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 1세대, ‘농사의 달인’이 되다

‘해라농장’ 안병문, 문정내 부부, 포도와 참외, 벼농사로 연소득 2억 올리는 본보기 농사꾼

머니투데이 더리더 홍상철 팜라이터(farm writer) 2018.08.17 18:15 카카오톡 네이버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편집자주1차산업의 대표격인 농업이 6차산업으로 변신 중이다. 농사만 지어 도매가로 농작물을 넘기던 농민들이 제조와 마케팅, 판매, 서비스까지 책임지는 6차산업의 최전선에 나서고 있는 것. <더리더>는 농민의 변화로 농가가 성장하는 모습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이 농촌을 찾기 바라는 마음으로 신규 코너를 선보인다. 농촌이 잘 살아야 우리 먹거리의 질이 좋아지고 삶이 풍요로워진다. 제2의 농촌 호황기를 만들 ‘新농민’들을 만나보자. / 편집자

▲‘해라농장’ 안병문, 문정내 부부/사진=홍상철 팜라이터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전국에서 이농(離農)현상이 일어났다.많은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빠른 속도로 진행된 산업화의 영향이었다. 농촌에서 농사를 지어서는 자식들을 배불리 먹이기도 힘들었고, 공부를 시킨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자식 공부를 위하여 정든 고향땅을 떠났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나면서 흐름이 바뀌었다.
70년대에 부모의 손에 이끌려 도시로 나왔던 아이들은 이제 도시 생활을 마감하고 농촌으로 돌아오고 있다. ‘베이비부머’의 귀환이다. 농림축산식품부의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귀농인구는 51만6817명으로 2013년 통계 작성 이후 처음으로 50만 명을 넘어섰다. 베이비부머인 5060세대에서 시작된 귀농 행렬은 이제 청년들의 귀농과 창농으로 이어져 고령화된 농촌의 새로운 희망으로 떠오르고 있다. 

경북 칠곡군으로 일찌감치 귀농해 자리를 잡은 귀농 1세대가 있어 만나본다. 안동의 하회마을, 경주의 양동마을과 함께 영남의 3대 반촌으로 불리는 경북 칠곡군 왜관읍 매원리에서 ‘해라농장’을 경영하는 안병문(60) 문정내(60) 부부다. 이들은 참외와 포도, 벼농사를 지어서 연간 2억 원 정도의 소득을 올린다. 주변에서는 이름난 농사 고수로 통한다. 

-도시생활을 하다가 남들보다 일찍 귀농을 한 이유가 있습니까
▶“귀농을 한 것이 아니라 서울에서 사업 실패로 살길이 막막해 이곳으로 왔습니다. 좋게 말하면 귀농이지만 사실은 서울에서 도저히 살 형편이 안 돼서 외삼촌의 소개로 이곳에 오게 됐습니다. 서울에서는 가방판매업을 했습니다. 사업이 잘되는 편이었습니다. 새 학기가 되면 학생용 가방 수요가 엄청났습니다. 밥 먹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빴습니다. 1983년 교복자율화가 이루어지면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학생들이 학생용 가방 대신 배낭을 메고 다니고, 고급스러운 메이커 가방을 찾으면서 기존의 가방 판매업자들은 모두 도산했다고 보면 됩니다. 나도 그 행렬에 함께 서 있었습니다. 사업 부진에 따른 스트레스로 잠도 제대로 못자고 건강도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그래서 살길을 찾아 농촌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니 귀농이 아니라 도시에서 추방된 것으로 봐야 합니다.”

