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옥순 대표(자연발효연구소 여재농장),자연을 담고 가꾸는 ‘발효 놀이터’

[농촌은 지금, Jump-up]“인위적인 첨가물 없이 그대로 익어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

머니투데이 더리더 가현정 객원기자 2019.04.01 18:04 카카오톡 네이버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박옥순 대표
‘명옥헌 초대석’ 스물아홉 번째 주인공은 전남 화순군 남면에 위치한 ‘자연발효연구소 여재’를 운영하는 박옥순 대표다. 여재농장이 위치한 화순군 남면 정전길을 따라 들어가는 길은 고즈넉해서 전형적인 농촌마을의 정취가 느껴졌다. 좋은 산에 둘러싸인 마을의 맑은 물이 흐르는 시골길을 따라 한참을 가다보니 혹시 길을 잘못 들어선 건 아닐까 우려도 되었다. 그런 기우도 잠시 골목 어귀마다 길을 안내하는 작고 예쁜 푯말이 붙어 있어 안심하고 잘 찾아갈 수 있었다. 농장주인의 섬세한 손길과 배려의 마음씨가 느껴져 따뜻한 봄날이 벌써 온 듯했다. 일터가 아니라 그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담아 필요한 만큼만 가꾸고 다듬는 아름다운 놀이터라며 얼굴 가득 미소를 짓는 박옥순 대표가 문 앞에 마중을 나와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문을 열고 들어서니 영원한 행복을 상징하는 노랗게 핀 복수초가 우리를 맞이하는 것이 아닌가? 마당 가득 심어둔 꽃처럼 아름답고도 행복한 박 대표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보자.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지금은 완연한 시골에서 살아가는 농촌여성의 모습이지만 귀농을 하기 전까지 광주광역시에서 미용실을 운영했습니다. 미용실의 특성상 오랜 시간을 일하고, 어린 아들을 키우며 집안일까지 해내는 일이 쉽지는 않았어요. 그러다 결국 덜컥 몸에 병이 나서 도시 생활을 그만두어야 하는 순간이 온 거예요. 남편과 상의하여 시부모님이 계신 화순 남면으로 생활터전을 바꾸고 나서 건강을 되찾고 지금의 모습이 될 수 있었지요. 제게 있어 자연은 생명의 은인과도 같다고 할 수 있어요. 산이 좋고 물이 맑은 우리 마을에 살면서 생명이 연장되었으니 이제는 그 은혜를 갚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농장과 발효연구소를 운영하면서도 일터라고는 하지만 성과를 중시하지 않고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즐겁게 일하는 놀이터로 삼았어요. 저를 찾아오시는 모든 분들도 이곳에 오셔서 자연으로 인해 즐거워진다면 더할 나위 없지요.”

-갑작스러운 귀농을 하시게 된 계기는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처음부터 농촌이 좋아서, 자연이 좋아서 자발적으로 들어온 건 아니에요. 아이가 어렸을 때, 6살 정도 되었을 때 제 건강이 너무나 좋지 않아서 도시 생활을 버텨낼 수가 없는 지경이었지요. 가정경제를 책임지다시피 했기 때문에 잠시도 쉴 틈 없이 일한 탓이 컸나 봅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남편과 함께 시부모님 계신 곳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지요. 건강 회복을 위한 요양 차원의 이사였기 때문에 귀농이라고 할 수는 없고, 귀촌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는 것 같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마을은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한국수자원공사에서 지속적으로 관리를 하고 있는 곳이에요. 아무래도 개발이 제한된 지역이라 투자의 관점으로 본다면 매력이 없는 곳이겠지요. 하지만 제게는 건강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생명의 은인과도 같은 땅, 우리 마을을 잘 지키고 보전하는 일이야말로 제가 살아가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거창한 목표나 다부진 마음을 가진 것은 아니고요, 그저 아름다운 꽃과 식물이 가득한 놀이터에서 즐거이 지내는 것이 전부입니다. 오늘처럼 이렇게 좋은 사람이 멀리서 찾아오는 날은 더욱 즐겁지요.”

-비자발적 귀농생활이었기에 더 힘든 점은요
▶“무엇보다 제 몸이 편치 않은 상황이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답답한 시간을 견뎌내야 하는 일이 가장 힘들었지요. 마치 이유식을 먹어야 하는 때의 아기가 된 것처럼, 철저한 식이조절을 병행하며 3년을 지내다보니 서서히 건강이 회복되었습니다. 제가 우리 마을에 들어온 것이 벌써 30년 전이니 그때는 지금처럼 젊은 사람들이 귀농을 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을 때여서요. 마을 어른들의 지나친 관심과 시선이 때론 불편하기도 했습니다. 시어머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자유롭게 생활하기가 어려운 측면도 힘든 것 중 하나였습니다. 멀리서 반가운 친구가 놀러 와도 항상 어머님께서 우리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셔서 부담스러운 상황이 되곤 했거든요. 어머님의 애정과 보살핌이 때로는 불편하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건강도 나아지고 농촌생활에 적응하면서 고유한 공동체 문화의 장점과 혜택을 온전히 누릴 수 있었어요.”

