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만희, “유일한은 나라가 먼저였던 '독립운동가’"

“제3한강교 개발에 ‘도둑놈’ 들먹이며 회사땅 선뜻 내놓은 분”

머니투데이 더리더 편승민 기자 2019.04.02 09:41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네이버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편집자주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해 경기대 김택환 교수의 특별 코너를 준비했다. 대담을 통해 대한민국 미래 100년을 설계하는 밑그림을 제시한다. 지난달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에 이어 두 번째 주자로 연만희 유한양행 고문을 만났다. 인터뷰는 대방동에 위치한 유한양행 본사에서 진행됐다. 그의 사무실에는 유한양행 창업자인 고 유일한 박사의 흑백 사진이 걸려 있었고, 한켠에는 연 고문에게 정신적 버팀목이었던 돌아가신 어머니의 사진도 자리하고 있었다. 유일한 박사 생전에 함께한 일화들, 어머니와의 대화를 떠올리던 그의 눈에 그리움의 눈물이 때때로 차올랐다.
유한양행의 창업주 유일한 박사(1895~1971)는 평양에서 태어나 9살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헤스팅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시간주립대에 진학했던 유 박사는 미국 필라델피아 한인대회에서 ‘한국 국민의 목적과 열망을 표방하는 결의문’ 작성에 참석했다. 당시 한인 총대표회의는 서재필이 주도했으며 대학생 유일한은 이승만, 조병옥, 임병직 등 민족 독립지도자들과 교우했다. 대학 졸업 후 미시간 중앙철도회사, GE 등에 재직하다가 식품 회사를 설립해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1925년 미국에서 유한주식회사(New Il-han Company)를 설립한 그는 서재필을 사장으로 영입했고, 이듬해인 1926년 한국에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그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는데 특히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폭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을 때 유 박사는 미국 전략정보처 OSS(Office of Strategic Servies, CIA 전신) 산하 한국담당 고문으로 발탁됐다.

그는 해방 이후 유한양행을 재정비하고, 대한상공회의소 초대 회장으로 활동하는 등 한국 경제 발전의 조력자로 활약했다. 유 박사는 인재 양성에 힘쓴 것으로도 유명한데 1952년 고려공과기술학교, 1964년 유한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해 장학금을 출연하는 등 사회 공헌에 이바지했다.

이번 인터뷰의 주인공인 연만희 유한양행 고문은 유일한 박사를 오랜 시간 최측근에서 보좌했던 인물이다. 그가 유한양행에 들어오게 된 이야기, 유일한 박사와의 인연, 그리고 그의 정신적 버팀목이 됐던 어머니와의 일화를 통해 유한의 기업가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6.25전쟁을 겪은 유년기
제가 태어나서 어렸을 때 살던 곳은 북한의 황해도 연변이었다. 아버지는 제가 세 살, 어머니가 스물세 살 때 돌아가셨다. 당시 제 고향집에는 유치원도 없고, 국민학교(현 초등학교)가 하나뿐이었다. 외갓집은 남한에 있었는데 인구 4만 명의 꽤 규모가 있는 도시여서 학교가 많았다. 외할아버지는 어머니께 “너희 아범도 돌아갔고, 여기 와서 아이 유치원도 가고, 학교도 다니면 어떻겠니” 하셔서, 어머니와 둘이 외갓집에 와서 자랐다.
운이 좋게도 저는 국민학교 다니는 6년 동안 내내 급장(학급 반장)을 했다. 그래서 중학교는 서울에 가려고 했는데 그때 서울에 있던 학생들이 지방으로 많이 내려오는 상황이었다. 외할아버지는 남들은 서울에서 내려오는데 지금 서울 가서 뭐 할 거냐고 하시면서 외갓집에서 농업학교에 진학하라고 하셨다. 농업학교가 그때 국립학교가 돼서 학교들 중에 가장 먼저 시험을 치렀는데 국민학교
에서 급장 경험도 있고 해서 농업학교에 합격해 다녔다. 그렇게 3년을 다니다가 중3 때 우리나라가 해방이 됐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는 외할아버지한테 허락을 받아 개성에서 나왔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은 고려대학교 경제학과(1949년)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듬해인 대학교 2학년 때 6.25전쟁이 일어났다. 그때부터 군대에 가서 5년 정도 군대 생활을 했고, 제대하고 졸업 후에 사회에 나와 1961년도에 유한양행에 들어오게 됐다.

