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위기, 전체주의적 포퓰리즘 그리고 만델라의 leg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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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환 동아대 국제전문대학원 교수 2018.08.16 09:43 카카오톡 네이버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스트롱맨(strong man, 독재자) 정치가 부상하고 있다. 우리는 이상하고 불확실한 시기(in strange and uncertain times)에 살고 있다. 선거 등 민주주의의 형식만 유지한 스트롱맨 정치가 갑자기 부상하고 있다. 이들은 민주주의가 민주주의로서의 의미를 가질 수 있게 하는 모든 제도, 규범을 훼손하려 하고 있다. 스트롱맨들은 공포와 분노, 긴축의 정치를 내세우는 정치인들이며, 이들이 부상하는 속도는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2008년 이후 공포의 정치가 시작되고 있다. 그리고 자유언론은 공격당하고 있다(The free press is under attack). 국가에 의한 미디어 통제와 검열행위도 날로 증가하고 있다. 한때는 지식과 이해 그리고 사회적 연대감을 증진시킬 수단으로 여겨졌던 소셜미디어는 증오와 편집증,그리고 선전과 음모이론을 부추기는 효과적인 수단임이 증명되고 있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다(people just make stuff up). 우리는 국가가 후원하는 선전이 증가하는 시대에서, 뉴스와 오락의 경계가 흐릿해진 시대에서, 이 같은 현상을 목도하고 있다. 뉴스 사이클은 점점 더 머리기사를 비틀어서(spin) 독자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평화와 통합을 강조한 넬슨 만델라의 유산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 내용은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지난 7월17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의 워더러 크리켓 경기장에서 열린 넬슨 만델라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16회)에서 격정을 토로한 연설문의 일부분이다. 퇴임 8개월 만에 침묵을 깨고 트럼프 대통령이 주도하는 ‘민주적 세계질서 흔들기’와 언론의 공익적 역할이 퇴색하고 있는 상황을 작심하고 비판했다.

1990년대 동구 공산권 몰락 이후 서방의 자유민주주의는 승리자로 포장됐고, 이후 ‘민주과잉’으로 불릴 정도로 민주주의적 요소로 불리는 사안들이 사회 내에 퍼져나갔고 제도화돼왔다. 그러나 오바마의 연설은 ‘민주과잉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민주라는 것이 과연 좋은 것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주었다. 새뮤얼 헌팅턴은 “1974년 포르투갈의 정권교체에서 1990년까지를 세계 민주화의 제3의 물결이라고 명명하면서, 이제는 ‘민주’라는 이념이 거의 의심 없이 합법성을 갖추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헌팅턴은 “과연 민주가 주류의 정치체제일 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정치체제가 되는 세계로 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 바 있다. 이는 ‘민주’가 과거 신자유주의 논리처럼 일종의 위험한 이데올로기로 변질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어쩌면 ‘민주’에 대한 미신에 과도하게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다수의 사람이 투표한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상식이 된 지 오래다. 가장 민주적이었다는 아테네에서도 소크라테스가 군중의 투표로 사형에 처해졌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팩트다. 우리의 경우,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공익적 기구인 ‘최저임금위원회’의 논의와 결정 과정을 보면 외형적 민주주의의 결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돈 내는 사용자가 돈을 내기 어렵다고 아우성을 치는데도 정책 목표만을 의식해 사용자측을 배제한 상태에서 다수결로 밀어붙이기식으로 결정했다. 형식적 민주화 요건을 갖추었을지는 모르나 내용적 민주화와는 거리가 먼 후진적 행태였다.

민주주의가 실질적으로 구현되고 있다는 미국과 유럽에서 민주주의를 해치는 부정적인 측면이 ‘전체주의적 포퓰리즘’이다. 이는 점증하는 전체주의적 경향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어떻게 방어하느냐의 숙제를 던져주고 있다. 트럼프나 유럽의 우익 포퓰리스트들은 이민자 증가 등으로 인한 인구학적 변화를 자국민들의 고민과 연결시켜 이용하려 하고 있다. 트럼프의 선거기반은 압도적으로 백인이다. 백인들이 염려하는 이민문제•인종문제•이슬람문제 등을 정치적 궁지에 몰리거나 돌파구가 필요할 때마다 여론화하여 정치기반을 다지고 넓히고자 하고 있다. 이는 만델라가 강조한 포용과 화합이 아닌 ‘배제의 세계관(exclusionary worldview)’을 만들어 내고 주입시킨다.

