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군도 감탄한 박서와 김경손의 리더십

한국사에서 읽는 리더십과 신뢰

우리역사문화연구소 김용만 소장 2019.01.11 09:56 카카오톡 네이버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인류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가졌던 몽골제국의 힘은 너무나 막강했다. 1231년 이후 고려는 약 40년간 몽골의 침략에 시달렸다. 하지만 고려가 무기력하게 몽골군에게 당한 것만은 아니었다. 몽골군도 어쩌지 못한 고려의 명장 박서와 김경손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1231년 귀주성 전투의 영웅 박서와 김경손은 어떻게 강력한 몽골군의 공격을 막아냈을까? 그들은 어떤 리더십을 갖고 있었을까를 알아보자.

서북면 병마사 박서 몽골군과 만나다
박서는 1202년 신라부흥운동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 박인석(1143~1212)의 7남 3 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박인석은 호부 상서까지 지낸 문반관료이기는 했지만, 말타기와 활쏘기도 잘해 호걸다운 면모를 갖고 있었다. 박서 역시 아버지를 닮아 도량이 크고 무예에도 능한 문무를 겸비한 인물 이었다. 그는 여러 지역의 지방관을 역임한 후, 1231년에는 3품직인 서북면 병마사의 직책을 맡아 귀주(龜州, 평북 구성시)에서 군사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1231년 8월 초 살리타이(撒禮塔)를 원수로한 몽골군 3만이 고려를 침범해왔다. 귀주는 1019년 강감찬 장군이 거란군 10만을 대파했던 군사적 요충지였다. 고려에 쳐들어온 몽골군은 순식간에 고려의 여러 지역을 유린했다. 거센 몽골군의 공격을 당해내지 못한 정주(靜州)를 비롯한 주변 지역의 장수들과 군사들이 박서 장군이 주둔하고 있던 귀주로 피신해왔다. 몽골군은 군사를 나누어 일부는 고려의 수도 개경으로 진격하고, 일부는 귀주성을 공격해왔다. 9월 2일 몽골군 1만이 귀주성을 사면에서 포위하고 항복을 권유했다. 귀주성 군사는 5천에 불과했지만, 박서는 단호하게 항복을 거절했다. 몽골군은 고려 위주부사 박문창을 생포 하자, 그에게 귀주성으로 돌아가서 박서에게 항복을 권유하라고 시켰다. 거듭된 항복 권유를 받자, 박서는 즉시 박문창의 목을 베어 몽골군 진영에 보냈다. 굳이 그를 죽여 보낸 것은, 몽골군의 위세에 쫓겨 귀주 성으로 도망친 사람들에게 죽기 살기로 싸울 수밖에 없다는 전투의지를 고취시키는 행동이었다. 또한 몽골군에게 얕잡히지 않기 위한 행동이었다.

귀주 1차 전투
몽골군이 공격을 감행해오자, 박서는 군사를 3방면으로 나누어 김중온으로 하여금 성의 동편을, 김경손으로 하여금 성의 남면을 방어하게 하고, 자신은 직접 북문 수비를 지휘했다. 몽골이 정예 기병 300명으로 북문을 공격해오자, 박서는 즉시 이들을 격퇴했다.

몽골군은 공성용 수레인 누차와 큰 나무 상자를 만들어 쇠가죽으로 겉을 싼 뒤, 그 속에 군사를 감추고 성벽 아래로 접근하여 굴을 뚫기 시작했다. 성벽 밑을 통과해 공격 해오려는 것이었다. 그러자 박서는 성벽에 구멍을 파서 쇳물을 부어서 누차를 불태우자, 땅도 꺼져버려 몽골군 30여 명이 압사 했다. 또 썩은 이엉을 태워 나무 상자를 불사르자 몽골군이 퇴각했다.

몽골군이 다시 돌을 날려 보낼 수 있는 거대한 포차 15문으로 남문을 포격했다. 그러자 박서는 무너진 성벽을 즉시 보수하고, 성안에 있는 포차로 돌을 날려 반격했다. 몽골군은 섶에다 사람의 기름을 적시어 잔뜩 쌓아놓고 불을 질러 성을 공격했다. 박서가 물을 뿌리니 불이 더욱 세차게 타올랐다.

그러자 박서는 즉시 진흙을 가져오게 해서 물에 섞어 던져 불을 껐다. 적이 수레에 지푸라기 더미를 담아 불을 지른 후, 수레를 밀어 성문을 불태워버리려는 공격을 하자, 성문 문루 위에 미리 물을 저장해놓고 대비 하고 있다가 불을 껐다. 몽골군은 9월 3일 부터 10월 초순까지 30여 일간 온갖 계략을 써서 귀주성을 공격했지만, 박서는 번번이 적의 공격을 막아냈다. 다양한 방법으로 쳐들어오는 적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은 박서의 뛰어난 임기응변 능력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이 그를 믿고 함께 맞서 싸웠기 때문이다.

