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과 관련한 북한의 주장

강석승 교수 2017.04.13 09:10 카카오톡 네이버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1945년 8월 15일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우리 민족은 36년간의 일제 지배로부터 일단 벗어날 수 있었으나, 독립의 기쁨을 제대로 누리지도 못한 채 분단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전승국인 미국과 소련은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한반도를 북위 38도 선을 기점으로 양분하여 점령했으며, 이후 국제적으로는 미·소 대립과 국내적으로는 좌·우익 대결이 심화함에 따라 한반도의 분단은 굳어지기 시작하였다.

소련의 후원으로 북한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김일성은 소련을 ‘민족의 해방자’로 규정하며 소련에 대해서 우호적인 감정을 나타냈는바,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김일성이 1946년 3월 “소련은 우리 조선 민족을 해방했을 뿐 아니라 우리를 물심 량면으로 도와주고 있는, 우리의 가장 믿음직한 벗”이라며, “위대한 쏘련 인민과의 친선관계를 강화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하여야”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설립으로 분단이 공식화된 이후, 김일성은 이승만 정권을 ‘미 제국주의자들의 괴뢰’로 비하하고 이들에 대한 ‘최대의 증오심과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며 무력 통일에 전력을 다하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과 같다.

한편 이 시기에 북한은 겉으로 ‘평화통일’을 강하게 표방하였는데, 1949년 6월 조선노동당의 대표적 전위 단체인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을 결성하면서, 남북한이 동시 선거를 통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하자는 ‘평화통일 방안’을 제시한 것이 그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남한이 이런 제의를 거부하자 김일성은 이승만이 미국의 지지 하에 “전쟁의 방법으로 전 조선에 자기의 반동 정권을 세우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북한이 주장하고 있는 당시의 상황을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즉 “미제 침략자들과 그의 사촉 밑에 리승만 괴뢰도당은 오래전부터 추진시켜 온 전면 전쟁준비를 완전히 확인하고 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지르기 위한 최종 준비를 급속히 추진시켰다. 미제는 우선 덜레스를 트루맨의 특사로 남조선에 파견하여 현지에서 남조선 괴뢰군의 전쟁 준비상태를 최종적으로 검열하도록 한 것이다. 적들은 덜레스의 남조선 시찰목적과 전쟁 도발 기도를 은폐하기 위하여 마치도 남조선 괴뢰정부의 초청에 의하여 덜레스가 남조선을 방문하는 것처럼 연극을 꾸몄다… (중략)
이른바 남조선 괴뢰들의 초청에 의하여 1950년 6월 17일에 서울에 기여든 덜레스는 초청을 받은 대통령의 특사의 직분에도 어울리지 않게 6월 18일에는 벌써 미 군사고문단장 로버트와 괴뢰국방장관 신성모를 비롯한 괴뢰군의 고위 장성들과 참모들을 거느리고 38도 선에 배치된 괴뢰군 부대들에 대한 전쟁준비를 검열하는데 나섰다. 덜레스는 38도 선 일대를 싸다니면서 괴뢰군의 배치와 부대와 무기, 전투기술기재들의 동원 준비상태를 검열하였으며 지어는 경찰들의 싸움 준비상태까지 알아보았다”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무력통일에 대한 김일성의 입장은 “6·25전쟁 관련 러시아 외교문서”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문서에 따르면, 김일성은 “현 상황에서 평화통일은 불가능하다고 믿고 무력 통일 준비에 골몰해 있었으며, 김일성은 1949년 3월 소련을 방문하여 스탈린에게 무력 통일 의사를 나타냈으나, 스탈린은 북한이 남한에 대한 확실한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으며 미국이 개입할 가능성이 있다는 등의 이유로 남침에 반대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은 무력 통일을 포기하지 않았는데 이런 그의 의도는 당시 평양 주재 소련대사였던 슈티코프가 “김일성은 항상 남침 계획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을 정도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김일성은 “무력 침공을 빨리 시작하지 않을 경우 통일은 지연될 것이며, 그 동안 남한이 군사력을 길러 북한을 먼저 침공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이에 따라 김일성은 소련으로부터의 군사적 지원 및 남침에 대한 동의를 얻고자 노력했고, 마침내 스탈린은 1950년 4월 국제적 환경이 유리하게 변화했음에 주목하며 북한의 남침에 동의하자 김일성은 계획했던 대로 1950년 6월 16일 ‘평화통일안’을 남한에 제의했으며, 남한이 이를 거부하자 6월 25일 전면전을 개시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일성은 남한에 대한 무력 침공을 개시한 다음날 “전체 조선 인민들에게 호소한 방송 연설”에서 ‘매국역적 리승만 괴뢰 정부의 군대’가 6월 25일 38선 전역에 걸쳐 이북 지역에 대한 ‘전면적 침공’을 시도했으며, 그 ‘배후’에는 ‘미 제국주의자들’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김일성은 “리승만 매국역도들이 일으킨 동족상잔의 내전을 반대하여 우리가 진행하는 전쟁은 조국의 통일과 독립과 자유와 민주를 위한 정의의 전쟁”이라고 규정했다. 즉 북한은 전쟁에 대한 어떠한 준비도 하지 않았다면서 전쟁에 개입한 지 하루 만에 서울을 점령하였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6·25전쟁에 미국이 참전하자 북한은 미국에게 보다 직접적으로 전쟁의 책임을 묻기 시작했는바, 당시 김일성은 미국이 “우리 조국을 자기들의 영구한 식민지로 만들고 우리 인민들은 자기들의 노예로 만들려는“ 목적에서 6·25전쟁에 개입했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미군과 유엔군의 성공적인 반격에 의하여 북한은 38도 선 이북으로 후퇴하여 압록강변까지 밀리기도 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완전 패배에서 구출되었다.

