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학찬 예술의전당 사장, “퇴임 후? 다시 거리로 나갈 것”

사상 첫 연임 사장, ‘예술의 문턱낮추기’에 6년 이바지

머니투데이 더리더 임윤희 기자 2019.02.07 08:00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네이버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고학찬 예술의전당 사장

“고슴도치 딜레마(Hedgehog’s dilemma , Porcupine’s dilemma)”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저서에서 고슴도치는 추운 날씨에 상처입지 않으려고 거리를 두고 온기를 나눈다.
예술의 전당 고학찬 사장은 전직 방송작가답게 고슴도치 딜레마에 살을 붙여 스토리를 만들어낸다. 명절에 모이는 가족들이 무심코 뱉은 말들에 서로 찔리는 명절증후군 이야기, 현대 리더들이 상대방과 사이를 인정하고 존중해야만 성공에 가까워진다는 이야기. 고슴도치에서 출발한 그의 이야기는 우리 삶 속으로 스며든다. 재미는 기본이다. 최근 방문한 광주 송정역 인근 재래시장에서 고슴도치 한 쌍을 장만했다. 고슴도치 딜레마는 이렇게 그에게 또 하나의 레퍼토리로 추가된다.
고 사장은 연극영화를 전공하고 방송 작가와 PD로 활약하다 미국으로 넘어가 의류 도매상으로 이름을 날렸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윤당아트홀 관장부터 예술의 전당 사장까지 그의 인생 자체가 극적인 드라마다.
예술의 전당 설립 28년 만에 처음으로 연임을 한 사장이라는 전례를 남기며 올 3월 퇴임을 앞둔 그를 <더리더>가 만났다. 그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나는 스물다섯 가지 일을 하며 살던 거리로 다시 나갈 것이다. 그곳이 내가 있던 자리다”라며 담담하게 답한다.

-전당 사상 최초의 연임 사장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퇴임을 1개월 앞두고 있다. 그간 소회를 말해달라
▶세월이 빠르다고들 하는데 나는 여기 들어온 날부터 지금까지 매일매일을 카운트했다. 그러다 보니 벌써 2,200일(6년)이 넘었다. 가만히 앉아 2천이라는 수를 세고자 해도 쉬운 일은 아니다.
임기 3년으로는 장기적인 사업 계획 수립에는 어려움이 크다. 연임 사장으로 장기적 안목을 가지고 추진한 사업에 긍정적인 반응이 나와서 보람이 있었다. 또 예술의 전당의 문턱 낮추기에 노력을 기울여 좋은 성과를 낸 것도 기억에 남는다.

-취임 이후 가장 큰 성과로 꼽는 것은 무엇인가
▶예술의 전당 하면 아직도 특별한 사람들만이 찾는 곳이라는 편견을 가진 분들이 많다. 그런 편견을 깨기 위해 대한민국 최초로 ‘싹 온 스크린’이라는 영상화 사업을 시작했다. 예술의 전당의 우수 예술 콘텐츠를 고화질 영상과 음향으로 담아내어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뛰어넘어 상영이 가능하도록 했다. 전국 각지와 해외에서도 우수 공연과 전시를 만끽할 수 있다는 장점으로 인해 현재까지 총 37만 명이 관람했을 정도 반응이 좋다. 

이렇게 문화 예술 콘텐츠의 영상화를 통해 수천 명만 즐길 수 있었던 공연을 수만 명이 볼 수 있도록 예술의 문턱을 낮추었다. 언젠가 울릉도에서 ‘싹 온 스크린’을 선보인 이후, 한 소녀가 예술의 전당으로 “저는 발레 공연 영상을 처음 보고 감동받았어요. 나중에 커서 발레리나가 되고 싶어요”라는 이야기를 편지로 써 보낸 적이 있다. 이 소녀의 편지는 단순히 몇만 명이 보았다는 수적인 결과보다 더 소중하게 다가왔다. 영상화 사업은 정부의 공공기관 우수사례로 선정됐다. 국민의 문화충전소 역할을 제대로 해냈다는 사실이 매우 뿌듯하다.

- 서예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걸로 안다
▶예술의 전당에 한가람미술관, 오페라하우스, 음악당은 모두 사람들로 북적이는데 서예박물관은 적막강산이었다.
서예는 1700년 역사가 있는 예술 장르지만 이 시대는 적막강산이 됐다. 특히 젊은이들에겐. 젊은이들이 하지 않으면 서예는 사라질 수도 있다. 서예를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에 가보니 골목마다 서예를 하더라. 초등학교에서는 서예가 필수 과목이다. 일본조차도 우리보다 훨씬 대중화되어 있다. 한중일 문화 교류를 한다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서예인데, 우리는 서예를 하지 않고 있다.

