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용과 통합은 인재 정책이 결정한다

[김영수의 新史記 열전]춘추시대 진秦 목공穆公의 리더십(2)

김영수 사기(史記) 연구가 2017.06.12 13:26 카카오톡 네이버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진 목공과 그를 보필한 인재들(좌로부 터 건숙, 공손지, 진 목공,
사불문(四不問)과 그 결실
목공과 유여의 만남은 동서 문화의 차이에 대한 수준 높은 대화로 시작되었다. 중원의 언어와 융족의 언어를 다 구사할 수 있었던 유여는 당시로서는 국제통이라 할 수 있었다. 목공은 유여의 식견에 반했다. 그러나 그 호감은 이내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서방 융족을 제압하지 않고는 동방 중원으로 진출할 수 없는 형세에서 융족에게 이런 인재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걱정거리였기 때문이다.

목공은 유여를 모셔옴으로써 진나라는 ‘네 가지를 따지지 않는’ ‘사불문(四不問)’에 입각한 인재 정책을 확실하게 마련할 수 있었다. 국적, 민족, 신분, 연령을 따지지 않고 필요한 인재를 모셔오는 이 같은 인재 정책은 지금도 실행하는 나라가 거의 없는 개방적이고 선진적인 인재 정책이 아닐 수 없었다.

전면 개방적 인재 정책인 ‘사불문’이 진나라에 선사한 가장 큰 선물은 다름 아닌 천하 통일이었다. 목공이 물꼬를 튼 개방적 인재 정책은 우선 진나라로 하여금 각종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효공(孝公)은 소국 위(衛)나라 출신의 상앙(商鞅)을 기용하여 중국 역사상 최고의 개혁을 이루어냈고, 소왕(昭王)은 위(魏)나라 출신의 범수(范睢)와 장의(張儀)를 기용하여 원교근공(遠交近攻), 연횡(連橫)과 같은 외교 책략으로 동방 6국을 잠식해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기원전 221년 진시황은 마침내 동방 6국을 완전 소멸시키고 천하를 통일했다. 진시황의 천하 통일을 도운 공신들 중에는 초나라 출시의 승상 이사(李斯)를 비롯하여 제나라 출신의 명장 몽염(蒙恬) 등이 있었다. 기원전 7세기 목공이 세워 놓은 인재 정책이 반 천 년을 면면히 이어져 내려와 결국은 천하 통일을 이룩하는데 큰 작용을 해낸 것이다.

참고로 진나라에 승상 제도가 설치된 이래 이름이 확인된 승상 25명 중 17명이 외국 출신이었다.(나머지 8명 중 7명은 국적이 알려져 있지 않고, 단 한 명이 진나라 출신이었다. 국적 불명의 7명은 외국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이는 진나라에 승상은 외국에서 모셔오는 묵시적 전통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라 하겠다.

적대(赤待)의 리더십
진 목공의 이처럼 전면 개방적인 인재 정책의 실천은 그의 리더십을 구현한 것이다. 목공의 리더십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이른바 ‘적대(赤待)’의 리더십이란 것이다. 이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동양 전통에서 ‘단심(丹心)’이란 단어는 특별하다. 변치 않는 충정이나 마음을 가리키는데 심장이나 피처럼 붉은 색으로 자신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실한 불변의 마음가짐을 이렇게 표현한 것인데, 여기서 ‘적대’라는 단어도 파생되어 나왔다.

‘적대’는 ‘적심대인(赤心待人)’ 또는 ‘적심대사(赤心待士)’의 줄임말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때 ‘적심’은 ‘단심’과 같은 뜻이다. 자신의 진정한 마음으로 상대를 대한다는 뜻이다. 리더와 인재 관계에서 이 말은 자신의 마음을 원하는 인재에게 주어 그와 더불어 영욕과 생사를 같이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된다.

