사진=뉴스1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신뢰와 협력을 바탕으로 한 산업생태계 조성도 요구되는데

▶산자부 R&D는 산업 전체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고, 과제도 산·학·연 컨소시엄으로 하고 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소부장 분야는 R&D를 누가 성공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결과가 기업에는 매출로 연결되고 사업화가 돼야 일자리까지 만들어진다.
이제는 일본으로부터 수입됐던 소재·부품이 구입이 안 되니까 대기업 입장에서 보면 중소기업을 키워야 하는 상황이다. 상생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져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본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서로 공통의 분모가 있고 협력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기 때문에 탄력을 받을 거라고 본다. 정부도 R&D 예산을 늘리고, 특별법을 만들어 연구개발 다음 단계인 사업화까지 규제완화 조항을 포함하는 등 포괄적으로 지원하는 데 최대한 노력할 계획이다.

-국내 기업 일자리의 90%는 중소·중견기업에 있다. KEIT는 청년 고용 증대를 위해 기업과 기술인재 가교 역할을 하겠다고 했는데
▶R&D의 궁극적 목표는 과제 성공이 아니라 실질적인 사업화를 통한 일자리 창출이다. 그런 의미에서 KEIT는 중소·중견 기업이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자 우수기술연구센터(ATC) 사업을 하고 있다. ATC 사업은 우수한 기술 잠재력을 보유한 중소·중견기업 부설연구소를 지원함으로써 중소·중견기업의 체질 개선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내년부터는 이 사업이 ATC+ 사업으로 전환되며 지원도 늘어날 예정이다.
지난 6월에는 ATC 성과교류회를 열고 기업과 직업계고(마이스터고, 특성화고 등) 학생들을 연결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 자리를 통해 현장에 바로 투입될 수 있는 기술인재를 원하는 기업에 고졸 우수인재를 연결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R&D를 통한 청년 고용 확대를 위해 지난해 규정을 개정하기도 했다. 먼저 정부 R&D지원금 5억원당 한 명의 청년을 의무 고용하도록 했고, 이 외 추가 채용이 발생하면 기업이 부담하는 인건비만큼 현금부담금을 감면했다. 청년 신규채용 후 2년간 고용을 유지할 경우, 기업에 기술료 납부 유예·감경과 같은 혜택도 제공하고 있다.

정양호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장
-33년의 공직생활 대부분을 산업통산자원부에서 보냈다. 기관 운영에 자신만의 노하우가 있을 것 같다

▶정부 부처에 있을 때는 정책을 수립하는 입장으로 산업의 큰 방향과 비전을 제시하는 쪽이 강했다. 그런데 조달청과 KEIT는 실제 사업을 집행하는 기관이다. 집행기관에 와보니 현장에서만 겪는 애로사항들이 있더라. ‘벤처기업 육성’은 어느 정부나 추진해왔고, ‘도전적, 융합 R&D 필요성’에 대한 목소리도 늘 높았다. 결과적으로 잘 안 됐던 이유는 정부와 현장 사이의 괴리 때문이다. 양쪽을 모두를 겪어봄으로써 입장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제가 가진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양쪽의 경험이 모두 있어 차이를 조율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문제를 해결해가고 있다.
KEIT가 앞으로 선도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실패를 하면서 배우는 쪽으로 R&D시스템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패를 통해서 배운 경험 자체를 다른 쪽에 활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 시범 추진하고 있는 ‘알키미스트 프로젝트’가 그런 것이다. 초고난도 기술개발 난제 해결에 도전하는 프로젝트다. 알키미스트는 ‘연금술사’라는 뜻이다. 연금술은 비금속을 가지고 금을 만드는 고대와 중세시대 기술이다. 비록 실패했지만 그 과정에서 근대 화학과 관련된 이론이 다 나왔다. 1~2년 안에 달성은 못하더라도 장기적으로 난제를 연구하고 공부한 것이 다른 산업에 도움이 된다면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R&D 환경이 도전적인 연구개발을 용인할 수 있도록 바뀌어야 한다. 장기적 관점에서 환경을 고쳐나가는 것이 제가 할 일이다.

-KEIT는 올해 설립 10주년이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내년에는 어떤 기관으로 거듭나고자 하나
▶지금까지 10년 동안 우리나라 R&D는 패스트팔로워형이었다. 그 덕에 우리나라가 이렇게 단기간에 압축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퍼스트무버로 전환해야 하는 시기이며, 그러려면 R&D 시스템이 도전적, 융합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하루아침에 할 수는 없다. 우선 그런 큰 방향을 제시하고 저의 후임자가 오고 또 그 다음 후임자가 와서 10년 정도 다시 경험이 쌓이면 우리나라 R&D가 퍼스트무버로 성공적으로 전환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면 좋겠다. R&D를 위한 R&D가 아니라 우리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실질적으로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도록 ‘R&D 사업화 이어달리기’를 성공적으로 구축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
또한, 현재는 KEIT가 산업기술과 관련한 기업중심의 R&D 예산 집행만 하고 있지만, 내년부터는 행정안전부의 R&D 사업도 위탁받아 국민의 재난안전과 관련된 연구개발도 시작한다. 산업뿐만 아니라 국민들이 재난과 재해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하는 ‘따뜻한 R&D’ 업무도 새롭게 하게 됐다. 우리 기관이 R&D를 통해 기업의 애로를 해소해주고, 다른 분야에서는 국민 행복을 위해 연구하는 기관이라는 이미지를 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정양호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장
1961년 12월 22일 출생
서울대학교 경제학 학사
서던일리노이대학교 경제학 박사
제28회 행정고시 합격
대통령비서실 경제보좌관실 행정관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지식경제부 전기위원회 사무국장
지식경제부 산업기술정책관
지식경제부 기후변화에너지자원 개발정책관
산업통상자원부 에너지자원실 실장
제33대 조달청 청장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12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carriepyu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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