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전당 전시, 한층 더 강렬해진 치바이스와의 만남

한국에술종합학교 조인수 교수 2019.01.03 11:05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네이버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치바이스 전시 view/사진=예술의 전당 제공

치바이스가 돌아왔다. 어느 소설의 제목처럼. 누군가는 궁금해할 것이다. ‘거의 1년 사이에 또? 왜?’ 발레 <호두까기인형>은 매년 연말을 장식하고, 리메이크 영화는 흥행 기록을 새롭게 갈아치우지 않는가? 입장료는 걱정 마시라. 치바이스는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하게 변신해서 돌아왔으니.
이번에는 선배와 후배까지 데리고서 말이다.
<같고도 다른: 치바이스와 대화> 2018.12.5(수) - 2.17(일) 서울서예박물관

치바이스(齐白石)는 제백석(1864~1957)으로 널리 알려진 중국 화가의 현지 발음이다. 마오쩌둥(毛泽东)이 모택동이고 저우 룬파(周润发)가 주윤발인 것과 마찬가지다. 여하튼 한 화가의 블록버스터 전시회를 두 해 연거푸 여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그래서일까, 지난번 전시는 한중 수교 25주년 기념 특별전이었고 이번 전시는 예술의 전당 개관 30주년 기념 특별전이라는 수식이 붙는다. 전시기획자 입장 에서는 이러한 핑계를 대서라도 기회가 있을 때 좋은 전시는 반드시 하고 싶은 법이다.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하지 않겠는가. 서울에서 두 번째 치바이스 전시가 개막했을 무렵, 일본의 도쿄국립박물관에서도 ‘일중평화우호조약(日中平和友好條約) 체결 40주년 기념 특별전시’라는 명분으로 치바이스 전시를 열고 있었다. 왜 이런 난리법석일까?

치바이스는 생전에는 ‘인민예술가’라는 칭호를 수여받는 영광을 누렸고, 죽어서는 미술시장에서 천억원대가 넘는 최고가를 기록하는 블루칩 작가가 되었다. 최후의 문인화가로 추앙받기도 한다. 그의 고향이 마오쩌둥과 같았고 목공예품을 만들던 노동자 출신으로서 사회주의 이념에 맞았기에 그의 명성에는 다소 거품이 있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호박에 줄을 긋는다고 수박이 되지 않듯, 그는 예술성이 지극히 높은 그림을 척척 그려냈기 때문에 위대한 거장이라고 평가받는다. 한마디로 그림이 좋다는 것이다.

천재적인 창작의 배경에는 신비한 영감이 있게 마련인데, 그것은 그냥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승으로부터 또는 과거의 명작으로부터 얻는 것이다. 치바이스의 경우에도 두 사람의 중요한 선생이 있었다.
첫째 스승은 명말청초(明末清初)라는 혼돈의 시대를 살았던 팔대산인 (八大山人)이다. 그의 본명은 주탑(朱耷)인데 명나라 왕족 출신으로 열아홉 나이에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우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신분을 숨기고 승려가 되었다. 워낙 총명했던 그였기에 다른 승려들이 줄을 서서 따랐고 참신한 그림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종교와 예술도 팔대산인의 분열된 자아를 구하지는 못했는지 오십대 중반에 돌연 미쳐버려 갑자기 울다가 웃다가를 반복하고 결국 환속(還俗)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팔대산인은 온갖 기이한 행동을 하면서도 독창적인 그림을 그렸다. 이번 전시에는 그의 귀한 작품 일곱 점이 걸려 있는데 불만에 가득 차서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물고기와 새를 만나볼 수 있다. 오직 검은 먹으로만 그린 연꽃이나 바위를 보면 300년 전의 그림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활달하고 현대적이다. 치바이스는 일찍부터 팔대산인에 흠뻑 빠져들어 해학적인 물고기나 새를 능숙한 필치로 표현했다.

치바이스의 두 번째 모델은 오창석(吴昌 硕)이다. 치바이스가 열심히 모방한 팔대 산인의 시니컬하고 초탈한 화풍은 한편으로는 심각하고 단순해서 사람들에게 별 인기가 없었다. 치바이스가 그 대안으로 찾아낸 것은 화려한 색채 대비와 과감한 구성으로 강렬한 인상을 주는 오창석 스타일이다.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에서 사군자 중 하나인 국화, 그리고 탐스러운 조롱박까지 알록달록한 색깔로 풍성하게 그렸다. 자고로 꽃 그림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는 데다, 문기가 철철 흘러넘치는 서예까지 곁들였으니 집 안을 장식하거나 남에게 줄 선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치바이스의 꽃 그림은 인기가 치솟아 일본에서 열린 전시회에서는 함께 참여한 다른 화가들을 제치고 완판을 기록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오창석과 사이가 벌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는데, 치바이스가 그를 스승으로 부르지는 않았다. 이때도 샘플링과 표절의 차이는 애매했던 모양이다. 전시장에 나란히 걸린 두 사람의 그림을 비교해보고 각자 판단하기 바란다.

