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2월 10일생
1980년대 대한민국 민주화를 위해 20대 청춘을 바친 세대의 대표 주자는 ‘58년 개띠’들이다. 정병국 의원은 그 세대 중에서도 단연 ‘주역’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격동의 20대를 보냈다. 1978년 성균관대 사회학과에 입학했던 그는 바른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학생운동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제5공화국의 신군부 세력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했던 그는 경찰의 수배자 명단에 올랐고, 검거된 후에는 구속과 강제징집 중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됐다. 이로 인해 그는 해병대에 입대하게 됐는데 헌병에 차출되어 군 생활을 마치게 됐다.전역 후 1984년 졸업하고 나서 본격적인 민주화 운동을 시작한 그는 ‘세인출판사’를 운영하며 서울지역의 총학생회 관련 출판을 전담했고 군사정권에 맞서는 학생들을 지원했다. 그러던 중 안기부에 검거되어 실형을 받아 고문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6.29민주화선언 이후 집행유예로 풀려나게 됐는데, 당시 민주화추진협의회 변호사들이 그의 변론을 자청하며 인연이 되어 정치에 발을 들이게 됐다.
정병국 해병대 헌병시절 /사진=정병국 의원실 제공
비교적 평탄한 정치 행보를 이어가던 중,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그에게 다시 한 번 변화가 시작됐다. 그는 새누리당 비박계 의원모임인 비상시국회의 공동대표를 맡았고, 결국 비박계 포함 35명은 탈당을 결정했다. 탈당한 의원들과 함께 개혁보수신당 창당에 힘을 보탠 그는 창당추진위원장을 맡았고, 바른정당 창당과 함께 초대 당대표로 선출됐다.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전 대통령 파면이 결정되자 그는 분당과 창당, 대통령 탄핵까지 본인의 소임을 다했다며 당대표직을 사퇴했다.
현재 바른정당은 국민의당과 양당 통합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바른정당은 지난 11월 9일, 8명이 탈당해 자유한국당에 재입당하면서 원내교섭 단체 지위를 잃었다. 정 의원은 “당을 운영하는데 어려움이 예상되지만 진정한 보수 대통합이 뭔지 보여줘 중도까지 포함한 대통합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2018년은 정 의원 정치 행보에 있어 또 한 번의 중요한 변환점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1958년 12월 16일생
김성식 의원 역시 ‘58년 개띠’답게(?)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1978년 박정희 유신정권 때, 1987년 전두환 군부정권 때 두 번 옥살이를 했다. 그는 진정한 민주화를 위해서는 재야가 아닌 제도권 정치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정치권에 발을 들이게 됐다. 그러나 국회 입성이 그렇게 녹록치는 않았다.
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있던 통합민주당에서 서울 동대문구을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후 제정구 전 의원을 따라 한나라당에 합류하여 16대, 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관악구갑 지역에 출마했으나 모두 낙선했다. 그는 3전 4기 끝에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관악구갑에서 당선되어 국회에 입성했다. 당시 관악구는 통합민주당 지지율이 서울에서 가장 높아 ‘서울의 호남’으로 불리는 곳이었는데 한나라당 의원이 당선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는 보수 정당의 쇄신을 중요하게 여기는 개혁소장파에 속했다. 한나라당 소장파 모임인 민본21의 간사를 하기도 했던 그는 여당 내 야당의원으로 종종 언급됐다. 그러나 이런 쇄신의 요구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는 정태근 의원과 함께 탈당을 감행했다. 그는 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무소속으로 출마해 재선을 노렸지만 낙선했다. 그가 다시 모습을 나타낸 것은 2012년 안철수 후보가 대선 출마선언을 했을 때였다. 그는 안철수 캠프 공동선거대책본부장으로 합류했다.
김성식 의원 역시 ‘58년 개띠’답게(?)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1978년 박정희 유신정권 때, 1987년 전두환 군부정권 때 두 번 옥살이를 했다. 그는 진정한 민주화를 위해서는 재야가 아닌 제도권 정치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정치권에 발을 들이게 됐다. 그러나 국회 입성이 그렇게 녹록치는 않았다.
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있던 통합민주당에서 서울 동대문구을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후 제정구 전 의원을 따라 한나라당에 합류하여 16대, 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관악구갑 지역에 출마했으나 모두 낙선했다. 그는 3전 4기 끝에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관악구갑에서 당선되어 국회에 입성했다. 당시 관악구는 통합민주당 지지율이 서울에서 가장 높아 ‘서울의 호남’으로 불리는 곳이었는데 한나라당 의원이 당선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는 보수 정당의 쇄신을 중요하게 여기는 개혁소장파에 속했다. 한나라당 소장파 모임인 민본21의 간사를 하기도 했던 그는 여당 내 야당의원으로 종종 언급됐다. 그러나 이런 쇄신의 요구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는 정태근 의원과 함께 탈당을 감행했다. 그는 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무소속으로 출마해 재선을 노렸지만 낙선했다. 그가 다시 모습을 나타낸 것은 2012년 안철수 후보가 대선 출마선언을 했을 때였다. 그는 안철수 캠프 공동선거대책본부장으로 합류했다.
한나라당 소장파의원인 구상찬(좌), 김성식(가운데), 정태근(우) 의원이
2012년 10.26재보궐 참패와 여권 위기상황에 대한 이명박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와 측근비리 엄정수사 등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뉴스1
정책통·경제통으로 불리는 김 의원은 지난 12월 국회 4차 산업혁명 특별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선임됐다. 그는 “4차 산업혁명 사회는 정책의 일부만 바꿔 대응하는 것으로는 크게 부족하다. 4차 산업혁명에 부합한 역량을 강화하고 산업구조·기업경영을 개혁하며 금융혁신과 산업 생태계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의원의 그간 발자취, 그리고 그가 밝혀온 정치적 소신은 단 하나, ‘협치’로 귀결된다. 그는 정당이나 이념을 넘어서서 대한민국의 핵심 과제에 대해 논의하고 사회적 공감대를 형상하는 하나의 유기체를 만들겠다는 비전을 갖고 있다. 2018년 무술년을 맞아 김성식의 ‘대의정치’의 꿈이 이뤄질지 기대해본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1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