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보수의 가치

[안민호의 여론객설(輿論客說))]

숙명여자대학교 안민호 교수 2018.04.05 16:13 카카오톡 네이버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여론이 이 정도로 일방적이었던 때가 있었나 싶다. 집권 1년이 다 돼가는 시점에서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은 여전히 70%를 오르내리고, 민주당 지지율은 50%를 넘나든다. 범 보수로 분류되는 경쟁자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의 지지율은 합해도 20% 남짓이고, 홍준표 등 보수 정치지도자들은 웃음거리로나 존재감을 드러낸다. 보수는 우리 사회에서 더 나쁠 수 없을 정도로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전쟁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전쟁은 여론 전쟁, 여론 간의 전쟁이다.” 보수 이념의 창시자 쯤 되는 에드먼드 버크의 말이다. 그는 프랑스 대혁명과 구체제의 몰락 그리고 이어진 극도의 혼란이 궁극적으로는 여론 전쟁, 사상(思想) 전쟁에서 보수주의가 패배한 결과라고 보았다. 패배를 넘어 새로운 혁명적 사상에 대항할 수 있는 체계적 보수 이념 자체가 부재(不在)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고 그런 인식의 토대 위에 만들어진 것이 근대적 보수주의 사상이다.

한국 보수의 몰락
2018년 3월 한국에서, 정치세력으로서의 보수도, 사상으로서의 보수주의도 유사한 위기 상황에 빠져 있다. 이태 전의 촛불 시위와 대통령 탄핵, 그리고 박근혜, 이명박 두 전직 대통령의 동시 구속으로 우리나라의 보수 정치세력은 그 명맥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촛불 혁명’이라는 표현이 단순한 수사(修辭)가 아닌 상황이다. 물론 역사상 유례없이 평화적으로 진행된 촛불 시위가 폭력과 무질서를 동반한 여느 혁명들과도 달랐던 것이 사실이고 또 두 대통령의 범죄 행위에 대한 합법적 사법처리를 놓고 혁명 운운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상황을 여론과 사상 전쟁에서의 보수주의의 패배 혹은 부재라는 맥락에서 설명하는 것은 꽤 설득력이 있다. 한국의 보수가 이 지경이 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이명박과 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 때문이다. 보수주의에 대해 무지하고 또 오해했던 두 지도자와 그 주변 사람들의 책임이 크다. 아이러니한 것은 지금 구금되어 있는 두 전직 대통령들이 여론과 사상 전쟁의 중요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검찰 수사과정에서 드러난 것처럼 국정원 등의 인터넷 댓글 공작이나, 역사 교과서 국정화, 문화계 블랙리스트 문제 등은 이들 보수정권이 이런 여론과 사상 시장에서의 승리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방증한다. 더할 수 없을 정도로 적극적이었고 공세적이었다. 그런데도 철저하게 패배했다. 아니 바로 그랬기 때문에 실패했다.
 
보수의 덕목은 포용과 통합
문제는 그들이 선택한 방식이 보수의 가치에 반하는 것들이었다는 점이다. 편을 가르고 투쟁하는 것은 보수의 가치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이른바 진보로 분류되는 정파(政派)의 방식이다. 분명한 당파적 정체성을 가지고 그 이익을 최대화할 수 있도록 정파 간 노선 투쟁과 연대(連帶)를 도모하는 것이 진보의 방식이다. 계급적 자각과 그것에 기반한 정파적 투쟁이 진보의 특성이라면, 계급을 뛰어넘는 공공선의 추구가 보수의 가치다. 연대와 협력이 진보의 덕목이라면 보수의 덕목은 포용과 통합이다. 연대와 협력은 정파성에 기초하고 포용과 통합은 탈 정파성에 기반한다.

서민과 노동자,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를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진보 정당은 대개 계급적 당파성을 분명히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언뜻 생각하면 이런 진보 정당의 당파성에 대한 논리적 반대가 부자와 기득권자를 위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지만, 그것은 가당치 않다. ‘부자를 위하는 보수 정당’은 보수를 공격하기 위한 진보의 프레임이다. 그런데도 한국의 보수는 반공주의라는 협소한 틀 속에 자신을 가둠으로써 제대로 된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했고 진보의 비판으로부터도 스스로를 방어하지 못했다.