젊은 사람들이 서예를 봐도 뜻을 모르니까 공감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영문 서예를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배운 게 전부인 사람이 영문 서예를 하겠다고 나서니까 다들 웃었다. 하지만 친근한 영어 명언을 서예로 쓰면서 젊은 친구들이 공감해주더라. 최근엔 프랑스에서 내 작품을 전시하겠다고 5점을 보내달라고 했고, 전북비엔날레에선 작품이 팔리기도 했다. 한자를주로 쓰던 것에서 누구나 알 만한 영어를 서예로 풀어내 좋은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서예박물관을 리노베이션(110억 예산, 국고 90억)해서 2016년 3월 재개관했다. 전통 서예만 고집하지 않고 서양에 그라피티까지 융합해서 전시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젊은이들이 오기 시작했다.리노베이션 이전 연간 관람객 수 4만여 명에 그쳤지만 리노베이션 이후 20만여 명으로 증가했다.
사람들은 낯선 사람이 낯선 일을 하면 백안시한다. 나는 그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간 내 인생이 남들이 가보지 않은 길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고학찬 예술의전당 사장

- 고 사장님의 인생을 보면 ‘도전’이라는 키워드가 떠오른다. 연기 전공자에서 방송국 PD로 뉴욕에선 최초로 한국어 방송에 도전하고, 문화 불모지 강남에서 윤당아트홀을 세웠다. 어떤 원동력이 도전의 삶으로 이끌었다고 생각하나
▶도전 정신과 힘은 태어난 고향 제주에서 시작했다. 수평선을 보고 자라 항상 그너머 가보지 못한곳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다. 어떤 세상인지, 어떤 삶인지, 그런 호기심이 나를 만들었다.
서울로 고등학교에 왔더니 아이들이 나를 구경하러 왔다. 그야말로 이방인이었다. 모든 애들이 낯선 사람으로 볼 때 내 마음이 어땠겠나. 계속 이방인이 될 것인지 열심히 해서 제주 사람도 괜찮다는 관점으로 보게 할지에 대한 도전이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으로 졸업해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다.
연극영화과가 그 당시 3개 대학에 있었는데 그 출신 중 시험 보고 방송국(당시 TBC)에 들어간 PD 1호였다. 같이 입사한 친구들은 모두 선배들이 와서 식사를 챙기더라. 학교선배, 고향선배 등. 다 빠져나가고 점심시간에 나 혼자 남았다. 아무도 손 내미는 이 없었다. 이런 외톨이 정신이 남들보다 나를 강하게 만든 요인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다양한 직업을 거치면서 예술의 전당 사장까지 올랐다. 나름대로 성공한 삶이라고 볼 수 있는데, 자신의 강점은 무엇이라고 보나
▶나의 강점이자 약점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좋아하는 거다. 차별이 다른 게 아니다. 대개 전당 사장이면 내가 만나는 부류가 정해져 있다. 내가 전에 일하던 여의도에 가면 구두 닦는 아저씨가 내 친구다. 격의 없이 사람을 만나는 편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건 미국에서 경험 때문이다. 처음 미국에 갔을 때 유학생 신분으로 기숙사에 살았는데, 아내가 딸을 데리고 미국으로 오겠다고 하더라. 유학생 신분에서 갑자기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할 상황이 되었다.
급하게 바텐더 스쿨에서 3개월 코스를 속성으로 자격을 땄다. 일을 시작한 첫날 중국인 여자 웨이트리스들이 주문서를 가지고 오는데 어떻게 만드는지 생각이 안 나더라. 왜 술 안 주냐고 난리를 하는데 그럴수록 당황했다. 그때 날 도와준 게 바에서 술 한잔 얻어 먹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나한테 그들이 코치를 해주는 바람에 위기를 모면했다. 뜻밖에 사람들, 세상에서 멸시받는 알코올 중독자의 도움으로 직장을 얻을 수 있었다. 집에 오면서 내가 사람에 대한 편견을 가지지 말자고 생각했다. 