유일한 박사와의 만남
대학을 졸업하고 제 친구가 유한양행에 아는 사람이 경리 계통 사람을 하나 뽑는다고 했는데 네가 한번 응시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당시 유한양행은 현재 강북삼성병원(고려병원) 근처 농협 건물에 있었는데 혼자 회의실에 앉아 시험을 봤던 기억이 난다. 운 좋게도 합격하여 1961년부터 유한양행과 함께하게 됐다.
유한양행에 입사하고 현재 본사가 위치한 대방동에 1962년 5월 사옥이 준공돼 이사를 왔다. 제가 입사하자마자 유 회장은 저에게 증권시장 상장 업무를 맡겼다. 몇 번 뵌 적도 없는 회장님이 경리과 직원한테 그런 큰일을 맡긴다는 것이 사실 두려웠다. 그런데 임원들의 말을 들어보니 회장님이 직접 그런 지시를 내리셨다고 하더라. 실패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을 안은 채 밤잠을 설쳐가며 준비했다. 그렇게 해서 1962년 11월 제약업계 최초로 기업을 공개하고 주식을 상장했다. 그렇게 하여 ‘기업이윤은 될 수 있는 한 사회의 많은 사람에게 돌아가도록 발전시키는 것이 기업의 임무이며 책임’이라는 유일한 회장의 의지를 실현해가는 출발점이 됐다.
故 유일한 유한양행 창업자
유 회장이 얼마나 개인보다 나라와 사회를 우선시했었는지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 있다. 예전에 제3한강교(현 한남대교, 경부고속도로 진입 역할을 하는 다리로 경부고속도로 계획과 더불어 착공됐다)가 없었을 당시 그곳에 회사 이름으로 산 땅 480평이 있었다. 그런데 제3한강교 개발 계획이 발표되면서 땅값이 무지하게 올라갔다. 그랬더니 땅 주변 동네에 사는 주민들 열댓 분이 회사에 찾아왔다. 그분들이 하시는 말이 “서울시에서 그 땅을 지금 평당 4천원씩에 팔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중에 한일은행(현 우리은행) 감사가 한 분 계셨는데, 은행이 감정을 해서 나온 금액을 보고 결정하자고 했다. 그렇게 감사 결과가 나왔는데 평당 평가 금액이 1만2천원이 나왔다. 서울시가 정한 것보다 세 배가 더 높은 금액이었다. 서울시에 따지고 들자 시는 ‘예산이 없지만 다리는 꼭 만들어야 하니 4천원에 하자’고 하더라.
그래서 회장님께 말씀드렸더니 같이 그곳에 가보자고 해서 저와 다른 직원까지 셋이서 땅을 보러 갔다. 보시곤 하는 말씀이“앞으로 김포 쪽으로 가려면 여기에 다리가 날 수밖에 없겠네. 우리 땅 4천원에 서울시에 팔아라” 하셨다. 그래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런데 동네 사람들 항의가 심합니다” 했더니 버럭 화를 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무슨 소리야? 국가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당연히 줘야지. 자네 그 땅 우리가 얼마에 샀는지 알아? 지금으로 치면 3원에 샀는데 4천원이면 1300배도 넘는데 그걸 안 받겠다고 해? 당장 받아와”라고 하셨다. 그래서 서울시에 가서 바로 판다고 얘기했다. 또한 회장님은 “3원짜리를 4천원 주면 이미 1300배가 넘는 이익인데 1만2천원이면 몇 배란 말이야. 도둑놈들 아니냐? 국가가 무슨 돈이 있나” 하고 말씀하셨다. 항상 개인이나 기업의 이익보다 국가와 사회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분이었다.