탈 정파성이 보수의 핵심 가치
소수약자를 대변한다는 진보적 입장에 대응할 수 있는 보수의 정체성은 특정 계층과 일부 집단이 아닌 구성원 전체를 위하고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 전체의 이익에 복무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매슈 아널드가 “탈 정파성이야말로 보수의 핵심적 가치”라고 말한 것의 의미다. 보수당은 당연히 부자가 아닌 공동체 전체를 위하는 정당이어야 한다. 공동체 또는 국가 전체를 생각하는 것과 소외 계층을 위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대립하는 것만도 아니다. 도리어 상호보완적이다. 현실 정치에서는 보수, 진보 모두 어느 한쪽만을 말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이는 있다. 진보는 소수약자를 위해 정파적일 수 있고 또 그래야 하지만, 보수는 전체를 생각해야 하기에 탈 정파적이어야 한다. 그것을 정체성으로 삼아야 보수가 여론 전쟁에서 유리하다. 그런 보수가 진보처럼 정파적이 되면, 부자와 기득권자를 위한 정당이 된다. 그것이 함정인데 두 전직 대통령은 스스로 그 속에 들어갔고 그래서 패배했다.
  
보수 진보 간의 정치적 투쟁도 그 자체로 진보에게 유리한 프레임이다. 통합을 지향하는 보수는 진보와 달리 자신의 색깔을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는 것이 좋다. 그것이 탈 정파적이고 포용적 정체성에 부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보수 대통령들은 진보의 프레임인 정파적 대결 프레임을 따랐고, 진보의 논리적 반대로 스스로를 규정함으로써 보수를 왜소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당연히 패배로 가는 길이었다. 보수에게 불리한 이런 정파 대결 프레임이 지배적이 된 것에는 보수적 당파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진보와의 정치적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선 보수언론의 책임도 적지 않다.
   
자기희생적 지도자

보수의 중요한 덕목으로 탈 정파성이라는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탈 정파성이 공동체 전체의 이익과 공공선 실현에 복무하기 위해서는 ‘자기희생’이라는 덕목이 추가돼야 한다. 탈 정파성이 보수라는 동전의 한 면이라면 자기희생은 그 동전의 다른 면이다. 자신이 속한 계급과 계층의 이익에 거리를 두고 스스로 절제하고 희생할 수 있는 드물게 훌륭한 품성을 가진 소수가 있어야 보수의 가치가 완성된다. 그런 자기희생적 소수가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는 공동체가 보수가 지향하는 사회라 할 수 있다.

높은 수준의 절제와 도덕성을 진보의 가치로 보는 이들도 있지만, 그것은 전혀 잘못된 이해다. 지도자 개인의 도덕성과 자기희생이라는 덕목은 진보보다 보수에게 훨씬 중요한 가치다.

전체 공동체를 위해 재산은 물론 목숨이라도 내놓을 수 있는 이가 바람직한 보수 지도자일 텐데 두 전직 대통령은 이 대목에 있어서도 절망적이었다. 자신과 한줌도 안 되는 피붙이, 측근들의 이권에만 골몰하는 자가 보수의 지도자라면 그런 보수는 망할 수밖에 없고 망해야 한다. 더 망해야 정신 차린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옳은 지적인 듯싶다.
한국에서 정치 세력으로서의 보수, 사상으로서의 보수주의는 철저하게 실패하고 또 패배했지만, 그렇다고 보수적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회 통합을 지향하는 포용성과 탈 정파성, 그리고 절제와 자기희생이라는 덕목은 사회 공동체 유지를 위한 가장 근본적이면서도 보편적인 가치다. 역설적이게도 보수가 망할수록 그것은 희소해지고 도리어 더 중요해진다. 그 누구든지 그 가치를 지향하고 또 실천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진짜 보수다.
 
안민호 교수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 학부 교수
언론학 박사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4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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