인재가 어려움이나 위기에 처했을 때 일일이 배려하여 인재를 대하는 것도 ‘적대’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인재의 마음을 움직여 목숨을 걸고 함께 일할 수 있게 만드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이 ‘적대’의 가장 큰 특징은 인재를 구하고자 하는 사람이 자신의 마음, 심지어 목숨까지 내놓는다는데 있다. 그래서 당 태종은 “군주된 자가 영재들을 부리려면 ‘적심’으로 대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당 태종이 한 신하의 충직 여부를 몰라 고민하고 있자 누군가 태종에게 일부러 화가 난 것처럼 꾸며서 신하들의 반응을 보고 정직한 지 아첨꾼인 지를 가려내라고 하자 당 태종은 “군주가 거짓으로 행동해놓고 신하더러 곧으라고 할 수 있는가? 짐은 지극한 정성으로 천하를 다스릴 것이다”라고 면박을 주었다. 인재를 구하고 기용하는데 있어서 진실한 ‘적대’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당 태종은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적대’는 인재를 구하고 기용하는 대단히 극적인 방법이다. 이 때문에 그 실천 사례들도 한 편의 드라마를 방불케 할 정도로 극적인 경우가 적지 않다. 옛 선인들은 사람을 대할 때 쉬지 않고 지극한 정성으로 대해야만 “드러내지 않아도 밝게 빛나고, 움직이지 않아도 변화시키고, (행)함이 없어도 이룰 수 있다”(<중용> 제26장)고 여겼다. 따라서 선인들의 실천 또한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들은 실천을 통해 ‘적대’로 죽음으로 보답하는 인재를 얻을 수 있음을 확실히 보여주는데, 진 목공의 ‘적대’는 가장 오랜 ‘적대’ 사례로 남아 있다.

목공의 ‘적대’, 천하통일의 기틀을 놓다
기원전 647년, 진(晋)나라는 대 가뭄을 만나서 농작물을 수확할 수 없어 국내의 곡식 창고가 텅텅 비었다. 이에 다급해진 진(晋) 혜공(惠公)은 진(秦)나라에 사신을 보내 양식을 빌려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진 목공(穆公)의 입장에서 보면 이 때가 진나라를 공격할 절호의 기회였다. 왜냐하면 혜공은 목공의 도움으로 군주가 된 후에 하서(河西) 일대의 여덟 개 성을 진나라에게 떼어주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목공은 계속하여 마음 한편에 담아두고 분노를 삭이고 있었다. 그래서 현재 진나라가 가뭄으로 어려움에 처한 것은 그의 입장에서 보면 복수할 수 있는 하늘이 준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대신 공손지(公孫支)는 “흉년과 풍년은 교대 출현하게 됩니다. 도와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고, 건숙과 백리해도 “어느 나라든지 천재지변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변을 만나면 이웃나라로서 마땅히 구해 주어야 합니다. 비록 그 나라의 임금이 우리에게 죄를 지었으나, 백성들은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라며 거들었다. 목공은 대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육로와 수로를 통하여 대규모 곡식 원조를 하였다. 진나라는 간신히 백성들을 구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목공은 진나라의 백성들에게 호감을 얻었다.

그 다음해인 기원전 646년, 이번에는 진(秦) 나라에 흉년이 들어 농작물을 거둘 수 없었으나 진(晋) 나라는 대풍이었다. 목공은 사람을 보내 지난해에 빌려준 양식을 갚으라고 했다. 혜공은 빌린 곡식을 갚기는커녕 이 기회를 틈타 목공을 공격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목공은 반격할 수 있는 기회와 함께 정의의 군대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명분을 얻을 수 있었다.

양군은 한원(韓原, 섬서성 한성현韓城縣 서남쪽 일대)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 때가 기원전 645년(목공 15년)이었다. 목공은 기세등등하게 진격했다. 그러나 뜻밖에 혜공의 군대에 포위당해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될 처지에 빠졌다. 말 그대로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때 어디선가 수백 명이 큰 도끼를 들고 혜공의 군대를 향해 맹렬히 돌진하여 마구 베어 죽이니 혜공의 군대는 사분오열되어 우왕좌왕했다. 목공은 이 틈을 타서 포위를 뚫었고, 이들과 함께 승기를 잡아 도리어 혜공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목공을 구한 이들은 과연 어디서 온 누구였을까?

