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천왕의 인재 등용 리더십

한국사에서 읽는 리더십과 신뢰

김용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 소장 2017.08.03 10:33 카카오톡 네이버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편집자주고국천왕의 인재 등용 리더십 신뢰는 사회적 자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프란시스 후쿠야마 2017년 5월 출범한 신 정부의 가장 시급한 과제 가운데 하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 될 것이다. 신뢰는 모든 리더십의 근간이다. 신뢰 회복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지금, 우리는 지나온 역사를 통해 리더십과 신뢰의 문제를 돌아보고자 한다. 한국사에서 가장 신뢰도 높았던 고구려 시대를 중심으로 리더십과 신뢰 문제를 다루고, 1차 년도 기획이 끝난 후에 신라, 고려, 조선의 리더십과 신뢰 문제를 다루기로 한다
정치의 요체 인재 등용
이율곡의 『성학집요』 〈위정〉 편 <용현> 장에서 정치의 요체가 어진 인재를 등용하는 것에 있으며, 임금은 현명한 인재를 알아 일을 맡기는 것을 우선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은나라 탕왕의 재상이었던 이윤과 촉나라 유비를 도왔던 제갈량을 등용한 사례를 예시로 들었다. 이율곡이 거론한 유비의 제갈량 등용보다 16년 앞서 고구려 역사에 훌륭한 인재 등용 사례가 있다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그 주인공은 고구려 9대 고국천왕(179~197)과 최고의 재상으로 꼽히는 을파소다.

고국천왕 인재를 구하다
『삼국사기』는 고국천왕이 키가 9척이고 힘이 대단히 세며, 일에 임해서는 다른 이의 말을 잘 경청하며 결단력과 관대함, 예리함을 두루 갖춘 임금이라고 하였다. 리더가 갖추어야 할 충분한 자질을 갖춘 고국천왕이지만, 즉위 초부터 정치를 잘 한 것은 아니었다. 막강한 세력을 보유한 연나부 때문이었다.

5부족 연합체의 성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초기 고구려에서 연나부가 힘을 얻게 된 것은, 고국천왕의 아버지 신대왕 때부터였다. 서기 165년 연나부의 명림답부는 차대왕을 시해하고, 그의 동생 신대왕을 왕으로 추대했다. 신대왕은 자신을 왕위에 올린 명림답부를 국상에 임명했다. 국상은 명림답부를 위해 신설된 최고의 직위였다. 명림답부는 172년 한나라 대군이 침략해왔을 때, 수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나가 좌원전투에서 적군을 몰살시킨 업적까지 세웠다.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갔고, 덩달아 연나부의 위세도 왕실에 버금갔다. 따라서 고국천왕도 연나부의 협조를 얻기 위해 연나부 출신 우소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 왕비까지 배출한 연나부는 더욱 힘이 커졌다. 우 씨 왕후의 친척 가운데 어비류와 좌가려는 연나부의 귀족이란 배경을 믿고 나라의 법을 어기고, 남의 자식들과 집과 밭을 자기 마음대로 빼앗아 자신들의 배를 채웠다.

고국천왕은 그들을 그냥 둘 수가 없어, 마침내 벌을 주려고 했다. 그러자 191년에 좌가려 등은 도리어 연나부 4대 가문의 힘을 모아 왕궁으로 쳐들어갔다. 반란이 일어나자 고국천왕은 수도에 있던 군사들을 동원해 그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고국천왕은 7년 전 한나라 요동태수가 군대를 이끌고 침략해왔을 때, 직접 정예 기병을 이끌고 나가 좌원 땅에서 크게 물리친 바 있는 용장이기도 했다.

외치에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내치에서 실패했던 고국천왕은 내란을 진압한 이후 새로운 정치를 하고자 했다. 진정한 리더십은 혼란한 상황에서 더욱 필요하다. 그는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인재 등용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추천받았지만, 사양한 안유
고국천왕은 191년 4월 신하들에게 명령했다.“근래에 총애 받는 바에 따라 관직이 주어지고 직위는 덕행으로 승진되지 않으니, 해독이 백성들에게 미치고 우리의 왕실을 흔들고 있다. 이것은 과인이 잘못 때문이다. 너희 4부족에 명령하니, 각각 자신의 아래에 있는 현명하고 착한 사람을 천거하라!”