배제주의자이자 전체주의적인 포퓰리스트들은 부패한 엘리트와 선한 집단의 차이를 차별화하는 수사(narrative)를 구사한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안전장치에는 무관심하다. 퓨 리서치 센터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정부기구나 언론과 같은 제도적 기구에 대한 불신은 사상 최저치(an all-time low)를 기록했으며, 유럽의 포퓰리스트 정당들은 정부에 대한 불신의 강도를 더 높이고 있다”고 강조한다. 미국의 경우, 좌파 포퓰리스트이든 우파 포퓰리스트이든 놀라운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바로 미군의 해외 주둔군 역할에 대한 깊은 회의감, 국가에 의한 감시행태의 증가, 그리고 글로벌 엘리트에 대한 의구심과 주요 제도적 기구에 대한 불신 등이 그것이다. 게다가 포퓰리스트들의 주장에 호소력을 더하는 것은 경제적 요인보다 문화적 요인이다. 이민자의 증가 등으로 인한 문화적 정체성이나 우월성이 흔들리는 사태를 염려하는 것이다. 2016년 트럼프 등장 이후 추한 민족주의와 백인 우월감이 민주주의적 가치보다 애국적인 감정으로 재구축•포장되어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오바마의 만델라데이에서의 연설은 이 점을 날카롭게 지적한 것이다.

안개처럼 스멀스멀 트렌드가 돼가는 ‘전체주의적 포퓰리즘’ 못지않은 부정적인 요소 중의 하나가 검열(censorship)이다. 노골적인 검열은 사라진 듯 보이지만 스마트폰이 상징하는 기기의 발달은 검열의 공포를 가중시키고 있다. 우리는 주머니 안에 검열 도구를 스스로 갖고 다니는 존재다. 구글 등의 위치 앱은 한 개인의 일상 동선을 샅샅이 살펴볼 수 있다. 문제는 국가나 특정 집단이 이를 악용할 여지가 많다는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 무엇을 먹었는지, 어느 장소에서 누구와 만났는지에 대해서도 유추 가능하다. 한마디로 ‘역검열의 시대’에 살고 있다. 중국 시진핑 정부가 이 부분에서 선도자다. 일부 학자들은 중국 정부의 이런 행태를 ‘부드러운 검열(soft censorship)’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국 정부를 지지하는 콘텐츠를 창안하게 하고, 정부에 비판적인 내용은 교묘하게 들리지 않게 하는 것이다. 트럼프는 ‘가짜 뉴스(fake news)’라는 단골 단어를 쓰면서 자신을 비판하는 언론에 대해 공격하고, 사실을 물타기하는 방법을 거리낌 없이 구사하고 있다.

우리의 경우에도 드루킹 사건이 보여주듯 ‘여론을 짜깁기하는 행태’가 일상화되고 있다. 어느 삼성 출신 OB가 작성해 SNS 상에서 화제가 된 ‘삼성의 후배들아 왜 침묵하는가’의 글처럼 진실을 말해야 할 식자층 등은 곡학아세(曲學阿世)하고, 적폐청산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정의사회 세우기’가 자신의 목을 조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자기검열하고 입을 다문다. 반면에 대다수 국민들은 샘통심리로 내심 환호한다. 평화와 화해를 강조한 만델라 레거시는 한국에 적용될 수 없는 이단적인 구호인가. 기디언 로즈(Gideon Rose)라는 정치전문가가 토로하듯이 ‘민주주의는 죽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성찰해봐야 할 시점이다. 혹자는 “글로벌 민주주의가 1930년대 이래 최악의 후퇴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죽어가는 민주주의를 되살리려면, 내용적 민주주의가 완성되려면, 진실을 말하고 싶은 자가 검열 느낌이 안 들도록 해야 하며, 다양한 표현의 창구가 보호되어야 할 것이다. 경제적•문화적 불평등을 줄이고, 정보혁명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관리함으로써 죽어가는 민주주의를 살려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회복 능력을 갖고 있는 제도이다. 어려움과 도전이 닥쳐도 극복하고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미래는 글로벌 이데올로기적 우월성을 놓고 새로운 투쟁을 벌여야 하는 세상이 될지도 모른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8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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