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외교관 서희의 리더십

한국사에서 읽는 리더십과 신뢰

우리역사문화연구소 김용만 소장 2018.11.30 14:32 카카오톡 네이버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외교 공무원을 양성하는 국립외교관 앞마당에는 서희 동상이 있다. 서희(942~998)는 993년 거란의 대군이 고려에 쳐들어왔을 때 적장 소손녕과 담판을 해서 나라를 지켜낸 인물이다. 2009년 외교통상부는 그를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 1호’로 선정했다. 한국 역사상 최고의 외교관인 서희, 그는 어떤 리더십을 가진 인물이었을까?

강직한 아버지와 아들
서희의 할아버지 서신일은 신라 말 이천 지역의 호족으로 이천 서씨의 시조다. 서신일의 아들 서필은 901년에 태어났다. 그는 타고난 민첩성과 총명함을 발휘하여, 낮은 관직에서 출발해 승진을 거듭하며 내의령(종1품), 즉 수상에 이를 만큼 크게 출세한 인물이다. 신생국가 고려에서 그는 개국정민공이란 칭호를 받았다. 서필은 고려 4대 광종(재위 949~975)에게 직언을 고하는 강직함으로 신뢰를 얻었다. 965 년에 사망한 서필은 광종묘에 배향될 만큼, 왕이 신뢰하는 신하였다.

서희는 942년 서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 다. 그는 18세가 되던 960년 뛰어난 성적으로 갑과 과거에 합격해, 정6품 광평성 원외 랑에 임명된다. 서희는 972년 정4품 내의시 랑으로 일하는 동안 송에 사신으로 다녀온바 있다. 당시 고려가 송과 왕래가 한동안 없었고, 송에 대한 정보도 거의 없었다. 서희는 예의 바른 태도와 뛰어난 언변으로 송과 고려의 정식 외교관계를 맺는 데 기여했 다. 송 황제는 서희의 태도와 몸가짐에 절도가 있는 것을 보고 검교병부상서라는 벼슬을 주었다. 서희는 젊은 시절부터 탁월한 외교관의 능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서희는 이후 국가의 중요 부서에서 일하면서 승진을 거듭했다. 983년 성종 임금이 서경에 갔을 때 몰래 서경의 명승지인 영명사에 가서 놀려고 하자, 서희는 왕에게 글을 올려 옳은 일이 아니라며 간언을 한 바 있다. 서희와 관련된 일화 가운데는 이런 일도 있었다. 관직이 낮은 정우현이란 자가 7가지 바로 다스려야 할 일을 논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성종에게 노여움을 샀다.

성종이 재상들을 모아놓고 정우현이 월권하여 비판 하는 글을 올렸으니 죄를 주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모두들 분부에 따르겠다고 했지 만, 서희는 간쟁하는 데 관직이 따로 없으니 직분을 넘는 것이 죄가 아니며, 정우현의 비판은 대단히 적절하니 오히려 표창해야 한다고 했다. 성종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서희를 태보 내사령, 즉 종1품 수상에 임명 한다. 이처럼 서희는 아버지처럼 바른말을 하는 강직한 관리였고, 외국과의 교섭에서도 처신을 잘하는 탁월한 외교관이었던 것이다.

▲서희역사관에 소장된 서희 표준 영정
거란과의 담판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서희가 정2품 내사시랑 중군사직에 있던 993년 소손녕이 지휘하는 거란군이 고려를 침공해왔다. 당시 거란은 동아시아 최강의 나라였다. 979년 만리장성 남쪽에 거란이 차지하고 있던 연운16주를 공격한 송군을 고량하 전투에서 대파했다. 986년에는 발해 유민들이 압록강 중류 일대에 세운 정안국을 멸망시켰다. 강력한 무력으로 동아시아 최강국으로 군림한 거란이 유일하게 걱정한 것은 송이 다시 연운16주를 되찾기 위해 고려와 연합해 공격해올 수 있다는 점이었다.

