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지출 입법과 의회유보의 원칙

정재룡의 입법의 현장

국회 교육위원회 정재룡 수석전문위원 2019.01.03 18:04 카카오톡 네이버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국회 교육위원회 수석전문위원
「국가재정법」에 따라 정부는 예산안과 함께 국가재정 운용계획을 국회에 제출할 때 재정지출을 의무지출과 재량지출로 구분 하고 의무지출의 증가율과 산출내역을 포함하고 있다. 여기서 의무지출 이란 재정지출 중 법률에 따라 지출의무가 발생하고 법령에 따라 지출규 모가 결정되는 법정지출 및 이자지출을 말한다.

재량지출은 예산의 편성 및 심의과정에서 재량적인 의사결정에 따라 지출여부와 지출규모가 정해지는 반면, 의무지출은 법령에 의해 이미 지출 의무와 지출대상 및 지출단가가 규정되어 있어 사회통계적인 추정(인구 증가율, 물가상승률 등)으로 지출규모가 산출된다. 따라서 재정지출을 의무지출과 재량지출로 구분하고 그 특성에 따라 지출규모를 각각 추계 하는 것이 보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하겠다. 특히 우리나라는 의무지출을 중심으로 재정지출이 확대되어가고 있는 추세이므로 의무지출을 재량지출과 별개로 추계하여 그 증가속도와 규모를 관리할 필요성이 있다.

2018년 예산(특별회계와 기금 포함) 기준으로 우리나라 총 재정지출 428.8조원 중 의무지출은 216.9조원(50.6%)이고 재량지출은 211.9조 원(49.4%)이다. 의무지출 중에서 이자지출 16.0조원(7.4%)을 제외한 법정지출은 200.9조원(92.6%)인데, 그 내역은 지방이전재원 99.4조원 (45.8%), 복지 95.7조원(44.1%), 기타 5.8조원(2.7%)이다. 의무지출의 특성에 가장 부합하는 분야는 복지이지만, 우리나라 의무지출 중에는 지방 이전재원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서 총 재정지출 중 복지의 비중은 22.3%에 머무르고 있다. 

반면, 미국의 연방예산에서 우리나라의 의무지 출로 볼 수 있는 것은 직접지출(direct spending)인데, 그 비중은 연방예산에서 2/3 정도이고 이 직접지출 중에서 복지분야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에 따를 경우 복지지출의 비중에서 우리나라와 미국 사이에 차이가 큰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차이는 기본적으로 복지분야의 기준과 범위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겠지만 미국은 복지지출로 볼 수 있는 것을 모두 직접지출로 규율하고 있는 반면에, 우리나라는 실제 복지지출의 비중이 아직 낮을 뿐만 아니라 법적으로 의무화되지 않아 의무지출에 포함되지 않고 재량지출로 분류되는 복지지출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복지분야 의무지출 예산이라도 대부분 지출대상, 지출단가 등 중요사항이 하위법령에 위임되어 있어서 직접적으로 법률의 규정에 따라 지출규모가 추계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복지분야의 대표적 법률인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은 수급자의 선정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인 부양의무자 기준을 시행령에서 정하도록 위임하고 있고, 지출대상 및 지출단가의 주요내용이 법률에 규정되어 있어서 입법과 정을 통한 의무지출 예산편성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는 「기초연금법」도 연금수급자의 선정기준이 되는 소득인정액을 보건복지부장관이 결정하도록 하고 있다. 「한 부모가족지원법」은 복지급여의 기준을 여성가족부장관이 정하도록 하여 지출규모 결정에 아예 재량을 허용하고 있다. 의무지출 관련 하위법령도 그 규정을 준수하여 예산이 편성되기보다는 먼저 예산이 편성된 후 편성된 예산에 맞추어 법령이 개정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입법과정이 아니라 예산과정을 통하여 의무지출 예산을 변경하는 것은 의무지출의 특성을 고려하여 의무 지출을 별도로 구분하여 관리하려는 「국가 재정법」의 취지를 무색케 하는 것이다. 반면, 미국에서 복지지출은 모두 법률에 지출 대상, 지출단가 등이 규정되어 있어서 매년 복지지출은 예산과정을 거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법률의 규정에 따라 추계된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이를 직접지출 (direct spending)이라 부른다. 국가의 정책은 법률에 규정될수록 예측가능성, 민주적 정당성 및 법적 안정성이 높아진다. 우리가 법치주의를 중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가재정법」의 취지에 충실하고 의무지출 관리의 정책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의무지출의 규모는 법률의 제·개정이라는 입법과정을 통해서 결정되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의무지출 입법에서 법률에 단지 지출의무만 규정해서는 안 되고 지출 규모를 결정하는 지출대상과 지출단가도 규정해야 한다.

