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 정보기관의 절뚝거림과 침묵의 나선

이일환의 情(정보의 눈으로)·世 (세상)·思 (바라보기)

동아대 국제전문대학원 이일환 교수 2018.11.30 14:38 카카오톡 네이버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한반도 및 동북아 정세, 미국과 중국이 벌이는 무역전쟁, 눈앞에 다가오는 영국의 EU 탈퇴로 상징되는 브렉시트 등은 정보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워주고 있다.

미중 무역전쟁은 스파이전쟁으로 전선이 확대되고 있다. 미국은 지난 10월 10일 중국 국가안전부 소속 요원 쉬옌쥔을 제너럴 일렉트릭 등 미국의 항공우주기업에서 기밀 정보를 훔치려 한 혐의로 기소한 바 있다.

이같이 날로 치밀해지는 각국의 방첩활동은 촌각을 다투며 각종 현상에 대한 가치 있는 정보를 수집하고, 적시성 있게 정보를 판단·생산해야 하는 정보기관들의 입장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정보의 본래적 특성인 음습한 이미지로 인해 정보협조가 어려 워지고 있는 상황에서, 디지털 기술로 인한 민간감시·기술적 감시능력까지 정보기관을 필적할 정도로 발전되어 정보요원들의 운신 폭을 좁히고 있다.

‘벨링캣(Bellingcat)’이라는 영국의 온라인 탐사보도 매체가 지난 3월 영국 솔즈베리 에서 발생한 러시아 출신 이중스파이 세르 게이 스크리팔 부녀 독살시도 사건의 용의자 2명의 신원을 밝혀낸 사례는 정보기관의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를 준 케이스다. ‘벨링 캣’은 불과 상근자 5명으로 운영하면서 막대한 예산을 쓰는 영국의 국내 보안정보기관 MI5 등도 제대로 규명하지 못한 용의자 2명 (군의관인 알렉산드르 미슈킨과 아나톨리 체피카 대령)의 상세한 이력을 조사·공개했기 때문이다.

또한 사실이나 증거보다 개인적인 선호나 집단적인 충성심으로 대변되는 포스트 트루 스(post-truth) 현상의 확산은 진실성과 객관성을 중심가치로 삼는 정보기관의 판단능력 혁신을 요구하고 있다. 수십 년간 쌓여온 정보기관들의 나쁜 조직적 속성도 정보공동 체의 앞날에 부정적 시그널 중의 하나다. 러시아 정보기관의 어설픈 행태는 이를 여실히 예증해준다.

러시아 군 정보기관을 대표하는 GRU 소속 요원들이 정보요원이 지켜야 할 기본적인 활동수칙(위장에 능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행동한다 등)조차 무시하고 행동한 것이다. 이들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거점 으로 삼아 ‘화학무기금지기구(OPCW)’ 등을 상대로 해킹 공작을 수행하면서 요원 4명이 몰려다니고, 심지어 일련번호가 나란히 찍힌 여권을 사용하여 암스테르담 스히폴 공항에 입국하는 ‘나태함과 한심함’을 보여주 었다. 유럽 어느 나라든지 러시아 출신을 눈여겨보는 것은 상식인데도 버젓이 몰려다닌 것이다. 당연히 공항 입국 심사요원이 주시하고 네덜란드 정보 수사기관 및 미국 법무부 등이 공조수사하여 이들의 행적을 밝혀냈다. 이들이 갖고 있던 안테나와 노트북 PC 등 해킹장비를 지난 4월 13일 압수하고 10월 4일 GRU 요원 4명과 압수한 장비 등을 공개했다. 러시아로서는 고개를 들 수 없는 수치이자 두고두고 반성해야 할 정보실 책을 초래한 것이다. 지난 80년간 구 소련과 러시아 정보기관들의 수집능력과 전복공 작은 미국보다 우월하다는 평가를 한순간에 무색하게 했다.

정보계를 대표하는 미국 정보기관들도 절뚝 거리고 있다. 장문의 보고서를 싫어하고 간단한 요약보고를 선호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정보습득 습관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 취임 초기부터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 미국 정보계는 정보사용자들이 자신의 견해와 맞지 않는 불편하고 낯선 정보를 받아들이길 기피하는 현상과 맞닥뜨리고 있다. 트럼프는 듣고 싶지 않은 정보는 가짜 뉴스처럼 취급하고 정보전문가들의 충성심이 부족하 다고 힐난한다. 정보전문가들을 ‘Strange Bedfellows’(한방에 같이 자지만 딴사람처럼 느껴지는 동료)로 여긴다. 트럼프는 종종 자신은 휴민트와 인간을 믿지 않는다고 토로하면서 개인적인 이익이나 비뚤어진 세계 관과 맞지 않는 정보는 거부하고 있다. 제2 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에서 나치 스파이로 활동하며 “일본은 소련 침공 계획이 없다”는 1급 정보를 보고한 리하르트 조르게를 무시한 스탈린의 행태와 비슷하다.

