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돼지해’ 우리가 정치권 ‘핵인싸’

머니투데이 더리더 편승민 기자 2019.01.03 10:52 카카오톡 네이버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2019년 황금돼지해를 10여일 앞둔 2018년 12월 14일 충남 청양군 운곡면 송조농원에서 태양이 떠오르고 있다./사진=머니투데이 김창현 기자
2019년 기해년(己亥年)이 밝았다. 땅을 의미하는 기(己)는 오행(청적황백흑) 중 황(黃 누를 황)에 해당되어 황금색을 뜻하며, 해(亥)는 십이지간 중 돼지를 말한다. 기해년은 60년 만에 오는 ‘황금 돼지의 해’다. 전통적으로 돼지는 부를 상징하는 동물이어서 돼지띠들은 재물복이 넘치고 팔자가 좋다고 여겨진다. 또한 자신의 12간지와 일치하는 해에는 그해 운세가 좋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2019년을 ‘나의 해’로 만들 돼지띠 정치인들은 누가 있을까? <더리더> 1월 신년 특집에서는 올해 활약이 기대되는 ‘돼지띠 정치인’을 찾아봤다.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가 2018년 10월 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당대표회의실에서 취임 한달을 맞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사진=머니투데이 이동훈 기자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 (1947년 11월 22일생)

YS(故 김영삼 전 대통 령) 키즈의 일원으로 1993년 경기도 광명을 보궐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면서 정계에 발을 들였다. 4선(14·15·16·18대) 국회의원과 최연소 보건복지부 장관, 경기도지사, 민주당 대표 등 요직을 모두 거친 거물 정치인이다.
2007년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지지를 받아 대통합민주신당에 입당해 17대 대선 경선에 도전했지만 정동영 후보에게 패했다. 2012년 18대 대선에서 ‘저녁이 있는 삶’ 구호를 내세우며 민주통합당 대선후보에 도전했지만 문재인 후보에게 패하고 낙선했다. 
2014년 7.30 경기 수원병 재보궐선거에서 낙마 후 정계은퇴를 선언하며 돌연 전남 강진 토굴에서 칩거했다. 이후 2016년 20대 총선 당시 더불어민주당이 선거 지원을 요청했으나 본인은 은퇴 약속과 원칙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선거 지원을 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하지만 같은 해 10월 20일 “만덕산이 내려 가라고 한다”며 개헌론을 꺼내 들고 정계 복귀를 선언했다. 그로부터 4 일 뒤 최순실 태블릿 보도가 터지면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시작됐고 탄핵정국에 접어들었다.
2017년 국민주권개혁회의를 국민의당과 통합하면서 국민의당에 입당해 다시 한번 19대 대선 후보 경선에 참여했다. 그러나 광주·전남·제주 경선에서 안철수에 압도적으로 패배하면서 세 번째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이후 2018년 8월 8일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바른미래당 대표 출마 선언을 했고 9월 2일 27.02% 득표율로 당선됐다. 임기는 2020년 9월 1일까지다.
손 대표는 지금까지 세 번 대권에 도전했으나 모두 실패했고, 정치적 결단을 내릴 때마다 나라에 더 큰 일이 일어나 주목받지 못해 ‘불운의 아이콘’ 으로 불린다. 그는 당대표에 출마하면서 “정계개편의 중심에 설 것”이라고 했다. 사실상 바른미래당 대표는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대권으로 가는 티켓이다. 다방면에 풍부한 경험을 갖고 있는 손 대표는 늘 적합한 대통령감 1위를 차지했다. 여전히 잠룡으로 거론되고 있는 것도 그가 가진 가능성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돼지띠 해를 맞아 황금돼지의 기운으로 ‘손학규 징크스’를 깰 수 있는 한 해가 될 것인지 지켜봐야 한다.


심상정 정의당 의원/국회정치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1959년 2월 20일생)

