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예술인은 4차산업 시대의 주역, 기본소득 보장해줘야”

김락겸 수북도예 일여헌 대표, 농촌을 ‘창조 공간’으로 빚어내다

머니투데이 더리더 가현정 객원기자 2018.09.22 10:29 카카오톡 네이버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김락겸 수북도예 일여헌 대표 가족들과 함께
‘가현정 작가의 명옥헌 초대석’ 스물세 번째 주인공은 농촌을 창조 공간으로 빚어내는 도예가 김락겸 대표다. 그는 농촌에서 농사만 짓는 것이 아니라 예술작품을 빚어내며 농촌이야말로 창조공간임을 알리는 산 증인이다. 유용한 생활자기와 차 도구를 만들기도 하지만 쓰임에서 벗어난 다양한 예술작품들을 주로 만들고 있으며, ‘라쿠’라는 회화적인 기법을 활용하고 있다. 

한적한 농촌 마을에 살고 있지만 올해 7월 뉴욕 맨해튼에서 초청 작가로 전시회를 열었고, 유라시아지역 전시회도 예정되어 있는 등 작품성과 예술성이 세계적으로 알려진 도예가다. 부인 박미정 씨는 한옥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며 남편 김락겸 작가를 적극적으로 내조하고 있다. 부부의 외동아들 경택 군과 마당에 뛰어노는 강아지를 보면서 갑자기 떠오르는 노래가 있었다. 교과서에 실려 있어 누구나 다 아는 바로 그 노래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내 나라 내 기쁨 길이 쉴 곳도 꽃피고 새 우는 집 내 집뿐이리 오 사랑 나의 집 즐거운 나의 벗 내 집뿐이리’

독자 여러분에게 즐거운 벗이 되어줄 행복 가득한 집으로 초대하고자 한다. 강변에 자리 잡은 마을로 들어서면 다리를 건너서 중간쯤 가다가 할머니들이 모여 앉아 더위를 식히고 있는 정자가 보인다. 정자를 다 지날 즈음 모퉁이 아랫길로 내려가면 보이는 나비가 붙어 있는 나무 대문을 통해 흙 내음 가득한 도예공방 ‘일여헌’으로 들어갈 수 있다.

*라쿠
라쿠야키(Rakujaki=Rakuware)의 줄인 말로서 즐길 락(樂), 불사를 소(燒), 즉 유쾌, 쾌적 그리고 기쁨 등을 뜻하는 일본어로서 지금은 세계 공영어로 사용되고 있다. 라쿠기법은 형식에 그리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도자기 소성법으로 그 독특한 기법과 즉흥적인 결과가 도예가들을 매료시킨다. 1525년 일본에 정착한 한국 조지로에 의하여 처음으로 시도되었다고 한다. 1994년에 영국의 팀 앤드류(Tim Andrew)가 저술한 『Raku』에 의하면 한국인 조지로는 그 당시 일본의 교토로 이민 간 도예가로 되어 있으며, 조선 도자기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지로의 일생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지만, 한국인이었으며 최초로 일본에서 라쿠를 시도했고 그의 라쿠 찻잔은 매우 우수하며 훌륭했고 특히, 손에 잡을 때 특별한 매력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수북도예 일여헌 소개를 해주세요
▶“70여 년 된 옛집의 서까래와 기둥을 두고 개조해 공방의 내부를 옛 정취가 느껴지는 아늑하고 편안한 공간으로 꾸몄습니다. 옛 구들장도 그대로 두어서 한옥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고자 했습니다. 한옥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고 낡은 부분만 보완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출발은 소박한 놀이터이자 작업 공간, 멀리서 찾아오는 벗들을 위한 공간이었는데 오시는 분들의 반응이 좋아서 아내가 운영하는 한옥 게스트하우스가 중심이 되었습니다.”

