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지방자치 역사의 태동, 민선 1~2기

[6·13 지방선거 특집]민선 1기부터 6기를 되돌아 보다(1)

머니투데이 더리더 편승민 기자 2018.01.17 10:07 카카오톡 네이버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광복 직후인 1949년, 지방자치법이 제정되면서 우리나라 지방자치의 역사가 시작됐다. 당시 지방자치법에 의해 특별시장과 도지사는 대통령이 임명했고, 지방의회 의원은 주민이 선출했으며, 시·읍·면장은 의회에서 선출됐다. 이런 제도는 1960년 최초로 모든 자치단체장이 직선제로 선출되면서 변화의 국면을 맞았다. 

1960년 12월 12일 동대문구 제2선거구 투표소에 걸려있는 선거홍보용 플랜카드-올바른 내 한표에 우리서울 발전하다 ⓒ국가기록원 제공
그러나 1961년 5월 군사혁명위원회에 의해 지방의회가 해산되고 단체장 선출은 임명제로 다시 바뀌면서 지방자치는 후퇴하게 됐다. 1972년 유신헌법 부칙 제10조에 의하면 ‘지방의회는 조국통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구성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면서 지방의회 구성은 무기한 연기됐다.

1972년 12월 27일 유신헌법 공포식 ⓒ국가기록원 제공
하지만 지방자치를 위한 노력은 1980년대부터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1987년 당시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는 국민들의 개헌과 민주화 요구를 받았고, 6.29민주화선언을 했다. 
6.29민주화선언의 내용에는 인간존엄성 존중과 인권신장, 사회정화조치 단행, 지방자치와 교육자치의 실행, 자유 언론의 창달, 선거법 개정을 통한 공정한 경쟁의 보장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통한 평화정권 이양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6.29민주화선언이 있고 4개월 후인 1987년 10월 27일 제9차 개헌안은 국민투표에 부쳐졌고, 투표자의 93.1%가 압도적인 찬성표를 던지며 개헌이 통과됐다.
6.29민주화선언의 약속을 이행하는 모습을 보였던 노태우는 15년 만의 국민 직접선거에서 제13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되는 쾌거를 이뤘다. 그리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시작으로 1991년에는 기초의원 선거와 광역의원 선거가 시행됐고, 1995년에는 비로소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로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이뤄지면서 민선 1기 지방자치시대가 열렸다.