남성 비율이 월등하게 높은 정치권에서 걸크러시의 대표주자로 거론되는 정치인이다. 서울대 사회교육학과 78학번인 그는 운동권이 남성 중심이던 시절 최초로 서울대 총여학생회를 만들고 초대 회장을 맡았다.
1980년 구로공단에 위장취업해 노조를 결성해 ‘구로동맹파업’을 주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1985년 ‘서울노동운동연합’ 창립에 함께했고, 1988년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결성에 조력했다. 1990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現 민주노총 전신)’ 창립 후 쟁의국장과 조직국장을 역임하며 명실상부 노동운동가로 입지를 굳혔다.
심 의원은 2004년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로 정계에 입문했다. 2007년 17대 대선에서 권영길, 노회찬과 당내 경선 2위로 결선 투표에 진출했으나 1위와 2%차로 패했다. 대선 후 기대 이하의 저조한 득표율로 당지도부가 사퇴하면서 민노당 비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민노당의 전면적 혁신을 제기했지만 당대회에서 혁신안이 부결됐고, 민노당은 분열과 갈등으로 분당됐다.
심상정 정의당 전 대표가 2017년 7월 13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3·4기 지도부 이취임식에서 이임사를 하고 있다. /사진=머니투데이 이동훈 기자
2008년 18대 총선에서 고양시 덕양구갑 진보신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한나라당 손범규 후보에 6% 뒤진 37% 득표율로 재선에 실패했다. 4년 뒤 2012년 19대 총선에서 다시 한번 고양시 덕양갑에 출마한 그는 ‘비정규직 정규직화’와 ‘보편적 복지’를 공약으로 내세웠고 새누리당 손범규 후보를 170 여표 차이로 앞서 당선됐다.
19대 총선이 끝나고 통합진보당은 내부 분열 및 부정경선 사태로 당대표 사퇴와 의원 탈당이 시작됐다. 탈당 의원들은 전국대회를 개최해 새진보정당추진회의를 결성 했고, 2012년 10월 7일 창당발기인대회에서 진보정의당 당명을 확정했다. 심 의원은 정의당 대선 후보로 18대 대선 출마를 선언 했지만 이후 야권 단일화를 위해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 지지를 선언하고 사퇴했다. 2015년 정의당 대표에 선출된 그는 2016년 20대 총선에서 진보정당 최초 3선 의원이 됐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탄핵정국과 조기대선을 치르면서 심 의원의 존재감은 어느 때보다도 빛을 발했다. 유일한 홍일점 후보이자 미약한 진보당 지지율에도 그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속 시원한 ‘돌직구’ 발언과 논리를 날카롭게 파고드는 ‘카리스마’로 토론회를 압도했다. 비록 대선에서 당선되지는 못했지만 6.2라는 숫자는 진보정당 역사상 최다 득표율로 그에게 무엇보다도 유의미한 결과였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그는 이제 내년 21대 총선을 준비 중이다. 한국정치사에서 양당 중심 정치에서 벗어나 다당제 아래에서 연정이 이뤄지는 정치구조 대전환을 만들겠다고 각오를 다지는 그에게 2019년은 또 다른 변곡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양승조 충남도지사(1959년 3월 21일생)
양승조 충남지사가 2018년 11월 22일 세종시 도담동 싱싱문화관에서 열린 충청권행정협의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뉴스1
양승조 충남도지사는 ‘소리 없이 강하다’는 말이 들어맞는 대표적인 ‘선비 정치인’이다. 그는 충청도 유학자 집안 출신이다. 상투머리에 갓을 쓰고 다녔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양 지사는 별명이 ‘선비’였다. 성균관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6전 7기 끝에 사법고시에 합격해 6년여 동안 변호사 활동을 하다 정계에 입문했다.
2004년 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충남 천안시갑에 열린우리당 후보로 출마해 처음 여의도에 입성한 뒤 그는 20대 국회까지 내리 4선에 성공한 중진이다. 2011년에는 손학규 당시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의 비서실장을 역임해서 이후에 손학규 계파로 분류되기도 했다. 때문에 한때 비(非)문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그는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시절 사무총장을 맡아 보좌했고, 대선에서는 문 대통령의 충남 승리를 견인해 다시 친문계로 분류된다. 이외에도 그는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 20대 국회 전반기 보건복지위원회 위원장 등 풍부한 경험을 갖고 있는 관록의 정치가다.
그가 6.13 지방선거 충남도지사 출마를 선언한 후 3월 5일,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성폭행 스캔들이 터지면서 민주당 출신 후보로서 선거에 악재가 발생하는 듯했다. 그러나 양 지사는 그 특유의 뚝심과 성실함으로 도지사 선거에 임했다. 그보다 정치적 경험이 많은 자유한국당 이인제 후보와 맞붙었던 그는 62.6%라는 압도적인 지지율로 당선됐다.
최근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민주당 약세인 충남에서 계속 의원직을 유지했는데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양 지사는 “성격상의 이유도 있고 애당심이 큰 것도 원인이지 않을까 한다”며 “내부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과제도 최고위원회의라든가 공개적으로 마이크에 대고 하게 되면 본인은 뜰지 모르지만 당의 지지율은 바로 까먹게 된다”고 말했다.
타고난 성품이 충청도 선비지만 그도 존재감을 드러내는 쎈(?) 발언으로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2013년 12월,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이 일었을 때 그는 최고위원회의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중정이라는 무기로 공안통치와 유신통치를 했지만 자신이 만든 무기에 의해 암살당하는 비극적 결과를 예상치는 못했을 것이다”라며 “박근혜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교훈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국정원을 무기로 신공안통치와 신유신통치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경고를 새겨들어야 한다”고 직격탄을 날린 바 있다.
그의 취미는 마라톤이다. 어려서부터 약했던 체력을 극복하기 위해 삼은 취미였다고 한다. 양 지사는 “달리기의 진정한 고수는 다른 주자의 페이스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자기 페이스와 계획을 일관되게 지켜나가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또 그의 저서인 <문재인의 사무총장>에서는 “마라토너로서 나는 문재인 대통령이 왜 등산과 트레킹의 매력에 빠졌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힘든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며 완주하거나 정상에 오르는 과정에서 마음을 새롭게 추스르고 다지며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양 지사의 묵묵하면서도 곧은 성향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민선7기 도지사 임기는 2022년까지고 이는 차기 대선 시기와도 맞물린 다. 양 지사가 충청대망론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지 이목이 집중되는 가운데 올 한해 그의 행보가 기대된다.