-그렇게 농촌으로 들어왔다면 고생을 많이 했겠습니다
▶“1985년 2월에 현금 1만8000원과 빚 2000만 원을 안고 들어왔습니다. 외삼촌이 소개해준 방 하나에 어머니와 우리 부부, 첫째 딸 이렇게 네 식구가 살았습니다. 한 달 만에 둘째가 태어나면서 다섯 식구가 됐어요. 우리 가족 중에 키가 가장 큰 나는 바로 누워 잘 수가 없어서 항상 등을 구부리고 잤습니다. 잠을 자고 나면 몸이 편해야 하는데 밤새 등을 구부리고 새우잠을 잤으니 아침에 일어나면 전신이 욱신거렸습니다. 밤에 잠자는 것이 겁이 날 정도였습니다.
그때부터 남의 땅을 빌려서 벼농사를 짓고 틈만 나면 품을 팔았습니다. 농사일뿐만이 아니라 닥치는 대로 했습니다.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러다가 형편이 조금 나아지면서 콤바인과 트랙터를 장기 할부로 구입해 남의 일을 시작했습니다. 가을철이 되면 강원도 철원까지 가서 한 달 이상을 밤잠 자지 않고 벼 베기를 하고 겨울에는 논을 갈아서 살림에 보탰습니다.
그런 노력 덕분에 형편이 점차 좋아지면서 기반을 잡기 시작했습니다. 나보다는 우리 집사람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도시생활을 접고 농촌으로 들어오는 데도 아내가 적극적이었고 일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아내를 내 인생을 지켜준 은인으로 생각하고, 남은 인생 동안 왕비처럼 모시려고 노력 중입니다만 실천하는 데 많이 어렵습니다.”

-현재 농사는 얼마나 짓습니까. 그리고 대부분 농지를 임차해서 농사를 짓는다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영농 경력이 올해로 33년 정도 됩니다. 전문 농사꾼으로 자리 잡을 만한 경력도 됩니다. 남들은 나를 성공한 귀농 1세대라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볼 때는 억지 귀농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한눈 팔지 않고 일만 했습니다. 현재는 참외 1만2000㎡와 포도 1만2000㎡, 벼농사 4만㎡를 지어서 연간 2억 원 정도의 소득을 올립니다. 참외와 포도 농사를 시작하면서 벼농사를 많이 줄였습니다. 많을 때는 26만4000㎡를 지었습니다. 알기 쉽게 말하면 8만 평, 400마지기의 벼농사를 지은 겁니다. 남들은 많다고 하지만 아직은 감당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몇 년 전부터 참외 후작으로 멜론 재배를 하고 있습니다. 연중 소득이 균형을 이루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일종의 농업의 ‘포트폴리오’라고나 할까요. 이렇게 하면 소득도 농사일도 연중 이어집니다. 참외에서 모내기, 포도, 벼베기 이런 식으로 순환을 합니다. 농촌에서는 참외 떨어지면 돈도 떨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우리는 계속 연결이 됩니다. 매년 영농 수입으로 조금씩이라도 구입해서 자경을 할 수도 있지만 농지는 농민이 농사를 짓는 땅이지 재산 증식 수단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일하면 땅이 내어주는 소득이 상당합니다. 그 소득만으로도 감사한 일인데 자꾸만 땅을 사다보면 욕심도 생길 것 같아서 대부분 농지를 임차해서 농사를 짓습니다. 농촌이 고령화되면서 농사지을 땅이 많으니 땅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지금 내가 경작하는 농지의 상당 부분은 30년 장기 임차농지입니다.”

-지금도 영농규모가 만만찮은데 멜론 재배에도 도전하는 겁니까? 멜론의 이름도 직접 지었다면서요.
▶“현재 우리 농장의 주된 소득원은 참외와 포도입니다. 물론 벼농사도 상당부분을 차지합니다. 농사도 작목을 분산하는 복합영농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작목에 집중하다 보면 기후조건과 가격 형성에 따라 위험 요인이 발생할 소지가 있어서 분산하여 위험 요소를 줄입니다. 노동력과 농지의 효율성도 높일 수 있습니다. 보통 참외의 경우 3월부터 수확을 시작하면 추석까지 수확할 수 있지만 7월을 넘어서면 가격이 하락합니다. 그래서 참외 후작으로 멜론을 재배하려고 준비하는 단계라고 보면 됩니다. 내가 시험적으로 2동에 재배하는 멜론은 ‘참멜’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겉은 참외 모양이고, 속은 멜론입니다. 맛도 멜론 맛입니다. 참멜은 참외+멜론입니다. 참외가 끝날 무렵인 8월 중순이 되면 포도가 본격적으로 출하됩니다. 캠벨과 거봉, MBA라는 품종을 재배합니다. 포도도 품질이 좋아서 대부분 무인판매대에서 판매해 일손도 줄이고 출하 수수료도 절감해 소득도 높아집니다.”

