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6·25전쟁 당시 미군 유해(遺骸) 송환문제, 그 주요 경위와 의미

[강석승의 북한이야기]

미래안보전략연구원 강석승 원장 2018.08.08 15:00 카카오톡 네이버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 간에 이루어진 역사적인 ‘6·12 싱가포르회담’에서는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과 한반도에서의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에 관한 문제들에 대해 4개항의 합의를 도출했다. 즉 양국은 평화와 번영을 바라는 두 나라 국민들의 염원에 맞게 새로운 관계를 수립해 나갈 것과 한반도에서의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공동으로 노력할 것, ‘4·27 판문점선언’을 재확인하면서 한반도에서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노력할 것, 그리고 6·25전쟁 당시 전쟁포로 및 행방불명자들의 유해 발굴을 진행하며, 이미 발굴이 확인된 유골들을 즉시 송환할 것 등을 확약했다.

이런 내용을 담은 공동성명이 발표된 이후 그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이행과 실천을 위해 양국은 평양과 판문점 등에서 잇달아 관련회담을 열었는데, 미국의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북한을 직접 방문하여 김영철 부위원장과 벌써 3차례의 고위급회담을 가졌으며, 미국의 성 김 필리핀대사를 중심으로 한 대표단은 판문점에서 북한의 외무성 부상인 최선희를 중심으로 한 대표단과 여러 차례 실무회담을 했다.

이런 가운데 미국과 북한의 장성급 대표들은 지난 7월15일 오바마 정권 당시 유해 송환협상을 중단한 이후 9년여 만에 판문점에서 회담을 갖고, 6·25전쟁 당시 실종됐거나 사망한 미군의 유해 발굴 및 송환작업을 11년 만에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이런 합의에 기초하여 양국의 대표들은 7월16일 실무회담을 하고 유해 송환과 관련한 세부 절차들을 구체적으로 협의했다.

이로써 한동안 ‘6·12 싱가포르합의’가 허공에 울려퍼지는 메아리처럼 “북한에 핵을 개발할 시간만 벌어주는 공허한 약속”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와 비판이 어느 정도 사라지게 됐다.

바로 이런 점에서 볼 때, 미국과 북한 간 정상회담 공동성명 제4항에서 밝힌 6·25전쟁 당시 실종되거나 사망한 미군 유해의 발굴이나 송환 합의는 앞으로 미국과 북한 간에 ‘활발하게 이루어질 대화의 불꽃을 되살리는’ 의미가 결코 작지 않다는 점을 입증해 주고 있다. 이는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관련 성명에서 밝힌 바와 같이 “북한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5300명의 돌아오지 않은 유해를 발굴하기 위한 현장작업을 재개하기로 합의한 것은 양국관계 개선에 매우 큰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 분명하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조국을 위해, 그리고 전 세계의 평화”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다 전사(戰死)한 미군장병들에 대해 “단 한 명의 장병도 적진에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방침을 직접 증명해 보일 수 있는 좋은 계기로 작용할 것이다. 비록 유해(遺骸)에 불과하지만, 미국 정부가 오랜 시간이 흘러갔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결코 잊지 않고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겠다는 애국심 발현의 정책의지를 실현하는 의미가 매우 클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북한으로서도 김정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직접 약속한 사항을 ‘말이 아닌 실제행동’으로 보여주는, 좋은 살아있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는 ‘공통분모’로 작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북한측 입장에서는 미군 유해 1구(具)를 미국측에 송환할 경우 받을 것으로 보이는 비용이 미화로 약 3만5000달러에 달하기 때문에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반사이익(反射利益)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이번 미군 유해 송환 및 발굴 합의는 미국과 북한 간에 앞으로 이루어지게 될 협상과 대화 분위기를 긍정적이고 발전적으로 조성하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상당수의 미군 유해가 북한의 군사적 요충지에 묻혀 있는 현실을 고려할 때, 북한당국의 유해 발굴 허용은 미국을 신뢰할 수 있다는 하나의 증표로도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정전협정 체결 65주년을 맞은 7월 27일 한국전쟁 중 북측에서 사망한 미군의 유해가 북한 원산 갈마비행장에서 경기도 평택 오산공군기지로 송환되고 있다./사진=사진공동취재단
미국 국방부는 6·25전쟁 당시 8만3000여 명의 미군이 실종됐고, 그 가운데 5500여 명은 북한에서 사라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미국은 정전협정 체결 이후인 지난 1954년 북한 측과의 협상을 통해 2234구의 유해를 송환받았으나 곧 중단됐고, 1988년 12월에 이르러서야 ‘북미 간 유해송환협상’을 재개했다. 당시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북미회담에서 북한의 외교부장 김영남(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레이건 행정부 당시 슐츠 국무장관에게 보낸 ‘평화제의 서한(書翰)’을 접수하는 형식으로 처음 접촉했던 것이다.