트럼프의 정보습득 행태는 미국 정보계로 하여금 트럼프를 비롯한 정책결정자들의 입맞에 맞게 정보를 비틀도록 하고 있다. ‘정 보의 정치화’를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1963 년 공군 복무시절 정보업무에 종사한 이래 55년간 정보계에 뛰어들어 미국 정보계의 산증인으로 통하는 올해 80세인 제임스 클래퍼 전 DNI 국장은 회고록 <사실과 공포 (Facts and Fears : Hard Truths from a Life in Intelligence)>에서 정보를 다루는 최고결정자인 트럼프를 비판한다. 그는 역대 어느 미국 대통령도 선거에 도움을 받기 위해 적인 러시아를 고무시킨 일이 없었다고 말한다. 심지어 트럼프는 북한 주민들이 김정은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하듯 미국 시민 들도 북한과 유사하게 행동하길 바라는 것같다고 힐난한다.

이는 독일의 여성 언론학자 노엘레 노히만이 1970년대에 주창한 ‘침묵의 나선이론ʼ이 정보계에도 유용하게 적용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침묵의 나선이론’은 사람들이 각자 어떤 사안에 대해 견해를 갖고 있더라도 다수가 자신의 견해와 다르면 공개적으로 언급 하길 꺼리고 침묵을 지키는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다수의 의견이란 대개 집권자나 집권층이 주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며, 이는 사회적 압력으로도 기능하여 소수 의견을 가진 사람을 억누르게 된다.

트럼프의 언사는 정보계에 침묵의 나선이 작동하게 만든다. 정보계를 비난하고 정보 보고서를 힐난해놓고도 “조크였다”며 치고 빠지는 행태는 정보계 종사자들에게 자신에게 충성하며 무조건 따르라는 무언의 신호를 보내는 것과 진배없다.

트럼프가 역대 정보기관장들이 당연히 누려온 ‘기밀취급권’을 박탈하기로 한 것은 ‘침묵의 나선’을 유도하는 행위의 한 사례다. 기밀취급권은 관행적으로 퇴임한 고위 정보요 원들에게 기밀을 열람할 수 있도록 배려해온 장치다. 기밀취급권 박탈의 첫 대상자는 트럼프의 정보기관 운영 행태와 러시아게이 트를 소리 높여 질타해온 존 브래넌 전 CIA 국장이었다. 브래넌은 즉각 반발했다. 그는 MSCNBC와의 인터뷰에서 “트럼프가 각종 비판을 위협하고 억누르기 위해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한다”면서 “이는 정보요 원들에게 공적이든 사적이든 반대의견에 침묵하라는 메시지”라고 혹평했다.

‘침묵의 나선이론’의 작동과 강요는 결국 정보의 왜곡을 가져오고 정책의 실책으로 이어져 참혹한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우리의 정보기관도 ‘보안’이라는 미명하에 ‘침묵의 나선’을 만들고 압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성해볼 시점이다. 특정한 견해만이 진실 이라는 인식은 위험하기 그지없다. 통계청의 ‘국가통계 정치화’ 논란은 ‘한국판 기밀취 급권’ 박탈이다. 이 논란은 정보기관뿐 아니라 정부부처 그리고 사회 모든 영역에서 ‘침묵의 나선’이 만들어지고 작동하고 있음을 웅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쌍용그룹에서 중역까지 역임한 한 지인이 말했다. “쌍용그룹이 자동차 산업에 진출했을 때 그룹 중역들은 자동차 산업 진출이 필요하다는 오너의 철학에는 찬성하지만, 월약 1000억원에 달하는 이자를 감당하는 건회사의 재정형편상 무리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오너에게 이런 실상을 말하지 않았다. 심지어 오너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장밋빛 전망만을 보고했다”고 실토했다. ‘침묵의 나선’이 기업이나 조직에서 작동했을 때 어떤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 는지 실증해주는 대목이다.

침묵의 나선은 조직의 관료화를 은연중 확산시킬 개연성이 높다. 안일함과 나태함, 그리고 외부변화에 둔감함 등과 같은 정보기 관의 능력을 갉아먹는 행위에 대해 침묵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정보의 위기로 비화될 수 있다. 정보기관의 중요 기능 중 하나가 촉수 역할이다. 촉수의 예민함을 높이는 길은 위기의식을 갖는 것이다. 위기의식은 조직이 관료화되고 침묵의 나선이 일상화되면 형성되기 어렵다. 가장 큰 위기는 다가오는 미래를 낙관적으로만 바라보고 그 위기를 외면하는 행태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11월호에 실린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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