고려는 942년 만부교사건을 일으켜 거란과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거란은 고려를 칠 계획을 세웠고, 고려는 이에 맞서 947년에는 광군 30만을 육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940 년대 거란은 내부 문제로 인해 고려를 공격 하지 못했다. 하지만 고려와 거란은 언제든지 전쟁을 할 여지가 있었다.

거란의 소손녕은 고려군의 선봉부대를 격파 하고 “우리나라가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였는데 지금 너희 나라가 국경을 침범하여 빼앗아 가기 때문에 우리가 와서 토벌 하려 한다. 우리가 사방을 통일하였는데 아직 스스로 와서 섬기지 않은 자는 기어이 쓸어 없애버릴 것이다. 머뭇거리지 말고 어서 항복하라”는 공문을 보내왔다.

공문을 살펴본 서희는 성종에게 거란과 강화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보고했다. 성종은 이몽전을 거란 진영에 보내 강화를 요청 했다. 하지만 소손녕은 다시금 항복하라는 뜻을 전할 뿐이었다. 이몽전이 돌아와 보고 하자, 어전회의에서는 거란의 요구를 받아 들여 항복하거나,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주 자는 의견이 많았다. 이에 편승해 성종도 서경 이북을 떼어주자는 의견을 따르려고 했다. 이때 서희가 강력하게 반대했다.

“싸움에 이기고 지는 것은 군대가 강하고 약한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적의 허점을 찾아내 움직이는 데 있는 것입니다. 거란이 고구려의 옛 땅을 찾겠다는 건 사실 우리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지금 그들의 강함을 보고 경솔히 땅을 떼어주면 안 됩니다. 삼각산 이북도 고구려 옛 땅인데 저들이 계속 욕심을 부려 요구한다면 다 주시겠나이까. 땅을 떼어주는 것은 만세의 부끄러운 일입니다. 신들에게 한번 싸워보도록 한 뒤에 논의해도 늦지 않습니다.”

서희의 이러한 주장을 457년이 지난 1450 년 조선의 경세가 양성지가 본받는다. 양성 지는 나라를 방비하는 방책 10가지의 하나로 “아무리 강한 적이 쳐들어오더라도 무조건 굴복하지 말고 모름지기 한번 대승을 해저들이 우리의 병력이 서로 대적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적이 감히 군사를 일으키지 못하니, 영토를 지킬 수있습니다. 고려 때에 요와 금에게 한 것이 바로 이러한 일입니다”라고 세종에게 아뢰었다.

서희가 반대해 회답이 늦어지자, 거란군은 안주 서쪽에 위치한 안융진을 공격했다. 그런데 안융진 전투에서 발해 유민의 후손인 대도수가 지휘하는 고려군이 거란군을 물리 쳤다. 이 싸움으로 인해 거란은 고려와 정면 대결할 생각을 하지 않고, 진격하지도 못하고 항복만을 독촉했다. 그러자 고려는 장영을 사신으로 보냈으나, 제대로 회담도 못 하고 돌아왔다. 성종이 다시 사신을 보내려고 하자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자칫 적진에 들어갔다가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때 서희가 자원했다.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에 위치한 서희역사관에 있는 서희협상도
서희의 담판

서희는 협상의 기본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서희가 국서를 갖고 소손녕의 진영에 도착 하자, 소손녕은 회담의 기선을 제압하려고 “나는 대국의 귀인이니 그대가 나에게 뜰에서 절을 하라”고 우겼다. 적의 군사들로 가득한 곳에서 서희는 당당히 어찌 양국의 대신들이 대면하는 자리에게 그럴 수 있느냐며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소손녕은 대등하게 만나는 예식 절차를 수락했다. 이제 제대로 협상이 시작되었다.