이후인 1990년 4월 미국과 북한 간 참사관급 접촉에서 미군 유해 송환문제가 처음으로 공식화됐으며, 20여 차례의 공식-비공식 접촉과정을 거쳐 이듬해인 1991년 6월 판문점에서 ‘미군 유해의 추가 송환 및 발굴을 위한 미-북공동위원회’가 구성됐고, 1993년 8월에는 ‘미군 유해 송환 등에 관한 합의서’가 발효됐다.

1996년 1월 하와이에서 진행된 회담에서 미국과 북한은 비로소양국 공동으로 유해발굴단을 구성하기로 합의했고, 200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해마다 양국 실무대표단이 발굴작업을 시작하기 전 실무회담을 열어 “공동발굴지역, 규모, 횟수, 인원 등”과 관련된 세부 합의를 했고, 2007년 4월까지 모두 436구의 미군 유해가 송환됐다. 이 유해 중 1990년부터 1994년까지 송환된 208구는 북한이 단독으로 발굴해서 미국에 인도한 것이었으며, 1996년 이후 2005년까지 222구는 미국과 북한의 공동발굴단이 구성되어 인도된 것이다.

이렇듯 미군 유해 발굴과 송환은 미국과 북한 모두 인도적인 입장에서 진행하는 사업이라는 점을 상호 인정하는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였으나, 양국 간의 정치 외교적 관계 변화에 따라 송환에 필요한 회담 또는 발굴작업이 지연되거나 중단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특히 북한이 송환한 미군 유해 중에는 인골(人骨)이 아닌 ‘동물뼈’도 섞여 있어 북한당국이 외화를 벌기 위한 수단으로 인골을 이용했거나, 아니면 유해 발굴이나 유전자 감식기술이 형편없었던 것이 아니냐는 문제를 제기케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북한이 6·25전쟁 당시 실종되었거나 사망한 미군의 유해를 송환하기로 합의한 것은 ‘6·12 싱가포르합의’ 가운데 하나인 제4항을 북한 측이 처음으로 이행하는 사례이기 때문에 양국 간 신뢰를 구축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하게 될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또한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도 재야(在野)와 해외참전협회 등으로부터 그동안 유무형적으로 받아왔던 미군 유해 송환협상 재개요구와 압력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는 전기(轉機)와 명분을 가질 수 있게 됐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양국 간 합의사항을 이행하는 데 가장 큰 관건인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가 이번 유해 송환 합의를 계기로 어떻게 탄력을 받아 구체적이고 세부적으로 이루어질 것인가 하는 점에 있다. 즉, 북한이 ‘유해 송환 합의’를 통해 ‘종전선언’ 등의 반대급부를 요구하는 가운데 ‘비핵화’에 관해서는 소극적인 입장을 견지하지 않을 것인가 하는 현실적 우려를 결코 배제하기 힘들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처럼 이번 유해 송환 합의로 양국이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라는 길로 순차적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 과정에서 북한당국의 성실하고도 진정성 있는 상응하는 조치가 그 어느 때보다 기대된다고 하겠다.

강석승
21세기안보전략연구원장
행정학 박사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8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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