-농사의 고수로 보이는데 특별한 기술은 무엇입니까
▶“관찰과 토양 관리입니다. 농부가 농사를 짓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찰이라고 생각합니다. 최대한 많이 농장을 둘러보고 작물들의 상태를 관찰해야 합니다. 생육 상태부터 병충해 발생 여부까지 전반적으로 관찰하고, 단기 대응방안을 찾고, 장기적인 개선방안을 찾아서 다음해의 농사에 반영해야지요. 농작물은 말을 하지는 못하지만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관찰하다 보면 작물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작물과의 대화이고 소통이라고 생각합니다. 토양관리도 중요합니다. 친환경재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대부분의 농가들이 친환경 유기농을 주장합니다. 

우리 농장도 마찬가지입니다. 크게 두 가지에 중점을 둡니다. 퇴비와 토양 소독이지요. 완전히 발효된 퇴비를 사용합니다. 퇴비를 만들 때 볏짚과 황토, 한우 축사에서 나오는 우분을 섞어서 특별한 퇴비를 만듭니다. 우리 농장 입구에 쌓여 있는 ‘볏짚베일’(반추가축의 겨울용 조사료로 이용하기 위해 만든 압축된 원통형 볏짚꾸러미)은 사료용이 아니라 퇴비용입니다. 1년 정도 보관했다가 볏짚으로 만든 베일이 완전히 발효가 되면 황토, 우분과 섞어서 퇴비를 만들어 밭에 뿌립니다. 

내가 벼농사를 짓는 가장 큰 이유는 쌀 생산보다 퇴비생산용 볏짚을 얻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땅심을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토양관리에 있어서 또 다른 하나는 토양소독입니다. 나는 참외 수확이 끝나면 논을 갈고(경운) 비닐을 제거해 토양을 햇볕에 노출시켜 토양소독을 합니다. 통상 하우스용 비닐은 3년 정도 사용하지만 토양소독과 광투과율을 높이기 위하여 매년 비닐을 교체합니다. 물론 비닐 비용은 많이 들지만 전체적으로는 이득이 많습니다.”
▲참외를 분리하고 있는 안병문, 문정내 부부/사진=홍상철 팜라이터

-농산물의 품질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요
▶“누구나 자기가 생산한 농산물이 최고라고 합니다. 자신이 공들여 키운 자식 같은 농산물이니 당연히 그렇게 말합니다.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는 곱다고 하지 않습니까. 나도 역시 그렇게 말합니다. 내 자랑 같아 쑥스럽지만 2009년에 칠곡군 참외 품평회에서 대상을 차지했습니다. 그 이후에는 품평회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지금이라도 나가면 메달권에 들 것입니다. 품질과 직접적인 영향은 없지만 2005년에 농협중앙회에서 주관한 ‘새농민상’을 받았고 2017년에는 ‘새농민상 본상’(국무총리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런 실적들이 우리 농장 농산물의 품질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포도의 경우 80%를 농장 앞에 설치한 무인판매대에서 판매하고, 20%를 직거래를 통한 택배로 판매합니다. 공판장에는 출하하지 않습니다. 이것 역시 품질이 뒷받침되는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20년째 이어오고 있는 참외선도농가연구회 활동을 통하여 농가 상호간에 정보 교환과 연구활동을 하는 것이 품질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회원 25농가 부부가 매월 1회씩 야간에 공부를 하는데 보통 밤 12시까지 토론을 통한 교육을 합니다.”