사연인 즉은 이러했다. 이전에 한번 목공이 양산(梁山, 섬서성 기산현岐山縣)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말 몇 마리를 도둑맞았다. 이튿날 사병들이 산등성에서 몇 백 명이 되는 시골사람들이 말고기를 먹는 것을 발견하고 목공에게 보고하면서 부대를 보내 그들을 소탕하자고 했다. 이에 목공은 “그만두어라! 말은 이미 죽었으니 지금 그들을 잡아와서 벌을 주면 도리어 사람들이 내가 말 몇 필 때문에 백성들을 해쳤다는 소리만 들을 것이다”라고 말리면서 병사들에게 몇 단지의 좋은 술을 말을 잡아먹은 백성들에게 보내면서 당부했다. “군주께서 당신들이 좋은 말고기를 급히 훔쳐다 먹다가 너무 느끼하고 소화가 되지 않을 것을 걱정하여 이 술을 상으로 보낸다” 백성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죄를 인정하였다. 바로 이들이 목공이 곤경에 처해 있음을 알고는 결사대를 만들어 목공을 구했던 것이다.

목공의 말을 훔쳐서 먹고도 벌을 받지 않고 좋은 술까지 얻어 마신 백성들은 그날 이후로 이제나 저제나 은혜 갚을 날만 기다렸다. 백성을 아끼는 목공의 마음이 이들을 감동시켰고, 그것이 결국 큰 보답으로 돌아온 사례였다.

목공이 문무 대신들을 ‘적대’로 대한 사례는 또 있다. 기원전 628년, 진(晉) 문공(文公)이 죽었다. 목공은 그 기회에 맹명시(孟明視) 등 장수로 하여금 정(鄭) 나라를 기습하도록 하였다. 가는 중에 정나라 상인인 현고(弦高)를 만났는데, 현고는 진나라가 정나라를 기습하는 것을 눈치 채고 짐짓 거짓말로 농간을 부렸다. 즉, 자신 팔려고 가져온 소를 정나라의 군주가 진나라 병사를 위로하게 위해 보낸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여 정나라가 이미 진나라가 기습을 대비하고 있다고 암시함으로써 공격을 못하도록 만들었다. 빈손으로 돌아가기가 그랬던 목공의 군대는 진(晉) 나라 국경 근처에 있던 활(滑)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철수했다. 애당초 이 공격은 명분도 없고 실익도 없는 공격이었다. 이에 자극을 받은 진(晉) 나라는 효산(崤山)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철군하는 진나라 군대를 몰살하고 세 장군을 사로잡는 전공을 세웠다.

▲진 목공의 무덤
그 뒤 외교 담판을 통해 목공의 세 장수는 석방되어 귀국했다. 목공은 건숙 등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리한 전쟁을 강행시켰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포로로 잡혔다가 돌아온 맹명시 등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번 실패의 책임은 나에게 있고 당신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사소한 잘못으로 당신들의 큰 공덕을 가려서는 안 된다”

그런 다음 세 장군의 관직과 봉록을 회복시켜주고, 또 더욱 그들을 중용하였다. 목공의 문무 대신들은 크게 감동을 받고 사력을 다해 목공을 보필했다.

몇 년 뒤 만반의 준비를 끝낸 목공은 맹명시에게 대군을 이끌고 진(晉) 나라를 공격하게 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승전보를 전해들은 목공은 상복을 입고 효산까지 와서 3년 전에 전투에 사망했던 진나라 병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백골을 수습하여 묘지를 만들어주고 그들을 위해 3일 동안 추도식을 거행하면서 대성통곡하였다. 더불어 전체 장병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맹세했다.

“장병들이여! 내 너희에게 맹세하노니, 옛 사람들은 일을 도모함에 현자의 가르침을 따랐기에 과실이 없었다. 앞으로는 이를 명심하고 두 번 다시 과오로 저지르지 않겠다”

목공은 역대 군주들 중에서 ‘적대’로 신하들을 대하여 큰 성과를 거둔 사례를 많이 남겼다. 그가 춘추시대 다른 제후국들보다 약 100년 앞서 국적, 민족, 신분, 연령을 따지지 않는 완전 개방된 인재 정책을 수립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그것이 진나라가 천하 통일을 이룩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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