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楚) 장왕(莊王)의 리더십에 주목한다

[김영수의 新史記 열전]우리는 어떤 리더를 갈망하고 있는가?(3)

김영수 사기(史記) 연구가 2017.04.05 15:48 카카오톡 네이버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초나라 장왕 당시의 명인들
충고 수용과 소통의 함수관계

직언과 충고를 허심탄회하게 수용하는 리더는 드물다. 역사적으로도 그렇다. 우리 사회의 리더들은 더욱 그렇다. 직언과 충고를 수용한다면서 그것을 이용하여 인재들의 약점을 잡고 그들을 통제하려는 불순한 리더들도 적지 않다.
장왕은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필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인 남의 말을 잘 듣는 그런 리더였다. 충고도 잘 받아들였는데, 하찮고 보잘것없는 사람의 충고조차 무시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역대 코미디언들의 행적을 모아 놓은 『사기』 「골계열전(滑稽列傳)」에 나오는 이야기다.

장왕은 말을 아주 좋아했다. 옛날에는 말이 전쟁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동물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귀한 대접을 받았지만 장왕은 말을 좀 지나치게 아꼈다. 사람도 먹기 힘든 대추와 마른 고기를 먹이로 주고, 비단옷을 입혀주고 말을 침대에서 자게 했다.

이 때문에 장왕의 애마는 운동 부족에 비만으로 일찍 죽고 말았다. 상심한 장왕은 관을 잘 짜서 대부(大夫)의 예로써 장사를 지내주라고 명령했다. 신하들이 들고 일어났다. 하지만 장왕은 막무가내로 “내가 아끼던 말(馬)을 가지고 감히 말을 하는 자는 목을 베겠노라”고 엄포를 놓았다.

키가 8척에다 변설에 능하고 언제나 담소로 세상을 풍자하기를 즐기던 악공 우맹(優孟)이 이야기를 듣고는 조정에 뛰어 들어와 하늘을 우러러 통곡을 했다. 장왕이 그 까닭을 묻자 우맹은 이렇게 말했다.

“말은 폐하께서 정말 좋아하신 영물인데, 이 막강한 초나라에서 무엇을 얻지 못하겠습니까? 대부의 예로 장사를 지내는 것은 너무 야박합니다. 임금의 예로 장사를 지내야만 합니다”

장왕은 우맹에게 그 방도를 물었다. 그러자 우맹은 이렇게 청했다.

“폐하, 옥을 다듬어 속 널을 만들고 무늬가 있는 가래나무로 바깥 널을 만들며 단풍나무, 느릅나무, 녹나무 등으로 횡대를 만드십시오. 군사를 동원하여 큰 무덤을 파고 노약자로 하여금 흙을 지게 하여 무덤을 쌓고, 제나라와 조나라의 조문단을 앞에 하고 한나라와 위나라의 조문단을 뒤에서 호위하게 하십시오. 사당을 세워 태뢰(太牢, 소•양•돼지 한 마리씩을 바치는 최고의 제사)을 지내고 만 호의 읍으로써 받들게 하소서, 제후들이 이런 모습을 보고 듣게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대왕께서 사람보다 말을 더 귀하게 여긴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통렬한 풍자에 장왕은 “과인의 잘못이 그렇게 크단 말인가”라고 후회하면서 죽은 말은 평범하게 묻어주게 했다. 장왕은 우맹의 통렬한 풍자를 통한 충고를 뼈저리게 수용한 것이다.
 
장왕과 우맹 중에 누가 더 매력적인가? 장왕도 부럽고, 우맹도 부럽지만 더 부러운 것은 그런 보잘것없는 코미디언까지 나서서 최고 권력자와 소통을 할 수 있었던 그 시대의 분위기다. 물론 이런 분위기를 만드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장왕이었다. 이렇게 상하가 서로 소통이 되는 민주적 분위기가 결국은 초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다. 그렇지 않고 언로가 막혀 있거나, 최고 지도자가 귀를 꼭 닫고 있으면 그 나라의 미래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

지난 십수 년 간 우리 사회의 리더들은 입이 아프도록 소통을 떠들어댔다. 이는 소통의 부재를 역설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다. 소통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면 굳이 소통을 거론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소통은 일방통행이 아니라 상호작용이다.