▲귀주성의 항쟁 장면 상상도 ‘오스프리 북 시리즈’에서 인용.
뛰어난 용장 김경손

귀주성 전투에서 박서와 더불어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은 김경손이다. 김경손은 용기와 사명감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1231 년 분견장군으로 몽골군이 정주(평북 의주) 에 침입해오자 힘써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자 사람들을 이끌고 귀주성으로 갔다. 9월 3일 전투 첫날, 몽골군의 무서움을 직접 겪어보았던 고려인들이 전투 의지를 상실하고 전투를 피하려고만 했다. 그러자 김경손은 12명의 용사와 여러 성의 별초를 거느리고 성 밖을 나가면서 군사들에게 명했다.

“너희들은 목숨을 돌보지 말고 죽어도 물러나지 않아야 한다.”

그러자 우별초들이 모두 땅에 엎드린 채 명령에 불응하자, 김경손은 그들을 성으로 돌려보낸 뒤, 12용사와 함께 나가 싸웠다. 그가 몽골군의 선봉인 검은 기를 들고 말을 탄 자를 쏘아 죽이자, 이를 계기로 12용사도 힘을 내 싸웠다. 적이 쏜 화살에 맞아 팔에서 피가 철철 흘렀지만, 김경손은 여전히 열심히 전투를 지휘했다. 여러 번 맞붙은 후, 몽골군이 퇴각하자 김경손이 성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박서는 하급자인 김경손을 향해 큰절을 하면서 맞이하며 울었다. 그러자 김경손도 마주 절하며 울었다. 박서는 용감한 김경손을 믿고, 성의 남쪽 방어를 전적으로 맡겼다. 김경손은 적군이 쏘아 보낸 큰 돌이 그의 머리 위를 스쳐갈 정도로, 적의 공세가 심해졌을 때도 자신의 자리를 굳게 지켰다. 부하들이 위험하다며 지휘 장소를 옮기자고 했지만, 김경손은 이렇게 말했다.

“안 된다. 내가 움직이면 군사들 마음이 흔들릴 것이다.”

그는 태연한 얼굴빛으로 끝내 자신의 자리에서 성을 방어했다. 몽골군이 풀과 나무를 실은 수레를 굴리며 몸을 피해가며 성 앞까지 다가와 공격해오자, 김경손은 포차를 이용해 끓는 쇳물을 쏟아부어 수레에 실은 풀을 태워 몽골군을 도망가게 했다.

몽골군의 거듭된 공격을 막아내다
몽골군이 30일 동안 성을 포위한 채 온갖 방법으로 공격했지만, 박서와 김경손이 그때마다 적절히 대응하자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몽골군은 고려 서북변의 요지인 귀주성을 함락시키지 않고는 주력부대를 고려 깊숙이 보내 공격하는 것에 부담감을 가졌다. 그래서 다시금 고려에 들어온 몽골군을 몰고 와서 재차 공격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포차 30대로 한 번에 돌을 마구 쏟아부었다. 성벽이 많이 무너졌지만, 박서가 성벽을 즉시 수리하고 쇠고리줄로 얽어 놓았더니 몽골 군사가 다시 공격하지 못했 다. 또 박서는 성 밖으로 출동하여 적을 공격해 크게 이겼다. 포차 공격을 받으면 다시 포차로 반격해 적군을 무수히 죽였다.

결국 몽골군은 퇴각해 도리어 목책을 세우고 수비해야 했다. 그의 활약으로 11월 초순까지 20여 일간 몽골군의 공격을 또다시 막아낼 수 있었다.

11월 22일부터 12월 17일까지 몽골군은 포차를 앞세워 세 번째로 공세를 가해왔다. 하지만 이마저도 고려군의 강한 반격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적장 살리타이는 공격이 여의치 않자 고려인을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특히 당시 몽골과의 정전 협정을 주관 하던 고려의 왕족인 왕정이 쓴 글을 보냈 다. 하지만 박서는 왕명이 아니라는 이유로 항복하지 않았다.

그러자 살리타이는 12월 하순부터 다음 해 1월 초까지 몽골군을 일시에 동원해 다섯 차례 귀주성을 공격했다. 몽골군이 운제를 이용해 성벽을 넘으려 하면, 고려군은 대우 포(大于浦)로 맞받아 공격해 모조리 분쇄하여 사다리가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대우포는 커다란 날이 달려 나무로 만든 사다리를 베어버릴 수 있는 신무기였다. 이처럼 박서는 몽골군을 끝까지 막아냈다.

▲귀주성 전투 상황도. 문화컨텐츠닷컴에서 인용
몽골군도 감탄한 귀주성의 항쟁
귀주성을 포위하던 몽골군 장수 가운데 나이가 70이 된 사람이 있었다. 그가 귀주성을 돌아보고서 이렇게 감탄하며 말했다.

“내가 성인이 되어 종군하면서 무수한 성을 공격해봤지만, 이처럼 맹렬하고 오랜 공격을 버티며 끝내 항복하지 않은 경우는 보지 못했다. 성안에 있는 장수들은 훗날 반드시 모두 장군이나 재상이 될 것이다.”