의무지출 입법에서 지출대상과 지출단가를 법률에 직접 규정해야 하는 이유는 그 사항들이 중요사항이기 때문이다. 특히, 의무지출 입법은 사회적 기본권의 실현과 관련된 분야에서 대부분 요구되고 있는데, 여기에는 의회유보의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 국민의 헌법상 기본권 및 기본의무와 관련된 중요한 사항 내지 본질적인 내용에 대한 정책 형성 기능만큼은 주권자인 국민에 의하여 선출된 대표자들로 구성되는 입법부가 담당하여 법률의 형식으로써 수행해야 하지, 행정부나 사법부에 그 기능을 넘겨서는 안 된다. 

최근 의원입법의 활성화로 바야흐로 국회입법의 시대가 도래 하여 종래 하위법령에 위임하여오던 사항들 중에 중요성이 별로 높지 않은 사항까지도 법률에 상향규정하는 것이 일반적 경향 인데, 의무지출 입법에서만 여전히 중요사항을 하위법령에 위임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일각에서는 의무지출 입법에서 중요 사항을 법률에 규정하게 되면 행정부의 예산편성권을 침해하고 재정운용의 탄력성을 저해할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행정부의 예산편성권이 국회의 입법권보다 우위에 있는 것은 아니다. 행정부는 법률의 규정을 준수하여 예산을 편성해야 하는 구속을 갖는다. 이것은 법치주의 원칙상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이와 관련 하여 헌법상 명시적 규정은 없지만 헌법 제 54조에서 준예산 제도를 규정하면서 준예산으로 집행할 수 있는 경비의 하나로 “법 률상 지출의무의 이행”을 규정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그 함축적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재정운용의 탄력성도 국민의 사회적 기본권의 실현보다 우선시될 수는 없다. 예산은 헌법에 구속되는 성격을 가지기 때문에 예산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회적 기본권의 법적 권리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의무지출 입법의 중요사항을 법률에 직접 규정하게 되면 적어도 의무지출에 관한 한국회는 연중 내내 깊이 있는 예산심사를 수행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도 의의가 크다. 행정부는 여전히 의무지출을 포함한 예산 안을 9월 초에 제출하겠지만 이와 상관없이 국회 상임위원회는 연중 내내 의무지출 입법과정에서 예산을 심사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행정부는 국회의 의무지출 입법을 반영하여 예산편성작업을 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행정부에 비해 예산심사기간의 제약으로 미약했던 국회의 예산권한은 크게 강화되고 의무지출에 관한 한 국회가 실질적으로 예산편성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행정부가 9월 초에 예산안을 제출하면 국회는 의무지출 예산은 추계의 정확성만 확인하면 되고 그 외 시간은 모두 재량지출 예산의 심사에 할애할 수 있다. 매년 국회의 예산심사는 막판에 시간에 쫓기곤 하는데, 의무지출에 관한 한 미리 입법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그런 문제도 완화될 수 있다. 

또한, 국회는 의무지출 입법에서 각사업의 구체적 집행방법에 관한 사항도 규정할 수 있는데, 이 경우 행정부는 이를 준수하여 예산을 집행하게 될 것이므로 예산 집행에서 국회의 의사가 보다 존중되는 효과도 예상할 수 있다. 국회 내에서도 의무 지출 예산의 결정권한이 예결위원회에서 상임위원회로 이전되면서 양자 간 권한과 역할의 재조정이 필요할 것이다. 이 경우 예결위원회는 의무지출 입법의 양산을 방지하기 위하여 의무지출에 관한 분야별 재원배분한도를 설정하여 각 상임위원회가 그 한도를 준수하도록 요구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결국 국회가 의무지출 입법에 의회유보의 원칙을 확립하게 되면 예산안의 편성·심사 및 집행의 합리화를 도모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1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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