- 미국에선 다양한 직업을 경험한 걸로 안다. 그때 이야기가 궁금하다.
▶뉴욕에서 모자 장사를 해서 대박을 쳤다. 당시에 백인은 금발이 찰랑이니 모자를 쓰지 않고 흑인들이 많이 썼다. 그런데 난 백인 동네에 모자 가게를 냈다. 사람들이 다 미쳤다고 했지만 <인디아나존스> 영화를 보면서 백인도 가능할 거란 예감이 들었다. 미국에서 제일 큰 모자 회사에 찾아가서 인디아나존스 햇(Hat)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걸로 대히트를 쳤다. 미국 롱아일랜드의 판권을 받았다. 백인들은 평소에 모자를 잘 안 써서 어떻게 써야 할지를 몰랐다. 이 동네에서 제일 멋쟁이가 누구냐고 묻고는 그 친구한테 모자를 선물하면서 주말에 클럽에 가서 그 모자를 쓰고 춤을 추라고 약속했다. 그 뒤로 다들 줄을 섰다. 그때 내 이름이 햇(Hat)고로 불렸다.

브로드웨이 37번가에 ‘케빈’이라는 상호의 의류 가게도 냈다. 여성의류 도매였다. 메이시스 백화점앞을 지나는데 뚱뚱한 백인이 쇼윈도를 보고 있더라. 백인 마네킹이 최신 유행 옷을 입고 서 있었다. 뚱뚱한 사람도 멋있게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들자는 생각으로 빅사이즈 디자인을 해서 또 한번 히트를 쳤다. 내년 봄에 무엇이 유행할지 예측하고 만드는 데 선수였다. 한두 시즌 전에 유럽을 가서 패션쇼를 보고 트렌드를 잡아내는 감이 발달한 편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어떤 게 팔릴지에 대해 캐치를 잘했다. 그런 능력을 예술의 전당에 와서도 발휘했다. 예술의 전당의 관객이 230만 명이었는데 300만 명까지 도달했다. 흥행에 성공한 셈이다.

- 우리나라의 드라마와 케이팝에서 한류 붐이 뜨겁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과거 예술이라는 말에는 배고픔이 포함되었고, 예술가들 사이에서는 그것이 당연한 듯 받아들여졌지만 지금은 예술과 문화가 돈이 되는 세상이다. 케이팝의 한류 열풍은 대한민국 역사상 획기적인 사건이라 생각한다.
BTS를 비롯해 여러 한류 스타일이 전 세계에 유행하며 외국 사람들이 한국산 물건을 사고 한국에 오게 만드는 엄청난 파급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가장 경쟁력 있는 인간의 직업이 예술가라는 예측이 나온다
▶앞으로 사람이 머리로 하는 일은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있지만 사람이 가슴으로 하는 일은 대체 불가하다 생각한다. 지금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순서로 문화가 맨 마지막에 붙어 있지만 앞으로는 문화가 맨 앞에 서야 되는 시대가 분명 올 것이다.
▲고학찬 예술의전당 사장이 고슴도치 딜레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사진=더리더

- 예술의 전당의 발전 방향에 대해 6년간의 경험을 토대로 말해준다면
▶예술의 전당은 문턱을 낮추어 사회계층에 관계없이 모두가 편안히 찾을 수 있는 공간으로 역할을 늘려야 한다. 대관이 너무 많다는 약점은 자체 제작을 30% 이상으로 끌어올려 극복해야 한다. 지금은 20% 정도 자체 제작을 하는데 이걸 30% 끌어올려야 한다. 특히 상주 단체와 긴밀하게 기획부터 홍보 마케팅까지 협의하는 게 당면과제다.

-최근 관람한 공연이나 전시 중 하나를 추천해달라
▶<치바이스와의 대화>전을 추천하고 싶다. 한중 국가예술교류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이번 전시에는 치바이스의 걸작 80여 점을 포함해 중국 문인화의 거두 팔대산인의 작품 7점, 오창석 14점, 인물 조각으로 유명한 우웨이산(現 중국국가미술관장)의 조소 8점 등 총 116점의 걸작들이 국내 최초로 소개됐다. 중장기적인 한중 예술 교류의 발판을 마련했다.
교환 전시로 5월 <추사 김정희와 청조 문인의 대화>전이 중국 국가미술관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꼭 한번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을 방문해 감상해보시길 추천드린다.

-퇴임 후 계획은
▶스물다섯 가지 직업을 가지고 살았던 거리로 나갈 것이다. 예전에도 그랬듯 가보지 않은 거리로 가는 거다. 상당히 기대가 된다.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게 될까.
내가 47년생(73) 돼지띠다. 올해가 돼지의 해인 만큼 좋은 일이 있을 것 같다.

△1947년 제주 △대광고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TBC(동양방송) 프로듀서 △(주)제일기획 Q채널 제작1부 국장 △삼성영상사업단 방송본부 국장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겸임교수 △윤당아트홀 관장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문화분과위원장 △제주국제대학교 실용예술학부 석좌교수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장 △2013년 3월 예술의 전당 사장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2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yunis@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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