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보수라는 것

[李達坤(이달곤)의 思政慢文(사정만문)]

가천대학교 이달곤 교수 2018.04.03 10:20 카카오톡 네이버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전번 호의 ‘소위 진보라는 것’에서는, 진보주의라는 것이 정통적인 정치이념으로 진화되지 못했다는 점과 진보라는 용어의 의미가 유동적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번 호에서는 대척점에 있는 ‘보수’를 일별(一瞥)해 보고자 한다.

우리 사회의 ‘보수’라는 것
언론이나 정치권에서 거론하는 ‘보수’는 정치이념의 출발점인 보수주의와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다. 당파나 진영의 관점에서 ‘보수’라고 칭할 때는 보통 꼴통수구(極端守舊)로 몰고 간다. 조선시대를 연상시키는 인간관계, 6•25전쟁과 남북대치, 1970년대 권위주의 개발 등과 같은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군처럼 본다. 미국 성조기를 마구 흔드는 시위대,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꼰대, 그리고 대구와 경북(TK)을 보수의 본향으로 표상한다. 

이렇게 프레임화된 ‘보수’는 보수주의 철학과는 동떨어진 수구적 행태의 변종에 불과한 것이다. 수구(守舊)라는 것은 과거에 얽매이는 것이며 시대상에 대한 수용과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어서 사실상 보수주의와는 대치되는 것이다. 진정한 보수주의자는 자신의 비전이 ‘꼴통보수’와는 괴리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정치이념은 이성적인 논리의 영역에서 존재하지만, 현실에서는 감정적이고 심리적인 이유, 더 나아가 이익을 보호하고 유대를 유지하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키는 요소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래서 대놓고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고 싶지는 않은 이들이 다수 존재한다. 이른바 ‘샤이(shy)보수’가 적지 않다. 한때 영국에서는 7~8%에 육박했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보수’를 꼴통으로 몰고 가거나 자유주의자를 극좌로 몰고 가는 세상의 논박 과정에는 교묘한 정치계산(political calculus)이 끼어들어 있다. 소위 정치 지도자가 표를 더 얻기 위해, 추종자들을 악용하여 상대 진영을 뱀보다 더 징그럽게 만드는 것이다. 지지자를 착각에 빠뜨리거나 혼돈상태에 두면서 계속 그들을 활용하는 허위의식(false consciousness)의 악용일지도 모른다. 혐오를 통하여 지지세를 넓히는 전략은 현대 투표정치의 가장 큰 폐단이다.

진정한 보수주의란
현대 정치사상에서 보수주의는 사회주의와 대치되는 위치에 있다. 보수주의(Conservatism) 맹아는 1600년대 인간이 도덕적 전통을 중시하면서 생겨났다. 정치적으로는 1794년 프랑스 혁명이 급진적인 방향으로 흐르자 비교적 안전지대에 있던 영국 지식인들이 걱정하는 관점을 중심으로 형성된 사상적 체계다.

보수주의는 인간이나 세상사, 그리고 인과관계에 대한 현실적 비전에서 출발한다. 인간의 도덕성, 지력 그리고 능력에 제약이 있다는 비전(constrained vision)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기반에서 보수적인 사상, 이론, 개성, 스타일이 파생돼 나온다. 인간의 한계, 세상사의 복잡성을 대전제로 할 때, 실질적인 일을 도모할 때 신중해진다. 그래서 과거 역사와 전통을 검토하고, 지켜야 할 가치를 모색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사가 어려움에 닥쳤을 때는 그러한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서 변하는 것(change in order to preserve)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 점이 통상적으로 지칭하는 수구와 차이가 난다. 전통과 제도는 수많은 세대의 삶의 지혜가 축적된 것으로 인식한다. 거기서 벗어나는 것은 이상에 불과하고 좋은 결과를 낳기는 어렵다. 

보수는 과정에 중점을 둔다. 바람직한 사회적 결과를 인간의 능력으로 바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 좌파의 주장이라면, 보수주의는 인간이 복잡한 사회적 결과(social results)를 직접 바로 만들 수는 없고, 오직 그 사회적 과정(social processes)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때문에 그 과정을 정의롭고, 평등하고, 자유롭게 해야 하고, 그렇게 권력이 작동한다면 더 좋은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신조를 가지고 있다. 

