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이석태 전 세월호 특조위원장, “특조위가 있을 때 배가 올라왔다면…”

머니투데이 더리더 임윤희 기자 2018.04.15 09:30 카카오톡 네이버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이제는 세월호에 대한 인터뷰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며 이석태 전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은 손사래를 쳤다. ‘벌써 몇 년이 지나 이제 2기가 출범을 앞두고 있는 마당에 지난 이야기 자꾸 해서 무엇하느냐’고 묻는다.
 
지난 이야기를 자꾸 되새김질해야 바른 방향으로 나가는 거 아니냐는 말에 흔들리는 눈치다. 4년이라는 시간은 우리가 사회의 어른으로 다시 한 번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며 책임을 생각해봐야 하는 시간이었다. 

2014년 4월15일 인천 연안여객터미널을 출발, 제주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4월16일 전남 진도군 병풍도 앞 인근 해상에서 침몰해 탑승객 476명 가운데 172명만이 생존했고, 300여 명의 사망ㆍ실종자가 발생했다. 

특히 세월호에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난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 324명이 탑승해 어린 학생들의 피해가 컸기에 지켜보던 국민들까지도 한동안 우울증에 시달렸다. 

구조의 골든 타임을 놓쳐 큰 희생으로 이어진 만큼 세월호의 진상 규명에 대한 국민적 염원은 대단했다. 하지만 세월호 문제를 가지고 여야가 대립해 정쟁으로 발전하게 되면서 조사는 속도가 더뎠다. 

그 결과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는 사건 발생 1년이 지난 후에 출범하게 된다. 게다가 출범 후에도 어려움이 많아 8개월이 지나서야 겨우 조사팀을 꾸렸다. 조사의 첫 테이프를 끊는 데만도 너무 큰 힘을 소비했다. 결론적으로 특조위에서는 선체를 보지도 못한 채 강제로 수사를 종료해야만 했다. 

1기 특조위호의 선장을 맡았던 이석태 위원장은 당시를 떠올리며 ‘가슴이 먹먹하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2016년 12월 촛불 행진 맨 앞에 선 사람들은 세월호 유가족들이었다’고 말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사유 중 세월호 7시간에 대한 것을 언급하며 ‘헌법재판관들의 전체 합의에는 이르진 못했지만, 촛불의 중요한 불씨가 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2014년 4월16일 발생한 세월호 참사가 벌써 4주년이 됐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큰 해양사건이기도 하고 희생자도 많았기 때문에 4주년 정도 됐으면 사건 전반에 대한 경위가 규명되고, 참사 피해자에 대한 장례를 비롯한 여러 가지 절차도 마무리됐어야 한다. 추모재단과 같이 사건과 관련해 위로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여러 기구도 만들어졌어야 하는데 알다시피 그런 것은 거의 안 됐다.
왜 참사가 발생했고, 책임자가 누군지 밝혀내는 게 가장 핵심적인 문제다. 그것을 토대로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순서다. 세월호 특조위(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는 이런 것을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위원장으로 1년 9개월 정도 했다. 특별한 성과가 없이 끝났기 때문에 책임감도 많이 느끼고, 아쉬움이 크다. 4년이 흘렀지만 가슴이 먹먹하다.

-세월호 특조위가 2015년 1월1일 설치돼서 2016년 9월30일 해산됐다. 해산 자체도 강제 해산이었다. 장관급 인사였지만 대우가 좋지 못했다는 건 이미 많이 알려졌다. 처음 위원장 제안을 받고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궁금해진다
▶특조위는 세월호 참사 특별법에 의해 만들어진 기구다. 만들어지는 것도 쉽지 않았다. 참사 이후 유가족을 포함해서 여야 간에 갈등이 많았다. 갈등 끝에 타협적으로 만들어진 게 ‘특별법’이고 그 법에 의해 만들어진 게 특조위다.
위원장 제안을 받았을 때는 정부기구 관련 경험이 많지 않고, 직업도 변호사라서 과연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마음은 무거웠지만 유가족들의 간곡한 요청으로 맡게 됐다.
전폭적 지원이 예상됐으면 부족한 능력이나마 열심히 해 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텐데, 그러지 못했던 상황이라 어떻게 위원회를 이끌어 가야 할지 걱정이 많았다. 참사의 성격상 조사를 제대로 해야 할 상황임에도 여건 조성이 안 됐었다.