팔대산인과 오창석 코너를 지나 다음 전시실로 가면 한편에는 치바이스의 물고기, 게, 새우 그림을 걸어놓았고 다른 한쪽에는 다양한 인물 군상이 기다리고 있다. 모두 상서로운 길상의 상징들이다. 예로부터 그림에서 물고기는 풍요로움을 상징하고, 게는 장원급제를 기원하며, 새우는 무병장수를 나타냈다. 모두 해당 한자와 같은 발음을 지닌 좋은 뜻의 글자와 연관 지은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치바이스의 그림은 효험이 더 뛰어나다고 여겼는지 주문이 쇄도했고 손님들이 시도 때도 없이 집으로 찾아와서 결국은 대문을 걸어 잠그고 고객을 가려서 맞아야만 했다고 한다. 요즈음 소문난 맛집은 힘들게 예약하고 줄 서서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것처럼 치바이스의 그림도 어렵사리 얻는 귀한 물건이었던 셈이다.

인물 그림은 불교, 도교의 유명한 사람들이지만 마치 옆집 아저씨 같은 풍모를 보여준다. 남부순환로에서 보이는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외벽의 현수막 광고 속 부랑자 같은 사람은 그래 보여도 신통술을 부리는 도교 신선이고, 서울서예박물관 외벽에 붙은 관복 입은 이는 부도옹(不 倒翁)으로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오뚝이 할아버지로서 역시 사람들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존재다. 이처럼 치바이스는 서민들의 건강한 믿음을 중시하고 이를 화폭에 진솔하게 옮겼다. 그러니 잘 팔릴 수밖에 없었고 말년에는 한 해에 수백 장씩 그려댔지만 달인의 손끝에서 나온 그림이라 하나같이 명품이었다.

전시를 꾸미는 큐레이터는 악단의 지휘자와 같은 존재다. 같은 작품도 어떻게 연출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로 나타난다. 이번 전시에서 필자가 가장 놀라고 또 마음에 들었던 방은 치바이스의 벌레 그림을 모아놓은 곳이다. 벌레라고 하면 징그러우니 옛날식으로 초충(草蟲)이라고 하자. 초충도가 열 점 남짓씩 포함된 화첩 세 권을 아코디언처럼 주름이 잡힌 커다란 판 세 개에 하나하나씩 낱장으로 붙였다. 오창석 스타일을 따른 꽃과 풀에 곤충 한 마리씩을 정교하게 그려 넣었는데, 나비, 잠자리, 매미, 방아깨비, 사마귀, 땅강아지, 파리 등을 볼 수 있다. 세밀화보다 더 섬세한 극사실의 묘사다. 호주머니 사정에 여유가 있다면 이렇게 작고 앙증맞은 것들을 빼놓지 않고 확대해서 수록한 전시 도록을 한 권씩 사야 할 것이다. 한 가지 더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은 각각의 화첩을 치바이스가 58세와 77세, 그리고 무려 85세에 그렸다는 점이다. 실로 지독한 늙은이다.
마지막 방은 산수화다. 동아시아 전통회화의 주류는 산수화였던 만큼 치바이스 역시 자신만의 방식으로 산수를 그렸다. 방금 숨죽여 살펴본 초충도와는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현미경에서 파노라마로, 마이크로에서 매크로의 전환이다. 그림에는 산이 있고 물이 있고 나무가 있을 뿐인 데, 화가는 광활한 대자연을 신비한 소우주로 응축시켜놓았다. 1년 전에 치바이스의 산수화 열두 폭 병풍이 경매에서 1500억원에 낙찰되어 신기록을 세웠는데 딱 이런 모습의 그림이었다.
▲우웨이산이 조각한 치바이스(2012), 중국조소연구원 소장/사진=예술의 전당 제공

이번 전시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는 치바이스를 존경하고 따르는 후배들의 작품이다. 다섯 명의 쟁쟁한 미술가가 함께 참여했는데 첫 번째 도입부 전시실은 이들이 치바이스에게 바치는 헌사이고 오마주다. 하나하나가 교과서에 나오는 작품이지만 모두 설명할 수는 없고 제일 연배가 어리지만 이 전시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사람인 우웨이산(吴为山)을 소개하겠다. 치바이스를 비롯해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은 모두 중국 국가미술관의 소장품이다. 여기는 한국으로 치면 국립현대미술관에 해당하는 곳으로 중국에서 가장 권위가 있는 미술관이다. 우웨이산은 바로 이곳의 관장이고, 동시에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中国人民政治协商会 议)의 상무위원이기도 하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리고 훌륭한 조각가라는 것이다. 그의 대표적인 조각품은 2007년 남경대학살을 기억하는 기념관에 설치한 것이다. 남경에서 대학 시절을 보내며 비극적인 사건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우웨이산은 12미터에 달하는 모자상을 시작으로 21명의 고통 받는 중국 인민을 숭고하게 표현했다.
예술이 재앙을 치유하고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다. 일찍부터 치바이스를 존경했던 우웨이산은 꿈속 에서 노대가를 만날 정도로 심혈을 기울여 치바이스 초상 조각을 많이 제작했는데 전시장 곳곳에는 크고 작은 일곱 점의 작품이 놓여 있다. 이 전시에서 우웨이산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것은 또 하나의 행운이다.

마지막으로 치바이스의 그림을 어딘가에서 본 듯한 느낌이 든다면 당신은 미술을 꽤나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는 기시감, 데자뷔, 도플갱어라고도 하는 현상인데 이름을 대면 금방 알만한 여러 명의 한국화가 들이 치바이스로부터 영감을 받았고 그의 작품을 꽤나 열심히 참고했다. 그만큼 치바 이스는 이미 우리 주변에 와 있었고, 이번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월간「예술의전당과 함께 Beautiful Life!」와 제휴를 통해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1월호에 실린기사입니다.  

yunis@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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