반란에 연루된 연나부를 제외한 4부족 사람들은 동부 출신 안유를 추천했다. 나라 사람들에게 추천을 받은 만큼 안유는 높은 벼슬을 받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안유는 고국천왕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저는 어리석고 속도 좁은 사람으로 나라의 큰일을 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저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진 서압록곡 좌물촌에 농사짓고 사는 을파소를 추천합니다. 을파소는 의지가 굳고, 의젓하며, 지혜가 깊고 생각이 큽니다. 대왕께서 나라를 다스리려면 그를 반드시 등용하시기 바랍니다”

▲좌관대식기 - 부여 쌍북리에서 출토된 목간으로, 백제에서도 농민들에게 춘궁 기에 곡식을 빌려주고 받는 제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왕의 제안을 거절한 을파소

고국천왕은 안유의 말에 따라 을파소를 찾아오라고 시켰다. 명을 받은 신하는 을파소를 찾아가 고국천왕이 시킨 그대로 겸손한 말과 정중한 예로써 말하였다.

“지금 대왕께서는 현명한 신하를 찾고 있습니다. 안유를 추천 받았으나, 안유는 자신보다는 을파소님이 더욱 현명하다고 사양했습니다. 대왕께서는 을파소님에게 반드시 나라의 일을 돌보게 하셔야 한다면서 저를 보냈습니다. 지금 고구려를 잘 다스려보고자 노력하시는 대왕의 깊은 뜻을 헤아리시어 부디 저와 함께 왕궁으로 가주시기를 바라옵니다”

을파소는 자신을 위해 특별히 신하를 보낸 고국천왕의 인물됨에 마음이 흔들렸다. 이는 삼고초려 고사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을파소가 세상에 등장한 것이 제갈량보다 16년이나 빨랐던 만큼, 혹 207년 유비가 제갈량을 만나러 간 것은 고구려에서 시골 사람 을파소를 등용하여 성공한 것을 알고 이에 자극받은 탓일지도 모른다.

을파소는 고국천왕의 인물됨을 믿었기에 고국천왕을 뵈었다. 고국천왕은 을파소에게 나라를 위해 힘써 달라면서, 우태라는 작위를 수여하고, 중외대부로 임명하였다. 그런데 중외대부는 고구려 최고의 벼슬이 아니라, 장관급에 해당되는 관직이었다. 고국천왕은 비록 을파소가 재주가 비상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벼슬을 맡아본 적이 없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중외대부라는 직책을 주어 먼저 그의 재능을 관찰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을파소는 고국천왕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어리석은 신으로는 감히 대왕의 엄한 명령을 감당하기 어려우니 원컨대 대왕께서는 현명한 사람을 뽑아서 그에게 높은 관직을 주어 큰일을 이루게 하십시오”

을파소에게 신뢰를 준 고국천왕
좌가려 무리가 반란에 실패하고 죽거나 귀양을 갔다고 해도 기존의 귀족들이 전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우 씨 왕후를 중심으로 연나부 귀족들이 여전히 권력을 갖고 있었고, 다른 귀족들도 만만치 않았다. 따라서 한 부분만을 고쳐서는 문제가 많은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을 수 없다고 을파소는 생각했던 것이다. 또 정치를 하려면 다른 이들의 신뢰가 필요한데, 고국천왕이 주는 신뢰가 미흡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고국천왕은 을파소가 중외대부 관직을 사양한 이유와 그의 진심을 알아차렸다. 결단력을 가진 고국천왕은 을파소에게 국상 자리를 주고, 국가의 모든 일을 담당하게 했다. 하루아침에 시골 농부를 국상으로 삼은 파격적인 인사는 당연히 기존 귀족들의 반발을 가져왔다. 귀족들은 을파소가 옛 귀족들과 왕의 사이를 멀어지게 한다고 대왕에게 고자질하는 등 그를 국상 자리에서 끌어 내리려고 했다. 하지만 고국천왕은 한번 결심한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고국천왕은 신하들에게 명령했다.

“귀천을 막론하고 만일 국상을 따르지 않는 자는 친족까지 벌을 줄 것이다”
고국천왕이 을파소에게 최고의 신뢰를 보여주었다. 그러자 을파소도 왕을 믿고 최선을 다해서 정치를 할 수 있었다.