-일여헌(一餘軒)의 뜻은 무엇인가요
▶“중국 위(魏)나라 때 동우(董遇)라는 학자는 제자가 공부할 틈이 없음을 한탄하자 ‘삼여(三餘)’를 이용하라며 세 가지의 여가를 가르쳐 줬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가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에 나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 가지의 여가란 바로 한 해의 여가인 겨울, 낮의 여가인 밤, 맑은 날의 여가인 비오는 날을 말하는데, 오늘날 현대인의 삶은 세 가지 여가 중 한 가지만 누리기도 쉽지 않습니다. 도시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야근을 하느라 밤에도 쉬지 못하고, 농부들조차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시설재배로 쉼 없이 일하곤 합니다. 찾아오시는 분들에게 바쁜 일상 가운데 잠시라도 쉬어가는 공간, ‘일여헌(一餘軒)’ 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이름 지었습니다.” 

-김락겸 대표와 가족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대학에서는 공학을 전공했습니다. 대학 3학년을 마치고 일본에 어학연수를 2년 다녀오게 된 것이 도예가로의 삶으로 이끄는 계기가 되었나 봅니다.
공부만 하던 시골 소년이 새롭고 넓은 공간으로 이동하게 되니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어떻게 사는 게 잘사는 것인지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생김새도 다르고 언어도 다른 사람들이 많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다양한 삶이 있는데 그렇다면 나도 평생 매일 해도 즐거운 일을 해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습니다. 새롭게 정립된 직업관 때문에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몰라 다양한 경험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소리도 배워보고, 번역가가 되기 위해 공부도 해보는데 힘겹기만 하고 즐겁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졸업을 하고 중견기업에 입사했습니다. 해외영업부에서 일하면서 여러 나라를 다녀 보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안정된 직장생활이었지만 평생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고민과 갈등이 늘 있었습니다. 마땅히 하고 싶은 일이 없어 그저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다 도예가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평범한 회사원이 도예가가 되면서 구도의 길을 찾느라 결혼이 많이 늦어졌습니다. 어쩌면 평생을 찾아 헤매도 찾지 못했을 길을 아내를 만나면서 제대로 찾게 된 것 같습니다. 여행을 좋아하며 아름답고 순수한 영혼을 가진 아내를 처음 본 순간 함께해야 할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아내가 시골 출신의 가난한 도예가를 평생의 반려자로 선택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직 마음 하나만 보고 결혼해준 아내 덕분에 즐거운 나의 집이 생겼습니다. 혼자 있는 즐거움은 셋이서 함께하는 행복을 결코 따라갈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경택이와 아내와 함께하는 일상이야말로 진리를 찾은 기쁨을 매일 느끼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김락겸 수북도예 일여헌 대표의 작품들

-공학도에서 도예가가 되기까지 스토리가 궁급합니다
▶“회사 생활을 4년 정도 했을 때 PC통신 유니텔 ‘차사랑’이라는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도자기로 만들어진 다양한 찻잔에 관심이 갔습니다. 그때 도자기를 만들면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드디어 하고 싶은 일이 생기자 미련 없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도자기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는 것을 만류했지만, 그때의 선택을 지금까지 결코 후회하지 않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인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도예를 배우느라 고생을 많이 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몰두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생의 에너지를 가져다주는지 경험했습니다. 장기적인 불황과 저성장 시대라는 이유로 자녀들에게 그저 안정적인 진로를 권유하는 대한민국 부모들에게 다시 한 번 생각하기를 부탁합니다.” 

-농촌의 장점을 꼽아 주신다면
▶“도예가라는 직업이 전원생활과 잘 어울린다고 말하면서도 초등학교에 입학할 자녀가 있다고 하면 다들 걱정을 해줍니다. 도시에서 농촌으로 이사하는 것의 가장 큰 어려움으로 자녀교육을 이야기하기 때문인데, 학원도 없는 시골에선 공부를 잘하기 어렵다는 이유입니다. 게다가 다양한 문화활동을 누리기 힘든 환경이라는 것도 시골 생활을 기피하는 커다란 요인이 되곤 합니다. 하루 종일 학교와 학원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도시 학생들보다 자연에서 뛰놀거나 책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은 시골 학생들이 더 창조적인 환경에 놓여 있습니다.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부터 한글과 영어를 미리 배우는 교육 방식은 오히려 아이들의 성장을 저해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무한한 상상력과 창조의 힘을 언어라는 틀에 일찍 가둬두기 때문입니다. 자녀교육에 관한 철학만큼은 도시 출신인 아내도 같은 생각이기 때문에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입니다.”