-세월호 특조위는 규모도 컸고 청문회 개최 권한도 있었지만 이슈화가 부족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한편으로는 분명히 그런 면이 있겠다. 4월 참사 이후, 11월이 돼서야 여야 간 조정에 의해 법이 만들어졌다. 이미 7개월이 경과했다. 그리고 위원회가 구성에 첫걸음을 뗀 것은 그 다음해였다. 실제 위원회 활동은 더 뒤에 이루어졌다.
시간상으로 지연된 점이 있다. 사건 자체가 워낙 규모가 크고 국민적 공분이 큰 데 반해 국회 공방 때문에 한 걸음도 못 나가고 있었으니까 관심이 떨어졌다고 보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특조위 활동에 대해서는 그때부터 시작했다는 것을 언급해서 아직 걸음마를 떼지도 않은 것을 부각시킨 면이 있다.

-특조위 기간의 성과와 의미를 언급해 준다면
▶특조위는 2016년 9월에 해체됐다. 배가 올라오고 선체조사위원회가 활동한 지도 거의 1년이 돼가는 지금의 시점과 조금 차이가 있다.
특조위가 만들어지고서도 2015년 8월 초가 돼서야 비로소 조사관이 채용되고 예산이 배정됐다. 그런데 9월에 해산됐으니까 활동 1년 만에 끝난 것이다. 계량화할 순 없지만, 3분의 1정도 기초조사를 끝내고, 본격적으로 조사하려던 참에 박근혜 정부에 의해 해산됐다. 국민이 기대하는 성과를 내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다만 주춧돌을 놓았다고는 말할 수 있다.
또 3번의 청문회 동안 사건 조사와 관련해 다양한 문제를 제기했다.
청문회에서는 세월호 선체를 조사하지 않는 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과 선체를 올리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등의 사실을 알아냈다. 
그 무렵 해경과 청와대 사이에 오고 간 중요한 교신이 있었다는 것도 밝혀냈다. 여전히 미스터리이긴 하지만 배가 가라앉고 구조가 덜된 것에 관한 큰 문제가 있다는 것에 대한 의구심을 드러내 국민과 공유할 수 있었다.

-1기 특조위 활동을 마치면서 아쉬운 게 많았을 것 같다. 어떤 것들이 떠오르나
▶특조위는 크게 세 가지 직무가 있었다. △왜 배가 가라앉았는지 진상을 조사하는 것 △유사한 참사가 일어나도 잘 대처해 나갈 수 있도록 대안을 마련하는 것 △피해자 가족의 지원이었다.
그런데 위원회가 제대로 활동을 못했다. 특히 진상을 밝히려면 배를 봐야 하는데, 가라앉아 있는 배를 볼 수는 없는 노릇이고, 배가 올라오는 게 중요했다. 2015년 봄 박근혜 정부는 여론에 밀려 배를 올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 후 1년이 지나도 배는 안 올라왔다. 예정대로라면 특조위 마칠 쯤엔 이미 배가 올라와 있어야 했다. 그때 이 정부가 과연 배를 올릴 생각은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일단 배가 올라와야 ‘잠수함 충돌설’이라든지 확인할 수 있는데 할 수 없었다. 그게 제일 아쉬웠다. 이후에 7개월 만에 배가 올라왔다. 특조위가 있을 때 그 배를 조사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세월호 참사가 국민들에게 주는 상실감이 남달랐다. 이 사건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의 불씨가 됐다
▶그렇다. 통상적인 구조활동이 이루어졌다면, 배를 나와서 갑판 위에 올라오게 했다면 모두 구조될 수 있다는 것이 지금까지 전문가들의 견해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고 다 배 속에서 가라앉게 됐다. 박 전 대통령은 그에 대한 책임이 크다.
특히 그런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빨리 현장에 가서 정확한 사실을 파악하고 정확한 구조조치를 취해야 한다. 청와대에서는 그 당시 현장 사진만 보내라는 등의 정보 보고만 요청했다. 대통령은 5시 이후에야 중대본에 도착했다. 그게 바로 논란이 된 7시간이다.
큰 참사에 정부의 대처가 무능했다. 대통령은 일종의 최고 지휘관인데 참사 이후 구조 지시가 상당히 늦었다. 7시간이 지나서야 현장에 나타나서는 일반 국민은 이해가 안 되는 발언을 했다. ‘학생들이 구명조끼를 입었으면 쉽게 눈에 띄었을 텐데’, ‘왜 이렇게 더디냐’는 식으로 말을 했다. 도저히 말이 안 되는 말이다. 그런 게 국민들이 보기에 쇼킹했던 것이다.
그래서 특조위에서는 대통령이 제대로 조치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를 밝히려 했다. 탄핵 이전까지는 대통령 보고 시간이 오전 10시로 돼 있었다. 그래서 보고부터 조치까지 7시간 공백이 있다고 알려졌었다. 그런데 탄핵 이후 보고 시간이 조작됐다는 게 밝혀졌다. 얼마나 무책임한가.
특조위는 박근혜 정부 입장에서는 태어나지 말아야 했던 존재였다. 대통령의 7시간을 조사한다고 하니까 해체 수준까지 갔다.
2016년 12월 촛불이 모이면서 촛불 행진 맨 앞에 선 사람들은 세월호 유가족들이었다. 참사 규명을 촉구하고 책임을 지라고 요구했다. 탄핵 사유 14가지 중 세월호 7시간 공백도 있다. 헌법재판관들의 전체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촛불의 중요한 불씨가 됐다.