민선 1기, 지방자치 부활을 알리다

민선 1기의 가장 큰 성과와 변화라면 단연 ‘민본행정 구현’이었다. 지방자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지자체들은 우선순위와 가치를 ‘주민’에 두기 시작했다. 지자체들은 단체장실 옆에 주민과 직접 만날 수 있는 민원실을 설치하고, 소외계층을 위한 사회복지 사업을 대폭 확충하는 등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95년 6월 27일 김영삼대통령(14대 재임 1993.02~1998.02)내외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시 투표하는 모습 ⓒ국가기록원 제공
주민들의 투표로 선출된 자치단체장들은 저마다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시기에 수익사업을 통해 지역경제 발전에 큰 기여를 했던 대표적인 지자체로는 충남 보령시와 제주도를 들 수 있다. 보령시는 대천해수욕장 진흙을 이용해 만든 머드화장품을 개발했고, 제주도는 먹는 샘물인 ‘삼다수’를 개발하는 등 지역 특색을 살린 아이디어들이 대박을 쳤다. 과거에는 중앙정부가 모든 것을 계획하고 지방정부에 지시하거나 전달하는 식으로 사업을 시행했다면, 민선 이후 적극적인 지역 사업 발굴과 경제 활성화 등에 노력하면서 지방 발전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또한, 민선시대가 시작되면서 사이즈도 달라졌다. 민선 1기가 시작됐을 때 공무원 정원은 51,252명이었는데 3년 뒤인 1998년에는 총 58,436명으로 7% 가량 증가했고, 예산 규모는 7조 7,559억 원에서 9억 8087억 원으로 25%가 증가했다.
물론 민선 지자체 출범이 처음이어서 경험 부족이나 조사 오류 등으로 드러난 부작용과 마찰도 꽤 있었다. 그리고 지자체장 자질론 시비, 의회경시 등의 풍조가 생기면서 행정과 의회가 파행되는 등의 문제도 빚어졌다. 지역에서는 지역이기주의 현상인 님비(NIMBY, Not In My Back Yard)와 핌피(PIMFY, Please In My Front Yard) 현상들이 나타나기까지 했다.
그리고 민선 1기 지자체장들이 꼽은 지방자치의 최대 장애물은 지방 권한의 미미함이었다. 지방자치의 3대 핵심과제인 인사·조직·재정 분야에서 단체장 자율권 확보가 되지 못해 중앙정부와 광역자자체의 간섭과 통제를 받았던 것이다. 인사는 부단체장을 제외하면 자유로웠지만, 조직의 경우 직원을 한 명 더 늘리는 것만 해도 의회와 광역단체, 행정자치부 승인을 받기 어려웠다. 재정은 국세와 지방세 비율이 80:20으로 중앙에 치우쳐져 있어 가장 큰 대립을 보였다. 이와 함께 지금까지도 선거 때면 화두가 되는 기초단체장 정당공천 배제에 대한 목소리도 높았다.
하지만 민선 1기는 지자체가 풀뿌리 민주주의 싹을 틔웠다고 평가받는 기적 같은 변화임은 분명했다. 시기상조라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시작된 지방자치는 민주주의라는 시대적, 국민적 염원에 따라 사회 전반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고, 관치시대에서 볼 수 없었던 지자체와 주민의 적극적인 주인 의식도 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민선 1기 (재임기간 1995.7.1~1997.9.9) 주목 이사람!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대한민국 15대 대통령)
1990년 당시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는 10월 8일부터 20일까지 13일간 지방자치제 실시를 요구하면서 단식 투쟁을 단행했다. 그는 단식 중에 찾아온 당시 김영삼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에게 “나와 김 대표가 민주화를 위해 싸웠는데 민주화란 것이 무엇이오. 바로 의회 정치와 지자체가 핵심 아닙니까? 여당으로 가서 다수 의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어찌 이를 외면하려 하시오”라고 말했다. 이런 그의 노력은 지방자치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됐고, 그는 지금까지도 한국 지방자치 역사의 아버지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으며, 1997년 대선에서 승리해 대한민국 15대 대통령이 됐다.

조순 서울시장
1995년 7월 1일 초대 민선 서울시장이 된 조순 시장은 취임식 하루 전날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일어나 취임식을 연기한 채 사고 수습에 나섰다. 그의 취임식은 두 달 후인 9월 1일 남산 백범광장에서 열렸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등 대형사고들이 잇따라 일어나자 서울 시정의 화두는 ‘안전’이 됐고, 조 시장은 ‘도시안전과 방재’를 시정 핵심으로 삼았다. 또한, 그동안 계속됐던 개발의 관성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김두관 남해군수(現 더불어민주당 의원)
“행정과 주민을 연결하는 심부름꾼이 되겠다”며 서른 살 나이에 남해군 이어리 청년이장이 됐던 김두관은 1995년, 37세의 나이로 민선 1기 남해군수에 당선됐고 전국 최연소 단체장이 됐다. 그는 △기자실 폐쇄로 공무원과 기자단 유착 근절 △군수 관사 철거 △전국번지점프 대회 개최 △민원인 공개법정 개설 △독일인 마을 조성 △스포츠파크 건설 △마을공동묘지 공원화 시범사업 등 행정개혁 사례 대표적 인물로 꼽혔다.