-창조공간으로서 농촌의 예술적 가치를 말씀해주셨는데요
▶“아들의 등굣길을 따라 나가 자연스레 이야기 나누며 걷는 마을 숲길이야말로 영감의 원천이 되는 최고의 공간입니다. 인위적으로 공간을 조성하기보다는 옛날부터 있던 우리 마을의 돌, 나무, 길, 집도 가급적 있는 그대로 보존하면서 관리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획일화된 공간이 아니라, 마을 고유의 매력이 훼손되지 않은 데서 전해지는 오랜 전통의 기운이야말로 사람들에게 진정한 쉼터와 창조공간으로서 역할을 하게 합니다. 농업의 생산성 향상을 위해서라면 경지정리가 필요하지만, 창조공간으로서 생각하면 구불구불한 논과 밭도 충분히 가치가 있습니다. 모두가 다 생산성과 효율성이라는 한 길로 달려가던 산업화의 시대와 지금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농촌에서 예술가로서 살아가는 일이 어렵지는 않으신지요
▶“아이의 놀이터가 되는 아주 작은 텃밭이라 우리가 좋아하는 채소를 조금 길러 먹을 수 있는 정도이고 농사로 인한 소득이 있지는 않습니다. 아내가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서의 수입과 제가 만든 생활자기와 도예작품을 판매한 수익으로 세 가족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옥을 수리할 때 든 비용이 은행 대출로 남아 있어 빠듯한 살림살이입니다. 아내의 알뜰함 덕분에 지금껏 잘 살고 있지만,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문화선진국이 되려면 반드시 예술인과 문화인의 생계를 보장해주어야 합니다. 프랑스 정부가 수십 년째 시행해오고 있는 ‘앵테르미탕(intermittent)’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앵테르미탕(intermittent)에 대해 설명을 부탁합니다
▶“앵테르미탕은 프랑스어로 ‘휴지기’를 뜻하는 말입니다. 1958년 프랑스 드골 정부가 시작한 정책으로 알고 있습니다. 드골 정부 당시 국가상공업협회(Assedic)가 창설되면서 실업수당이 본격화되었는데, 1969년부터는 영화·공연·방송 분야의 인력에게까지 확대되었다고 합니다. 해당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매달 벌어들이는 소득을 정부에 신고하고, 그 절반을 보험료로 내야 합니다. 마치 회사원이 매월 급여에서 연금이나 보험료를 정기적으로 납부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정부는 예술가들이 신고한 액수를 기반으로 기준 소득을 산출한 뒤, 수입이 없을 때 그 기준소득을 보장해주는 겁니다. 조건은 해당 분야에 비정기적으로 일하며 연간 507시간을 일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조건을 충족하는 예술가들은 소득이 없는 나머지 기간에 실업급여를 탈 수 있는 제도입니다.”

-농업인과 예술인에게 기본소득제 도입을 주장하시는 이유는
▶“독일은 농업인들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해주는 것으로 유명한 국가입니다. 농업의 공익적 가치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프랑스가 예술인들에게 소득을 보장해주는 이유도 예술의 공익적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독일이나 프랑스처럼 선진국이나 가능한 이야기라고 하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논리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4차 산업시대라고 하면 첨단기술 중심의 세상이 되어 사람의 역할이 줄어드는 것 아니냐고 오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오히려 창조와 예술이 가능한 사람 중심의 시대가 되는 것입니다. 

농업 분야와 예술 분야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애쓰는 사람들이야말로 4차 산업시대를 이끄는 주역입니다. 그럼에도 농업과 예술에 투자하지 않는다면 성공적인 미래시대를 보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소득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사명감으로 무장한다 한들 더 이상 버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농업인과 예술인을 대하는 정부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 상황에서 지원정책을 펼쳐봐야 효과가 있을 리 만무합니다. 생명산업이자 미래 산업인 농업과 예술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는 사회적인 공감대 형성과 정부의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합니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9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yunis@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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