연만희 고문이 들은 유일한 박사의 생애
유일한 박사 가족은 교회를 다녔는데 미국인 선교사가 미국으로 아이를 보낼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유 박사 아버지가 아홉살 아들을 미국으로 보내게 됐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했는데 고국의 부모님 사업이 어려움에 처하면서 재정적으로 지원을 못 받아 힘겹게 생활했다. 그러다 내브래스카 주로 이주해 미국인 자매의 도움을 받아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그곳에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해서 방학이 되면 그는 군사학교를 다녔다. 후에 그는 헤스팅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 주에 있는 미시간 대학교를 다녔다.
졸업 후에는 대학 동창과 동업해 숙주나물 통조림을 생산하는 식품회사 라초이(La Choy)를 설립했다. 그는 라초이 설립 후 1925년에 원료 구입을 위해 중국 상해를 방문했다가 아버지가 살고 있는 중국 북간도 용정(해외에서도 가장 치열하게 독립운동이 전개된 곳 중 하나)에서 21년 만에 가족을 상봉했다. 유 박사의 아버지가 “넌 거기서 뭐 하니” 했더니 “숙주나물 공장을 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돈도 많이 벌었다고 말씀드렸는데도 아버지가 아주 실망하셨다고 한다.
다시 미국에 돌아온 그는 그해 유한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서재필을 사장으로 영입했다. 이때 유 박사는 대학동창인 호미리라는 중국 여성과 결혼했는데 그는 동양 여자로서는 최초로 미국에서 의사 면허를 취득한 사람이었다. 그해 유 박사는 한국의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상과 교수로 초청받았고, 부인 호 여사는 세브란스 의학교수로 부임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한국에 돌아왔으나 교수 부임을 하지 않고 1926년 종로 2가에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그는 한국에서 의약품과 의료 산업 분야가 필요하다고 보고 조국에 도움이 되고자 유한양행을 창립했다. 

유 박사와 호 여사 사이에는 1남 1녀가 있었다. 특이한 점은 유 박사의 유언장을 보면 아들 유일선은 대학까지 가르쳤으니 독립해서 살라는 말만 있고, 딸 유재라에게는 유한공고 내 묘소와 주변 땅 5천 평을 물려주라고 했다. (아들의 딸)손녀 유일링에게는 대학 졸업까지 학자금으로 1만 달러를 주라고 했다. 나는 증손주도 있는데, 할아버지가 되고 보니 1만 달러로 대학 졸업하기는 턱도 없더라. 독립군 지원이나 인재 양성을 위한 장학금 지원에는 아끼지 않은 분이었는데 가족에게는 부를 세습하거나 나누지 않으시더라. 그리고 자신 소유의 유한양행 주식 14만 941주는 사회와 교육원조신탁기금에 기증했다. ‘기업은 기업을 키워주는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것이 철저한 그분의 철학이다. 1971년 향년 76세로 사망했고, 1995년 조사에 의해 유일한 박사의 독립 활동 이력이 밝혀지면서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내가 기억하는 유일한은 어느 누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애국자였다.

어머니의 가르침
우리 어머니 생전 사진을 지금 제 방 사무실에 두고 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어머니가 스물세 살, 제가 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본가는 이북으로 30리, 외갓집은 이남으로 30리에 있었다. 외할아버지가 애 유치원이나 학교도 보내야 하니 외갓집에 와서 지내라고 하셔서 외갓집에서 죽 자랐다. 어머니는 친정에 와서 살면서도 시장에 한 번도 나가신 적이 없었다.
그런데 국민학교 3학년 때 친한 친구 두 명이랑 같이 셋이서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던 길에 선일상회라는 문방구에 들렀다. 들어갔는데 같이 간 친구들이 삼각자를 우물우물 만지더니 저한테 분도기(각도기)를 하나 줬다. 나는 친구들이 사서 준 줄 알았다. 나중에 보니 삼각자도 훔친 거였고, 분도기도 훔친 것이었다. 처음에 긴가민가하면서 그걸 가지고 그냥 집에 왔다.
당시에 우리 어머니는 매일 밤이면 필통 안에 있는 연필을 깎아주고 정리를 해주셨다. 그런데 분도기가 들어 있는 걸 보시더니 “이게 웬 거니?” 하시더라. 처음에는 “그거 문찬이랑 봉준이가 하나 사서 줬어요”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어머니께서 걔네 집에 가보자고 하시더라. 그래서 안 갈 수도 없고 나와서 반쯤 걸어가다가 그 집에 가서 야단맞는 것보다 지금 맞는게 낫겠다 싶어서 “사실 그게 아니라 걔네들도 아마 돈을 안 낸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러면 선일상회로 가자고 하셨다. 거기까지 끌려갔고 어머니가 삼각자와 분도기 값을 지불했다. 그러고 나서 집에 오시더니 “내가 왜 사는 줄 아니? 너 하나 보고 사는데 네가 이런 짓을 하면 내가 살아서 뭐 하니” 하면서 우시더라. 지금도 그때 생각하고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먼저 난다. 그래서 그때부터 무슨 일이 있어도 항상 정직해야겠다고 결심했고, 90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 