민선 2기, 지역 주권확립 시대를 열다

민선 2기는 국제통화기금(IMF) 한파로 인해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출범하면서 1기와 달리 지방자치단체들의 우선과제는 경제 살리기였다. 지자체장들은 취임 직후부터 저마다 외자유치 전담부서를 설치하고 투자유치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임창열 경기도지사의 경우 취임식을 외자유치 설명회로 대치하기도 했다. 또한, 각 지자체들은 내부적으로는 지역내 기업들의 부도를 방지하고 실업자 구제 등에 힘을 쓰며 바쁜 일정을 보냈다.
당시는 여야 간 정권교체로 탄생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가 지역통합 정책을 펼치는 시기이기도 했다. 김대중 정권은 영호남 교류를 위해 지자체 교환 방문, 자매결연, 국민화합 행사 등을 수없이 진행했고, 여기에는 지자체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98년 1월 23일 김대중 15대 대통령 당선자, 나라사랑 금모으기 캠패인에 참여 ⓒ국가기록원 제공
민선 2기는 대부분 단체장들이 재임에 성공하면서 민선 1기 정책을 연속적으로 가져가는 형태로 시작됐다. 하지만 2기에 들어 기초단체장들의 비리 적발이 눈에 띄게 늘었다. 행정자치부에 따르면 민선 2기 전국 광역·기초 단체장 가운데 58명이 구속되는 등 사법처리로 중도 사퇴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는 민선 1기 사법처리 대상자 23명보다 약 165%가 증가한 규모로 부정부패의 범위가 깊어졌음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바로 이때부터 지방자치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주민소환제도’ 도입 필요성이 처음으로 제기됐다.
주민소환제는 지방자치단체 선출직 공직자가 임기 중 부정부패 등 심각한 문제가 있을 때 주민 3분의 1이상 투표와 유효투표 과반수 찬성시 해임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주민소환제 도입은 2000년 경기도 고양시 러브호텔 이슈가 기폭제가 됐다. 고양시의 무분별한 러브호텔 건립으로 인해 주민들이 반대운동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 후에 주민에 의한 감시와 제재가 가능한 ‘주민소환제’의 출발점이 됐다. 이는 마을공동체가 화합하여 주민들이 지역 주권을 가져간 대표적인 예로 손꼽힌다. 민선 2기는 부정부패가 끊이지 않고 눈앞의 이익만을 쫓는 지역 사업 등으로 얼룩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로인해 주민들이 도시와 마을의 주인이라는 의식을 갖고 도시설계와 개발을 시민을 위해 하도록 바꾸고, 직접 참여하게 된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다.

민선 2기 (재임기간 1998.7.1~2002.6.30) 주목 이사람!

고건 서울시장
1998년 우리나라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민선 2기 고건 시장이 취임했을 당시는 IMF 금융위기를 맞았을 때였다. 고 시장은 1998년 7월 1일 서울시청 첫 출근을 위해 자택에서 출발해 4호선 혜화역에서 지하철을 탔다. 그는 동대문운동장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고 앉은 자리에서 옆자리 시민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공교롭게도 옆에 앉은 허모씨는 당시 은행감독위원회가 퇴출은행으로 결정한 곳 중 하나에서 근무하는 직원이었다. 고 시장은 “서울시가 전문직·사무직 실직자를 위한 대책을 마련해 실행할 작정”이라고 말하며 애쓰는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했다.
고 시장은 “민선 1기가 주민에 대한 봉사자세를 강화하는 시기였다면 2기는 양적 성장보다는 삶의 질을 높이고 내실을 다지는 시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민선 2기 고 시장의 시정 핵심은 ‘도시계획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2000년에는 처음으로 ‘서울 도심부 관리계획’이 수립됐다. 고 시장의 공약 첫 번째는 ‘걷고 싶은 서울 만들기’로 그는 민선 2기 동안 보행환경, 대중교통 개선에 힘썼다.

김진선 강원도지사
IMF 외환위기 속에서 출발한 김진선 강원도지사 도정의 최대 과제는 폐광 지역 문제였다. 그러나 자치단체로는 처음으로 남북교류가 추진됐고, 금강산 관광도 이때 시작됐다. 1996년 강원도 행정부지사 시절부터 평창동계올림픽 유치를 구상했던 그는 민선 2기 후반기에는 2010 동계올림픽 유치전에도 뛰어들었다. 당시 전북 무주도 유치 의사를 밝히면서 대치전이 계속되어 정부까지 나섰지만 중재에 실패했다.
강원도 평창이 동계올림픽의 우리나라 단독 후보 지역으로 선정되기까지 상당한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 시작은 김 지사의 도정에서 기인했다고 할 수 있다. “평창동계올림픽은 나의 운명”이라고 외쳤던 김 지사는 강원도지사 3선 임기가 끝난 뒤에도 평창과의 인연을 이어갔고, 2전 3기 끝에 평창동계올림픽 유치를 성공시키면서 2011년 10월 19일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장으로 정식 선출됐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1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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