-3년 후부터 농장을 운영하신 건가요
▶“건강이 회복되고 나서 미용실을 개업했습니다. 지금도 농촌에서의 생활이 경제적으로 넉넉한 편은 아니지만 제가 들어왔을 때는 더욱 어려운 때였거든요. 결국 생활을 위해 다시 일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만 대도시에서 일할 때와 다르게 오전에만 일을 하고 오후에는 과감히 문을 닫았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돈이 아니라, 시간과 건강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철저하게 제 자신만의 원칙을 지키고자 노력했죠.
오전에만 문을 여는 미용실이라는 것이 그 당시에는 이상하면서도 새롭게 여겨졌나 봅니다. 손님들이 늘어나고 아는 사람도 많아지기 시작했지요. 오후에는 오롯이 휴식을 취한다고는 하지만 딱히 할 만한 것이 없어 복지관으로 운동을 다니면서 화순농업기술센터에서 운영하는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했습니다. 전통악기를 배우고 수를 놓는 것부터 시작해서 농산물을 가공하는 전문적인 분야까지 열심히 배웠던 것 같아요. 지금도 배움의 과정은 계속되고 있고요. 배움의 과정에서 만난 좋은 사람들과 교류가 깊어지고 건강도 무척 좋아졌습니다.”

-자연발효에 관심을 갖게 되신 때도 그즈음인가요
▶“처음부터 농사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 농업기술센터에서 다양한 농산물 가공법이나 자연발효법에 대해 배우기 시작하면서 농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농사를 하는 중에 소득 증진을 위해 농산물 가공법이나 다양한 기술을 배우러 오는 다른 농부님들과는 무척 다른 점이에요. 그야말로 여가 시간을 활용하는 차원의 놀이 시간이었는데 일을 찾는 계기가 된 것이라 독특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학습과 봉사를 중심으로 일상을 보내면서 더욱더 건강해지는 제 자신을 발견하고 놀랐어요. 저에게 선물같이 주어진 소중한 시간을 아낌없이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야말로 끊임없이 배우고 사람들에게 나누는 삶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연발효를 배우면서 이거다 싶었던 이유는 인위적인 첨가물 없이 자연 그대로 익어가는 것이야말로 우리 인생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놀이터 삼은 곳이 일터가 된 거군요. 일과 놀이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제 생각에는 자발성이라고 봐요. 놀이를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시간과 돈을 사용하면서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거든요. 돈을 벌기 위해서 억지로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 삶을 더욱 버겁게 한다고 생각해요.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도 어쩌면 틀린 말이에요. 피하고 싶은 마음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놀이가 될 수 없으면 일이 될 수도 없다는 것이 제가 깨달은 점이에요. 노동이라 생각하지 말고 돈을 구하려 하기 전에 먼저 재미를 찾으면 누구나 일터에서 놀이터로 변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어요.”
▲발효차를 마시고 있는 박옥순 대표

-미용전문가에서 발효전문가가 되신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우리 가족들과 함께 먹으려고 조금 넉넉히 만들어둔 다양한 발효식품을 주변에서 사고 싶어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여유 분량을 조금씩 이웃에게 나누어주고는 했는데, 화순에 있는 암 병동에 계신 환우분들까지 제가 만든 발효식품을 원하셔서 사명감 같은 것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어차피 남은 인생을 배움과 봉사로 살아가기로 다짐을 했는데 미용 봉사도 좋지만 직접적으로 생명을 살리고 건강을 회복하는 일에 봉사해야겠다 싶었지요. 본격적으로 자연발효를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재료를 사 오는 것으로는 비용 감당이 되지 않겠더라고요. 자연스레 농사를 조금씩 시작하게 되었고, 지금의 규모가 되었어요. 이번에 농지를 더 구입해서 일거리가 더 늘었어요. 그래도 전혀 일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고, 또 다른 놀잇감이 생겼다는 생각만 들어요. 욕심 내지 않고, 무리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즐겁게 하면 되는 거니까요.”

-이제는 더 이상 소원이 없으실 거 같아요
▶“간절한 소원이 하나 있어요. 올해는 꼭 이루어지면 좋겠어요. 제가 결혼해서 자녀를 낳을 때는 ‘하나만 낳아 잘 살자’를 정책 구호로 삼던 시절이었어요. 그래서 국가의 정책을 따르느라 아들 하나만 낳았는데, 우리 아들이 삼십대인데 아직 결혼을 안 했어요. 여자 친구도 없는 눈치이고요. 아들에게 여자 친구가 생기는 것, 그 한 가지 소원만 이루어지면 더 이상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어요.”

-공개적으로 아들 자랑 한번 해주세요
▶“제 아들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착하고 성실해요. 외동아들이라서 어릴 때부터 엄격하게 키우려고 마음먹었지만 우리 아들은 혼낼 필요가 거의 없을 정도로 스스로 알아서 해내는 모습을 보여줬어요. 제가 미용실에 일하러 가고 마음 편하게 배움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아들의 도움이 가장 컸다고 할 수 있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할머니 식사도 챙겨드리고, 집안일도 많이 도와주면서도 공부 또한 열심히 했거든요. 대학을 졸업 후 서울에 있는 직장과 전남 지역에 있는 직장에서 모두 합격 통지를 받았어요. 고민하는 아들에게 우리 지역에서 일하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할 거라고 조언을 해주었는데 이제는 조금 미안해져요. 아무래도 화순에서 출퇴근을 하다 보니 대도시처럼 이성을 만나서 교제할 기회가 부족하거든요. 흔히 낙후된 농촌마을이라고 생각하는 곳에도 안정적인 직장을 갖고 성실하게 일하는 지역의 매력적인 청년들이 있음을 더 많은 사람이 알아주면 좋겠어요.”

가현정 객원기자는는 귀농인문학아카데미 대표로 활약하고 있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3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yunis@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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