고국천왕과 을파소가 만든 진대법
국상 을파소는 고국천왕의 뜻을 받들어 특정 집단의 권력 독점을 막고, 부정하게 돈으로 관직을 사고파는 일 등을 금지하게 했다. 또 능력 있는 자를 뽑아서 제대로 일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의 노력을 통해 정치가 차츰 바로 잡혀갔다.

고국천왕과 을파소가 백성들을 위한 좋은 정치를 했지만, 백성들의 삶이 하루아침에 나아질 수는 없었다. 가뭄, 홍수, 폭풍, 지진, 메뚜기 떼의 출몰 등 갑작스런 자연재해로 백성들의 삶이 곤경에 처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서기 194년 7월에는 서리가 내려서 한참 뜨거운 햇빛을 받아가며 자라야할 곡식들이 상해서 백성들이 먹을 양식이 부족해졌다. 고국천왕은 즉시 국가에서 보관중인 양식 창고의 문을 열어 곡식을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 하지만 이 해의 자연재해는 너무도 컸던 모양이다. 10월에 고국천왕은 군사들을 훈련시킬 의도로 사냥을 나갔다가 길가에 앉아서 울고 있는 어떤 사람을 만났다. 그의 사연은 이러했다.

“저는 가난하여 논밭이 없어 남의 집에서 일을 해주면서 어머니를 봉양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금년에는 곡식도 자라지 않아 남의 일 해주는 것도 할 수가 없고, 조금의 양식도 얻을 수가 없어서 어머니를 봉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의 사는 꼴이 너무나 힘들고 괴로워서 이렇게 울고 있었습니다”

고국천왕은 백성의 고통을 직접 보고 듣게 되니 가슴이 아팠다.

“아, 내가 백성의 부모인 왕이면서 백성들을 이렇게 고통당하게 하다니. 내 죄로다”

고국천왕은 의복과 식량을 주어 그를 위로하였다. 왕이 백성의 고통에 아파하는 사연은 많은 역사 기록에서 보인다. 그런데 고국천왕은 마음 아파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고국천왕은 을파소 등에게 명하여 홀아비와 과부, 고아, 자식이 없이 외롭게 사는 사람과 늙고 병들거나 가난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먹고 살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식량을 나눠주기로 했다. 하지만 그것은 일회적인 응급조치에 불과했다. 고국천왕과 을파소는 단지 금년의 이러한 행동으로 백성들의 삶을 구제할 수 없음을 알고 항구적인 생활안정 대책을 강구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진대법이다.

진대법은 매년 3월부터 7월까지 국가가 관리하는 곡식을 백성들에게 가족의 수와 식구의 연령, 필요한 식량의 정도에 따라 차등을 두어 빌려주고, 10월에 이르러 국가에서 백성들에게 빌려준 곡식을 다시 되돌려 받는 제도다. 진대법이 고구려에서 가장 먼저 실시되자, 온 나라 사람들이 기뻐했다. 조선 시대에는 진대법과 유사한 환곡이란 제도가 있었다. 조선 후기에 환곡 제도가 다소 변질되어 지방 사또가 봄에 빌려준 곡식을 가을에 높은 이자와 함께 되돌려 받았기 때문에 백성들의 삶을 괴롭히는 수단이 되기도 했지만,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식량이 부족한 봄철에 곡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굶주림을 면할 수 있기 때문에 몹시 필요한 제도였다.

진대법은 백제, 신라 등 다른 나라에서도 본받아 시행하게 된다. 1070년 송나라 왕안석이 실시한 신법 중의 하나인 청묘법은 진대법과 같이 봄철에 백성들에게 양식과 씨앗을 빌려주었다가 가을에 약간의 이자와 함께 돌려받는 제도다. 고구려 진대법은 송나라 개혁 정치의 선구적인 모델이었다.