-최근 개헌 과정에서도 세월호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국민의 안전과 생명권의 문제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사건이었다. 사건 전후로 달라진 것이 있다면
▶특조위도 안전문제와 관련해서 논의하고 있었지만 갑자기 해산돼버렸다. 그 이후 검사가 엄격해졌다든지 행정시스템은 바뀌었겠다. 그래도 아직까지 재난에 대한 안전체계는 미흡하다고 본다. 재난에 대한 안전체계는 이제부터 마련하기 시작하는 것 같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하기엔 무리가 있다. 특조위 2기 출범이 눈앞에 있는데, 그런 것들이 2기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 한국의 공익인권소송2를 냈다. 소개를 부탁한다
▶재미있는 책은 아니다.(웃음) 일종의 로스쿨 교과서 같은 책이다. 크게 두 파트로 나눴다. 한 파트는 총론 격이고 한 파트는 각론 격이다. 거기에 중요한 사례들을 담았다. 1권은 1980년 6월 항쟁 이후 2010년까지 공익인권에 관한 제일 중요한 사례를 넣었다.
책의 성격상 2권은 예정돼 있었는데 이번에 2권이 나온 것이다. 2권은 2010년 이후부터 최근까지의 중요한 사례를 24건 정도 넣었다. 물론 탄핵심판선고도 포함돼 있다.

기본적으로는 로스쿨 학생과 젊은 변호사들을 위해 쓴 책이다.
책에 담겨 있는 사건들은 아주 중요한 역사적 소송들이다. 망원동 수재 집단 손해배상 청구 소송, ‘호주제 폐지’ 등 법조계 후배들과 꼭 공유할 필요가 있는 사례를 담았다. 소송에서 당사자와 변호사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사건을 통해 사회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담았다.
1권에는 유명한 소송 중의 하나인 ‘군가산점제’의 사례도 담았다. 앞서 말한 ‘호주제 폐지’와 같은 경우는 지금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이전에는 호적이라는 게 있어서 가족관계증명서, 기본증명서, 혼인증명서가 담는 정보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 이런 호적등본을 누구나 뗄 수 있었다. 지금은 본인 허락 없이는 안 된다. 결정적으로 한 가정에서 남자 우위를 없애고 평등하게 만들어가게 했다. 역동적이고 사회가 변하는 모습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지난해 일 년 동안 동료들과 함께 2권을 펴냈다. 지금 서울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는데 이번 학기 교재로 쓰고 있다.

-2018년 계획이 있다면
▶특별한 계획보다는 이제까지 늘 해오던 주변의 약자와 소수자를 위한 일을 계속 해나갈 생각이다. 억울하게 피해를 본 사람을 재판을 통해 구제하는 방법으로 꾸준히 해나가겠다.”

이석태 변호사
現 법무법인덕수 대표변호사
1953년 출생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
시민평화포럼 공동대표 
참여연대 공동대표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4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임윤희 기자 yunis@mt.co.kr
imgo626@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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