유시민 작가/노무현재단 이사장(1959년 7월 28일생)

1980년 유시민은 서울대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으로 학생운동의 선봉에 서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 후 1979년 10월 26일부터 1980년 5월 17일 전두환 중심의 신군부가 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하기 전까지 전국적으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던 기간을 ‘서울의 봄’이라 한다. 
1980년 5 월 15일 서울역 앞에 전국 대학생 10만 명이 운집해 시위를 벌였다. 이때 대학 총학생회장단은 시위를 계속할 것인지 철수할 것인지에 대해 격론을 벌였고 유시민은 고려대 신계륜 학생회장과 함께 철수를 반대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결국 철수가 결정됐고, 이틀 뒤인 5월 17일 신군부가 실권을 잡았고 다음 날인 5월 18일 운명의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1988년 유시민은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국회의원이었을 때 그의 보좌관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2002년 8월에는 본격 정치에 뛰어들어 그해 10월 개혁국민정당을 창당했다. 2003년 4월 경기 고양 덕양갑 보궐선거에서 16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여의도에 입성했다.
2003년 11월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창당한 열린우리당이 출범하면서 개혁당은 열린우리당에 통합됐다. 그는 2004년 17대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했고 2006년 2월부터 2007년 5월까지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했다. 노무현의 정책을 늘 지지했던 그는 “일단 사령관이 ‘돌격 앞으로’ 하면 이 산이 아니더라도 가봐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이후 열린우리당을 탈당한 그는 열린우리당과 민주당 탈당파가 주류를 이뤘던 대통합민주신당에 입당했다. 17대 대선에서 한명숙, 이해찬과 함께 당 예비후보에 나서기도 했지만 두 후보를 지지하며 후보 사퇴했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 대통합민주신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대구 수성을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보수의 성지인 대구, 그중에서도 한나라당 텃밭인 수성을에 도전한 것 자체가 어쩌면 무모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32.6%라는 득표율은 분명 변화의 조짐을 나타내는 숫자임이 분명했다.
이듬해 노 대통령이 서거하고 11월 창당된 국민참여당에 유시민이 합류했다. 그는 민주당을 떠나 새로운 정당을 꿈꿨지만 2010년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한나라당 김문수에게 패배했다. 2011년 11월 이정희, 노회찬, 심상정 등과 함께 통합진보당을 만들었지만 2012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부정경선 논란이 터지면서 통진당은 해체됐다. 2012년 통진당을 떠났던 정파들이 정의당을 창당했고 유시민도 구성원으로 참여했으나 2013년 2월 19일 당원 자격만 남긴 채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너무 늦어버리기 전에 내가 원하는 삶을 찾고 싶어서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떠난다.” 2013년 2월 20일, 유시민이 정치 은퇴를 선언하며 트위터에 남긴 글이다. 정치계를 떠나 지난 시간 동안 활발한 집필, 방송 활동을 통해 대중과 소통했다. 하지만 여전히 대중은 그에게 정치를 묻고 답을 원하며 '이제 다시 돌아올 때가 아닌가?'를 주문한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신임 이사장이 2018년 10월 15일 오전 서울 마포구 노무현재단 회원카페 한다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취임사하고 있다./사진=머니투데이 홍봉진 기자
2018년 10월 15일 그는 이해찬 민주당 대표 후임으로 제5대 노무현재단 이사장에 취임했다. 그가 취임하자 일각에 서는 이를 정계 복귀 신호탄이 아니냐고 해석했다. 유 이사장은 취임식에서 복귀설에 대해 “임명직 공무원이나 선거에 출마하는 일은 제 인생에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일축했다. 그는 “앞으로도 글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려 한다”며 “책 읽고 글 쓰는 시간을 조금 덜어 재단 이사장 활동에쓸 생각이다”라고 밝혔다.
그는 이렇게 복귀에 대해 여전히 ‘생각이 없다’고 밝혔지만 정치권과 대중의 관심은 계속되고 있다. 최근 여론조사 결과를 봐도 차기대선 주자 후보로 거론되는 사람들 중유시민은 가장 높은 지지율을 보이는 후보 중 한 명이다. 그의 의지와는 달리 유시민은 2019년 정치의 중심에 다시 서있다. 그가 기해년 정치판 핵인싸로 돌아올지 귀추가 주목된다.
carriepyu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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