이후 전선이 38도 선 근처에서 소강국면을 맞이하게 되자 유엔군과 공산군 양측은 휴전을 모색하게 되었으며, 1951년 7월 마침내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당시 북한은 휴전회담의 수용을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여 정복하려다 그것이 ‘실패’하니까 싸움을 중지하자고 요구했으며, ‘평화를 애호’하는 북한으로서는 이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 논리는 후에 북한이 6·25전쟁에서 ‘승리’를 주장하는데 그대로 쓰이게 되는데, 김일성은 1953년 8월 3일 발표한「모든 것은 전후 인민경제 복구발전을 위하여」라는 제목의 당 중앙위원회 제6차 전원회의 보고에서 다음과 같이 강변하였다.

“미 제국주의 침략자들의 군사적 모험은 참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원쑤들은 그들이 조선 전선에 당한 만회할 수 없는 군사·정치·도덕적 패배로 말미암아, 또한 조선에서 평화를 회복하기 위한 조·중 양국 인민의 완강하고 인내성 있는 노력과 세계 평화애호 인민들의 여론과 압력에 의하여 정전협정에 조인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조선인민은 자기의 조국해방전쟁에서 영광스러운 승리를 쟁취했습니다.”

위에서 살펴본 6·25전쟁에 대한 김일성의 입장을 요약하면, 6·25전쟁은 한반도를 식민지화하려는 ‘미 제국주의자들’이 남한의 ‘괴뢰 정부’를 앞세워 침략전쟁을 일으켰으며, 북한은 이에 대항한 ‘정의의 전쟁’을 통해 승리를 쟁취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소극적으로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일으킨 책임 및 ‘공산화 통일’이라는 전쟁 목적 달성 실패에 대한 책임의 회피를 의미하며, 적극적으로는 반미·반제 의식을 더욱 강화시키고 ‘미제에 대한 승리’라는 업적을 고
양하려는 목적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김일성은 6·25전쟁 이전에도 이미 미국을 ‘제국주의적 침략자’로, 그리고 남한의 이승만 정부를 그 ‘주구’로 규정했으며, 그들이 침략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등 미국 및 남한에 대해 상당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따른 자연스러운 귀결로써 많은 북한주민들도 이런 북한당국의 선전에 ‘길들여져’ 철저한 반미감정 및 반미사상으로 철저하게 교화되어 있었다. 즉 적어도 북한주민들에게 있어서만은 이론적으로만 자리 잡고 있던 반미·반제사상이 김일성의 치밀하게 짜인 각본에 의해 ‘6·25전쟁’이라는 대 비극을 통하여 실제화됨으로써 이런 사상을 더욱 강화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김일성이 일찍이 1950년 7월 8일에 “미국의 참전이 없었다면 전쟁은 벌써 종식되고 통일
이 달성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토로한 바가 있다. 사실 김일성은 미국이 직접 개입하지는 않을 것이고, 개입하더라고 시간이 걸릴 것이며, 그동안 남한을 점령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남침을 시도했으나 미국은 북한의 무력 침공 즉시 참전을 결정했으며, 김일성의 적화통일을 저지했을 뿐만 아니라 북한을 궤멸 일보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것이다.
강석승 사단법인 동북아교육문화진흥원 원장,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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