소손녕은 “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가 차지했는데 고려가 우리 땅을 침범해왔다”고 서희에게 따졌다. 광종이 여진 땅을 빼앗아 성을 쌓은 일을 두고 한 말이지만, 이는 어느 나라가 고구려의 계승국인가를 따지는 매우 중용한 논점이었 다. 서희는 이렇게 반격했다. “그렇지 않다. 우리가 고구려의 후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했고, 고구려의 옛 수도인 평양에 도읍한 것이다. 도리어 거란의 동경(요양)도 고려 영토 안에 있어야 마땅하지 어찌 거꾸로 침범했다고 하는가?” 서희의 명확한 논리에 소손녕이 반격하지 못함으로써 첫 번째 고구려 후계논쟁은 고려의 승리로 일단락되었다. 그러자 소손녕은 두 번째 문제를 제기했다. 고려가 우리와 국경을 접하면서도, 바다 건너 송과 친교를 맺고 있는 까닭에 이번 출병한 것이다. 만일 땅을 떼어 바치고 국교를 회복하면 고려도 무사할 것이다.”

이것은 거란이 이번 전쟁을 일으킨 진짜 원인과 전쟁의 목적을 말한 것이다. 거란은 고려가 송과 연합해 대항할 것을 걱정했고, 고려가 거란의 말을 고분고분 듣기를 원했던 것이다. 거란은 송과의 전면전을 앞두고 배후를 안정시키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서희는 거란이 전면전보다 화의를 원하고 있음을 협상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서희는 자신감을 갖고 당당함과 정연한 논리로 소손녕에게 대응할 수 있었다.

“지금 양국 사이를 여진족들이 훔쳐 살고 있기 때문에, 통로가 막혀 있다.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어렵기 때문에 거란에 사신을 보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만일 여진을 쫓아내고 압록강 안쪽 옛 땅을 찾아 성을 쌓고 길을 통하게 되면 어찌 거란과 국교를 맺지 못하겠는가?”

서희는 거란과 국교를 맺기 위해서는 압록강 이남에 있는 여진을 내쫓고 그 땅을 고려가 차지해야 가능하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에 위치한 위치한 서희의 묘
최고의 협상가 서희

서희가 제시한 조건은 거란과 고려가 서로 이익을 볼 수 있는 접점이었다. 협상 결과를 소손녕이 본국에 보고하고 답을 기다리는 사이, 서희는 거란군 진영에서 7일이나 머물며 극진한 환대를 받는다. 소손녕도 회담에 만족했던 것이다. 결국 거란은 서희의 제안을 받아들여 군대를 철수했고, 고려가 압록강 동쪽 280리 영토를 개척하는 데 동의한 다는 답서를 보내왔다. 압록강과 청천강 사이에 280리 땅은 고려가 북진을 하고 싶어도 거란과의 충돌을 우려해 차지하지 못하고 있던 곳이었다.

서희는 협상을 통해 싸우지 않고 거란의 대군을 돌려보냈고, 도리어 고려가 영토를 확대할 기회까지 얻었다. 동아시아 국제 정세 와, 안융진 전투의 패배로 고려군과 전투에 자신감을 잃은 거란군의 상황을 읽어낸 통찰력, 논리 정연한 언변, 예의 바르면서도 당당한 태도가 있었기에 성공적인 협상이 가능했던 것이다. 거란군이 철군한 다음 해 서희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여진족을 몰아낸뒤 압록강과 청천강 사이 강동6주에 성을 쌓고 고려 영토에 편입시켰다.
서희의 담판은 고려가 승리한 것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소손녕이 서희에게 속았다거나, 거란에게 불리한 협상이 체결된 것은 아니다. 거란 역시 자신들이 원하는 이익을 얻었다. 거란은 고려가 송과 관계를 끊고 거란과 국교를 맺은 것에 만족했다.