유한의 ‘기업가 정신’ 이어가
‘기업은 기업을 키워준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원칙이 유 박사의 철학이었다. 그렇게 했을 때 결국은 더 값지게 나한테 돌아온다는 것을 느꼈던 일화가 또 하나 있다. 예전에 유일한 회장이 저에게 집에 방이 몇 개냐고 물으시더라. 그래서 세 개라고 했다. 그러자 “애가 셋이라며? 어머니도 계신다며? 그런데 방 세 개 가지고 되나?” 하셨다. 저는 “어머니와 딸이 같이 쓰고, 사내아이 둘이 같이 쓰고, 저희 부부가 써서 여유는 없지만 다 있습니다” 했더니, “방 하나 새로 들여. 내가 돈 줄게”라고 하셨다. 며칠 뒤에 얼마면 되겠냐고 물으셔서 20만원이면 된다고 말씀드렸더니 그 돈을 주시면서 앞으로 이자를 받을 건데 1년에 2부 이자(월 2%)를 받겠다고 하시더라. 한 달에 4천원씩 갚으면서 일년 정도가 지났다. 하루는 세배하러 갔는데 “이제 돈이 얼마 남았냐”고 하시길래 “10만원 넘게 남았다”고 했더니 “그럼 오늘부터 그거 없는 걸로 해” 하시면서 “아직 없어진 건 아니고 나중에 돈 벌어서 갚으라”고 하시더라.
회장님의 평소 뜻을 조금이나마 따르고 싶어 유한고등학교 졸업식에 갔을 때 교장한테 많이 주지는 못하고 학생들 3명 정도 장학금을 줄 테니 앞으로 얼마인지 알려주면 보내주겠다고 얘기했다. 그렇게 1년 반 정도를 후원했는데 나중에 회장님이 그 사실을 알고 “왜 내가 그걸 모르느냐?”고 버럭 화를 내시더라. 받는 사람 모르게 하기 위해 교장과 둘이 약속한 것이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말씀드리니 어쨌든 고맙다고 하시면서 끝이 났다. 그러고 3~4일 지났는데 회장님이 만나자고 해서 본사에 갔더니 1억2천만원을 주시면서 “내가 당신한테 3억을 줄 건데, 오늘 1억2천만원 가져가고 다음에는 1억8천만원을 줄게” 하시더라. 이게 뭐냐고 물었더니 “내가 당신 주는 거야. 더 묻지 말어” 하더라. 나는 그 돈의 대부분을 학교재단 이사장 이름으로 통장을 만들어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산운용사에 의해 1억2천이 약 1억7천만원이 되어 유일한로(유한대학교와 부천시 사이에 있는 자동차 도로. 유일한 박사의 공로를 인정해 이름을 따왔다)공사에 바쳤다. 저 역시 생전 회장님의 기업의 사회 환원 정신을 크게는 아니더라도 뜻을 같이하고자 노력했고, 그렇게 할수록 오히려 더 큰 가치가 되어서 돌아온다는 사실을 그를 통해 배울 수 있었다.
지금 우리나라 경제뿐만 아니라 세계 경제까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좋지 않은 상태기에 이런 어려움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고민이 많다. 모든 건 경험이 있어야 하는 것 같다. 경험이 없는 사람이 일을 하다 보면 현실과 맞지 않는 부분들이 생길 수 있다고 본다. 기업은 기업을 경험해서 기업가 정신이 있는 사람에게 맡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검증되지 않은 2세, 3세나 단순히 가족이나 지인이기 때문에 맡기는 식의 경영은 반대한다. 기업가 정신을 가진 능력 있는 기업가가 맡을 때 기업도, 사회도 진일보할 수 있다. 기업인으로서 유일한 박사는 평생 기업과 사회, 국가가 항상 첫 번째였다.


PROFILE

연만희 유한양행 고문
고려대학교 경제학과(49학번) 졸업/유한양행 입사(1961년)/유한양행 사장/유한양행 회장/유한재단 이사장/가장 존경받는 기업인상 수상(2012년)/現 보건장학회 이사장

김택환 교수
국가비전 전략가로 독일 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4차 산업혁명 및 독일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세계 경제패권전쟁과 한반도의 미래> 등 다수의 역작을 집필했다. 대한민국의 미래는 독일을 뛰어넘어야 다시는 중국, 일본, 러시아 등에 당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4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carriepyu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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