-무인판매대를 설치해 참외와 포도를 판매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일손 부족을 해결하기 위하여 2008년부터 무인판매대를 설치하고 포도와 참외를 판매합니다. 시작할 때는 고민이 많았습니다. 가장 큰 고민은 실제로 팔릴 것인가 하는 것과 도난에 대한 우려였습니다. 우리 사회의 신뢰도가 높아졌기 때문에 가능할 것으로 보았고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지금은 인근 10여 개 농장에서 무인판매를 하고 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 어색해하는 소비자도 있었으나 지금은 누구나 편하게 농산물을 구입하는 편한 장소가 됐습니다. 무인판매에 따른 일손 절약이 농장 운영에 큰 도움이 됩니다. 우리 농장이 칠곡군 무인판매점 1호 농장입니다.”

-농장 이름이 ‘해라농장’인데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해라’는 제 큰딸의 이름입니다. 사업에 실패하고 이곳으로 올 때 ‘해라’는 엄마 등에 업혀서 왔습니다. 그 추운 겨울에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변변찮은 상태에서 엄청 고생을 했습니다. 세 자매가 모두 고생을 했지만 큰 아이가 가장 많이 고생한 것이 안타깝고 해서 농장 이름을 ‘해라’로 정했습니다. 그 당시 아이들이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납니다.”

-농사를 지어서 가장 보람을 느끼는 일은
▶“이곳에서 농사를 지어서 딸 셋을 대학 보내고 좋은 직장에 취업해 자기 스스로 생활하고 있는 것이 가장 보람있고 자랑스럽습니다. 셋이 동시에 대학을 다니는데 한 학기 등록금이 1500만 원이 나왔어요. 내가 도시생활을 했다면 감당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힘은 들었지만 열심히 농사지어 아이들을 공부시킬 수 있었던 것은 농사 덕분이니까요. 언젠가 딸 셋이 우리 부부를 앉혀 놓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엄마 아빠, 두 분이 힘들게 농사지어서 저희들 셋 대학 졸업시키고 앞길을 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날 밤에 우리 부부는 잠을 설쳤습니다. 너무 기분이 좋아도 잠이 오지 않는다는 걸 그날 알았습니다.”
▲‘해라농장’ 안병문 대표/사진=홍상철 팜라이터

-도시 친구들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도시나 농촌이나 모두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일했지요. 나도 예전에 도시 생활을 해보았기 때문에 크게 부럽지는 않았으나 농사일이 힘들 때는 아내에게 많이 미안했지요. 힘든 농사일을 하면서 싫은 소리 하지 않고 함께해준 아내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직업적으로 볼 때 도시생활을 한 친구들은 모두 은퇴를 했으나 나는 아직 현역으로 뛰고 있으니 내가 훨씬 좋지 않습니까. 내 정년이 언제인지를 모르고 일할 수 있으니 내 직업인 농사가 최고지요. 건강이 좌우하겠지만 앞으로 20년 정도는 더 일할 것 같습니다.”

-앞으로의 계획과 귀농을 희망하는 도시인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농민이 운영하는 농산물 직판장에 대한 밑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농민이 운영하는 로컬푸드 매장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나 단순한 농산물 판매장이 아니라 로컬푸드 판매 및 카페와 갤러리 기능을 합친 형태로 농민들은 농산물을 판매하고, 도시민들은 휴식과 힐링을 할 수 있는 융합된 기능을 갖춘 복합공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소비자인 도시민과 농민이 윈윈할 수 있는 시설이라는 생각입니다. 마침 미술을 전공한 둘째 딸이 관심을 가지고 있어 준비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농장 옆에 1300㎡의 부지를 마련했고 폐백 음식과 바리스타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요즘 귀농이 많이 늘고 있습니다.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라고 봅니다. 다만 귀농을 전원생활에 대한 낭만이나 도시생활에서 탈출하는 방편으로 여긴다면 어려움이 많을 것입니다. 농촌에 대한 충분한 사전 준비를 거치고 고생을 감당할 각오를 하고 귀농을 한다면 환영할 일입니다.” 

홍상철 팜라이터(farm writer) ilsok@korea.kr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8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yunis@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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