박서가 귀주를 잘 지켜내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몽골군을 물러가게 할 수는 없었다. 고려 정부는 몽골의 강대함을 절감하고 항쟁을 포기하고 화친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박서가 지키는 귀주성만은 끝까지 항전을 계속했다. 그러자 몽골군은 귀주성이 항복하지 않음을 들어 고려와 화의를 거절했다. 다급해진 것은 고려였다. 고려정부는 감찰 어사 민희 등을 시켜 4~5차례에 걸쳐 거듭 박서에게 귀주성에서 나와 항복하라고 설득했다. 결국 박서는 왕명을 거역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비록 항복했지만, 박서는 몽골 원정군의 1/3이 넘는 병력을 무려 4개월이나 귀주성에 붙잡 아둠으로써, 몽골군의 작전 전체에 차질을 빚게 했다. 이로 인해 몽골군이 서둘러 화의를 하고 철수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박서와 김경손의 상반된 생과 사
몽골은 고려의 완전한 항복을 받지 않고, 화의 형태로 서둘러 전쟁을 마무리했다. 그런데 몽골 사신이 고려에 와서 박서가 성을 굳게 지키며 항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고려 최고 권력자 최이(崔怡)는 개경으로 돌아온 박서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라에 대한 그대의 충절은 비할 데가 없으나 몽골의 말도 두려워할 만한 것이다. 경은 잘 생각해 처신하라.”

최이는 박서를 아꼈지만, 몽골이 두려워 그에게 벼슬을 높여주거나 장군으로 고려군을 지휘하게 할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1232년 3월 박서는 서북면 병마사에서 해임되어 고향인 죽주로 낙향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몽골과의 전투에서 가장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포상을 받지 못했다. 그는 뒤에 정2품 문하평장사에 임명되기는 했지만, 별다른 업적을 남길 수 없었다.

김경손은 개경으로 돌아와 종3품 대장군으로 승진했다. 김경손은 1237년 전라도 지휘사가 되었다. 이때 이연년 형제가 여러 군의 무리를 모아 반란군을 일으켜, 나주성을 공격해왔다. 김경손은 관군의 수가 적으 니, 맞서 싸우지 말라는 부하들의 말을 꾸짖고 직접 성 밖에 나가 싸웠다. 반군 지도자 이연년도 귀주전투의 명장 김경손을 존경하여 부하들에게 그에게 활을 쏘지 못하게 했다. 전투가 시작되자 김경손은 이연년을 죽이고, 반군을 진압했다. 김경손의 명성이 자꾸 높아지자, 질투하는 자들의 모함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최이가 사실을 조사해 그를 보호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1249년 최이의 아들 최항은 김경손을 시기해 그를 백령도로 유배 보내고, 얼마 후에는 김경손을 바다에 던져 죽여버렸다.

두 사람은 비록 당대에는 살아서는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지만, 그들의 업적은 후손들 에게 길이 기억되었다. 1298년 충선왕은 박서의 내외손에게 관직을 제수하여 충신의 업적을 기억했다. 또 1703년 조선에서 귀주성 남쪽에 박서와 김경손의 충정을 기리는 사당과 사적비를 세웠다.

<동사강목>의 저자 안정복(1712~1719)은 박서와 김경손을 이렇게 평가했다.

“외로운 성, 약한 군사로 천하의 사납고 강성한 오랑캐를 맞아 적을 내려오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국가를 산악처럼 우뚝 서게 했다. 우리나라에서 성을 잘 지킨 것은 안시성 이후 또 귀주가 있으니, 박서와 김경손의 공은 진실로 크다 하지 않을 수 없도다.”

▲충북 음성군에 위치한 박서 장군묘
박서와 김경손이 보여준 장수의 리더십

전쟁에서 용감하게 싸우고, 지혜를 발휘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지휘관이 많다. 하지만 자신감을 잃은 사람들의 마음을 용기로 바꿔줄 수 있는 리더들은 흔하지 않다. 박서와 김경손은 원칙을 철저하게 지키고, 자신이 해야 할 바를 끝까지 성실하게 수행한 장수들이었다.

박서는 자신보다 하급자인 김경손에게 큰 절을 할 만큼, 능력을 발휘한 자들을 존중해주었다. 그는 맹장 (猛將) 김경손을 믿고 존중했고, 김경손은 지장(智將) 박서를 믿고 따랐다. 김경손은 결사대를 조직해 출전할 때 억지로 사람들을 끌고 가지 않았다. 자신이 솔선수범해서 용기를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의 믿음을 얻었다. 지혜와 용기를 갖추고 솔선수범하며, 원칙을 지키고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기 때문에 그들은 부하들과 백성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아 귀주성을 굳게 지킬 수 있었다.

탁월한 지도자가 2사람이나 버티고 있는 귀주성은 최강의 몽골군이라고 해도 이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고려가 세계제국을 건설한 몽골군의 침략을 받았음에도 나라의 존립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귀주성에서 보여준 고려인의 강인함이 하나의 원인 이었다. 적들로부터 존경을 받은 탁월한 장군이었던 박서와 김경손은 우리 역사에서 꼭 기억해주어야 할 탁월한 인물들이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1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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