진대법이 시행되어 고구려 백성들이 살기 좋아졌다는 소문이 주변 여러 나라에 퍼지기 시작했다. 고구려와 이웃한 후한에서는 조조와 원소, 유비, 손책 등 여러 장군들이 자기 세력을 키우면서 싸움을 했다. 일반 백성들은 농사도 제대로 지을 수도 없었고, 수시로 전장에 나가 피를 흘리며 죽어가야 했다. 제왕이 되려는 자에게는 기회의 시기였지만, 일반 백성들에게는 너무나도 괴로운 시대였다. 진대법이 시행된 지 3년 후인 197년 후한 사람들에게 난리를 피해 고구려로 앞 다투어 피난을 왔다. 전쟁이 없고 굶주림이 없는 땅 고구려는 그들에게 낙원이었다. 고대 국가는 인구의 수가 곧 국력의 척도였던 만큼, 진대법의 실시는 고구려 국력 증진에도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농사의 신과 소 - 2세기 고구려는 점차 소를 이용한 농사를 실시하는 등 농업의 비중이 점점 커졌다. 농업의 확대는 빈부 격차와 더불어 춘궁기에 굶어죽는 사람이 생기는 문제를 낳 았다. 당시 시대적 과제를 해결해준 리더가 고국천왕이었다.
을파소를 만든 숨은 인재 안유

을파소가 등용되어 정치가 잘 행해지자, 고국천왕은 안유를 불렀다.

“그대는 참으로 현명한 사람이오. 처음 많은 신하들이 그대를 추천을 했을 때 보통 사람이었다면 스스로 나서서 벼슬을 얻고자 했을 것이요. 그런데, 그대는 높은 벼슬을 탐하지 아니하고, 진심으로 그대보다 재능이 있는 사람을 추천했기에 내가 을파소를 얻어서 함께 나라를 다스릴 수 있었소. 지금 나라가 잘 다스려진 까닭은 모두 그대의 공이나 다름없소. 그대에게도 대사자 관직을 줄 터이니 나라를 위해 힘써 주기 바라오” 고국천왕은 안유의 공을 잊지 않고 그를 높이 평가했다. 대사자는 국상보다는 낮지만, 대단히 높은 관직이다. 안유도 고국천왕이 인재를 아끼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알고 을파소와 함께 나라를 다스렸다. 안유란 인물이 없었다면 을파소도 없었을 것이다. 진정으로 남의 장점을 알아주고, 그가 나보다 뛰어남을 알 때는 그에게 양보할 줄 아는 지혜는 결코 아무에게나 볼 수 없는 귀중한 덕목이다.

신뢰와 인재 등용
을파소는 고국천왕이 죽은 후에도 고국천왕의 아우인 산상왕을 모시고 나라를 다스렸다. 산상왕은 중요한 일에는 언제나 그와 의논을 했다. 하지만 을파소도 203년(산상왕 7년)에 죽었다. 국상으로써 정치를 한 것은 13년에 불과했지만, 그는 고구려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백성들의 영웅이었다. 그가 죽자 온 나라 사람들이 통곡했다.

명재상 을파소 등용의 성공 사례는 조선 시대 관리들도 알고 있었다. 1518년 1월 중종은 정승을 임명하는 문제를 놓고 신하들과 토론을 했다. 이때 검토관 최산두는 고구려 때에 을파소를 산 속에서 맞아서 정승으로 삼은 일이 있는 만큼, 위계보다 능력이 있는 자를 뽑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지금은 과거와 다르므로 여론이 괴이하게 여기면 뽑을 수 없다는 반대에 부딪혀야 했다.

을파소는 분명 뛰어난 인물이지만, 인재를 알아보고 그에게 최고의 신뢰를 주고 소신껏 일하도록 만든 고국천왕이 없었다면 을파소도 없었다. 그래서 고국천왕이 더 대단한 인물인 것이다.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그를 이렇게 평했다.

“고국천왕이 분명한 자기 뜻으로 을파소를 시골에서 발탁하여 여러 사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많은 신하들의 위에 두었고, 그를 천거한 안유에게 상을 주었으니 참으로 훌륭한 왕들의 법을 몸소 익혔다고 하겠다”

김용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 소장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정신문화연구원 역사학과에서 공부했다. 현재 우리역사문화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며, 서울시민대학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등을 저술하여 고구려 역사를 규명하는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의 주요 관심사는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에서 보여준 생활사 연구로, 인간이 왜 이렇게 살고 저렇게 살지 않았을까를 화두로 삼아 역사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고구려 수레 연구’, ‘2차 고구려- 당 전쟁의 진행과정과 의의’, ‘고구려 후기고구려, 수, 당, 북방제국의 대립관계’ 등의 논문과 <고구려의 발견>,<지도로 보는 한국사>, <세상을 바꾼 수레>, <조선이 가지 않은 길> 등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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