좌파와 우파로 대치시키면 논점이 분명해져
사회를 유기체로 보는 보수주의자의 논리와 접근법은 간단할 수가 없고 또 세상사를 다 안다는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그 대신 사회주의 좌파는 인간의 능력을 과신하고 도덕성에 대해서도 신뢰를 갖는다. 그리고 바람직한 결과를 직접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국가권력의 개입과 계획체제를 신봉하고, 정책 설계과정에 기계론적인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 기계론적 시각(mechanical view)은 스위치를 누르면 톱니가 돌아가는 식의 일대일(一對一)의 대응원리를 따른다. 정부가 세금으로 가난한 사람을 도우면 그는 절대가난에서 벗어난다, 공무원 수를 늘리면 청년실업률은 감소한다 등과 같은 단순하고 딱 떨어지는 논리를 선호한다. 인간이 사회적 복잡성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고, 공동선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방법론과 도덕적 덕성을 다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자유, 정의, 평등을 실질적으로 실현할 수 있고 동시에 권력을 선하게 만들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보수주의는 단순한 개별적인 기계적 상호작용이 아닌, 자연적이고 인간 능력 이상의 요소들의 유기적이고 총합적인 작용을 중시한다. 부분집합 이상의 복합기능에 생명과 가치를 불어넣고, 높은 존재에 대한 존경심이 보수주의자들의 골수다. 그리고 인간이 사회적으로 필요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능력이 극히 작다는 현실을 인식한다. 완전한 사회적 공동선의 실현이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고 섣부른 도전은 실패하면서 더 많은 문제를 파생시킬 것으로 본다. 제발 좌파들이 세상의 복잡함을 제대로 파악하고 무엇이든지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비현실적인 전제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한다.

좌파는 보수주의자들이 계속 공동선을 반대한다고 의심한다. 위대한 공동선을 이해하지 못하는 우매함이 문제라고 지적하며 속된 말로 꼴통이라고 몰고 간다. 대부분의 주요한 사회적 개념들이 보수주의자에 의하여 먼저 형성되고 좌파들에 의하여 공격을 받은 역사에서 볼 때, 좌파들은 그들이 말하는 자유나 정의 그리고 평등이 그야말로 진짜라고 주장한다. 보수주의 개념은 덜 진화했고 형식적인 차원이라고 비판한다. 그래서 보수주의자가 방어적인 처지에 놓이는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좌파와 보수주의는 서로 대척점에 존재한다. 

좌파와 우파로 대치해야 진실이 드러난다
‘보수’도 ‘진보’와 똑같이 정치이념으로 볼 수 없고, 단순한 정치집단의 태도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만만찮다. 즉, ‘아니다 주의자’로 낙인찍는다. ‘아니다’ ‘반대한다’ ‘싫다’가 보수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우파는 변화를 거부하는 부정의 철학(negative philosophy)을 배태했다고 비난한다. 적극적으로 ‘무엇이다’ ‘어떻게 하자’고 하지 않고 항상 의심하고 반대에 골몰한다고 비난한다. 

용어상 ‘진보’와 ‘보수’를 대치시키는 것은 본질을 호도하고 끝없는 허위 논쟁만을 유발한다. 진보는 바탕이 없고, 보수는 보수주의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정치적 태도에 불과한 것이기에 서로 비난하고 충돌을 일삼는 데는 쓰임새가 있을지 모르지만 공동체의 인식을 고양하고 진정한 경쟁을 도모하는 데는 부족하다. 그래서 정치이념을 입체적으로 정확하게 위치시키고 좌파와 우파로 나누어서 그 사상의 원류를 따져서 경쟁시키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 필요하다.

[이달곤 사정만문]은 이 교수가 ‘국민정치와 국가정책을 고민한다는 사정(思政)’이라는 이름으로 만필을 쓴 것임.

이달곤 교수
가천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정책학 박사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4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imgo626@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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