거란은 서하, 여진, 고려 등 송에 협력할 만한 나라들을 모두 거란 편으로 만들어놓았 다. 거란은 1004년 20만 대군으로 송을 공격하여, 마침내 ‘전연의 맹’을 체결한다. 이조약으로 거란은 매년 비단 10만 필, 은 10 만 냥을 받게 되었고, 송이 되찾고자 했던 연운 16주를 완전히 지배하게 되었다. 이 맹약으로 거란은 송과의 군사적 우위를 확인 하며 동아시아 최강의 국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반면 송이 나약함을 보이자 요를 섬기고 있던 서하가 송을 침략해, 송에게 매년 세폐를 받는 조약을 체결한다.

고려와 송은 거란의 침략을 받고 비슷한 협정을 맺었다. 그런데 ‘전연의 맹’과 ‘서-소 협상’을 비교해보면 고려가 얼마나 성공적인 협상을 했는지가 드러난다. 고려는 거란에 세폐도 주지 않고, 영토마저 얻었으니 말이다.
1009년 거란은 강동6주를 빼앗기 위해 다시 고려를 쳐들어온 바 있다. 이때 고려는 양규가 흥화진 전투에서 거란 대군을 격파했다.

1018년에는 거란의 칸(황제)이 직접 군사를 인솔해 쳐들어왔지만, 고려의 강감찬이 귀주에서 거란군을 대파하여 다시는 거란이 침략해오지 못하게 만든다. 거란이 고려를 거듭 침략한 것은 ‘서-소 협상’이 시간이 지날수록 고려에게 더 많은 이익이 돌아오도록 체결된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고려의 운명을 책임진 서희의 리더십
현실적인 힘의 차이는 협상을 공정하게 할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약자는 협상 전부터 불리함을 전제로 상대에게 덜 빼앗길 것부터 생각한다. 하지만 서희는 협상을 대등한 입장에서 시작했다. 대등한 협상이 가능했던 것은 고려가 안융진 전투에서 거란군에게 승리했던 탓도 있다. 고려가 거란과의 전투에서 무력했다면 서희도 협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서희는 고려를 대표해서 협상에 자진해서 나간 사람이다. 그는 고려의 힘을 믿었고, 그래서 당당할 수 있었다. 그는 빼앗길 것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협상에서 고려의 미래를 위해 무엇을 얻을 것인가를 먼저 생각했다. 협상은 물론 내어주는 것도 있어야 한다. 서희는 거란이 원하는 송과의 국교 단절, 거란에 대한 명분상의 존대를 받아 들였다. 내어준 것은 고려에게 큰 손해가 아니었다. 송은 문화·경제 강국이었지만, 현실적으로 고려를 위협할 상대가 아니었다.

고려는 송에게 동맹국으로 절실한 나라이 지만, 고려의 입장은 달랐다. 그래서 서희는 거란의 제의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고려는 거란을 상국으로 인정했지만, 조선시대 사대와는 큰 차이가 있다. 고려는 거란에게 NO!를 외칠 수 있었고, 내정 간섭을 받지도 않았다. 서희는 명분보다 실리를 찾았던 것이다. 반면 송은 거란과 ‘전연의 맹’에서 명 분을 더 앞세워 자존심을 세우려다가 실리를 잃었다.

서희는 대화와 설득을 통해 상대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서희가 만약 그때그 자리에 없었다면 고려는 얼마나 많은 손해를 보았을까? 고려의 미래는 또 얼마나 달라졌을까?

리더는 집단의 운명을 결정하는 사람이다. 올바른 리더는 서희처럼 당당함과 올바른 판단능력과 폭넓은 지식을 갖추고 집단의 미래를 고민하는 자이어야 한다. 고려는 유연하면서 실리적인 외교를 통해 주변 강자 들과의 투쟁에서 살아남았다. 강자들의 경쟁 속에서 생존과 번영의 길을 찾아야 하는 오늘날 우리에게 서희는 귀중한 스승이요, 본받아야 할 리더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11월호에 실린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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