중국 속담에 ‘마음이 맞지 않으면 반 마디도 많다’고 했다. 마음이 맞아야 소통의 길이 열린다는 것은 당연한 말이다. 그리고 서로 마음이 맞기 위해서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 준비가 상호작용을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이기 때문이다. 리더는 더 나아가 이 필요조건을 뛰어넘어 소통을 위한 충분조건은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초나라의 화폐
천하 패권을 가늠하다–문정경중(問鼎輕重)

기원전 606년 초나라 장왕(莊王)은 주 왕조 변경에서 군대를 사열하며 시위를 벌였다. 주의 정왕(定王)은 대신 왕손만(王孫滿)을 초군으로 보내 상황을 파악하도록 했다. 초 장왕은 왕손만에게 주 천자의 상징물인 세발솥 정(鼎)의 무게가 얼마나 나가냐고 물었다.(여기서 왕권에 대한 도전이나 중앙 최고 권력을 탈취하려는 의도를 뜻하는 ‘문정경중’이란 고사성어가 탄생했다. 이 고사는 ‘ 문정중원(問鼎中原)’이라고도 쓰며, ‘문정’이라고 줄여서 사용하기도 한다.) 주나라의 세발솥은 천자의 상징이자 지존무상으로 타인이 함부로 물을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초 장왕의 질문은 실질적으로는 주 천자의 권력에 대해 물은 것이자 천자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무례한 언동이었다.

왕손만은 초 장왕의 의도를 간파하고는, 엄숙한 표정으로 주 왕실의 통치는 덕에 있지 세발솥의 무게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국가의 정치가 밝고 분명하면 세발솥이 작아도 함부로 옮길 수 없으며, 국가의 정치가 혼란스러우면 세발솥이 아무리 크다 해도 언제든지 옮겨질 수 있다. 주나라가 700년 동안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천명이다.
지금 주 천자의 권력이 쇠퇴했다고는 하지만 천명이 아직 바뀌지 않았으니, 아무도 세발솥의 무게를 물을 권리는 없다. 왕손만의 대답은 대체로 이러했다. 왕손만의 조리정연한 말에 장왕은 더 이상 고집 부리지 않고 싹싹하게 군대를 철수시켰다.

장왕은 중원에 대한 패권에 큰 관심을 가진 야망이 큰 군주였다. 그래서 기회를 잡아 천자의 권위에 우회적으로 도전해 본 것이다. 하지만 천자의 신하인 왕손만의 당당한 태도와 빈틈없는 언변에 자신의 생각을 바로 접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크게 추락했다고는 하지만 주 천자의 권위가 여전하고, 따라서 중원의 패권을 넘보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장왕이 무력으로 주 왕실을 공격하여 쓰러뜨리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춘추시대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관의 하나는 대의명분(大義名分)이었다. 이것을 확보하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다. 장왕은 아직은 주 왕실을 넘볼 대의명분이 축적되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었다. 장왕은 흔히 무(武, 군사력)를 중시한 군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좌전』 선공(宣公) 12년(기원전 597년)조에 보이는 다음 일화는 장왕이 어떤 리더인지를 잘 보여준다.

반당(潘黨)이 말했다. “⋯ 신이 듣기로는 적을 물리치면 반드시 자손들로 하여금 그것을 보게 하여 그 공을 잊지 않게 한다고 했습니다” 초나라 장왕(莊王)은 이에 대해 이렇게 대꾸했다.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오. 대저 글자를 가지고 말한다면 ‘지과(止戈)’, 이 두 글자가 ‘무(武)’라는 한 글자를 구성한다는 것이오.”

초 장왕의 말인즉슨, 무력을 뜻하는 ‘武’ 자는 ‘止’(그친다, 그만둔다)자와 ‘戈’(창•무기•무력)자로 이루어진 글자로서, 난을 평정하고 군대(무기로 대변되는)를 쉬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무력이라는 것이다. 훗날 이 말은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뜻으로 바뀌었다. 2600년 전 장왕이란 리더의 식견이다.

▲전차를 모는 초 장왕
장자(長者)의 풍모–절영지연(絶纓之宴)

장왕은 즉위 초기 앞서 언급한 바 있는 권신 두월초의 반란으로 곤욕을 치렀지만, 명사수 양유기의 공으로 반란을 힘겹게 평정했다. 승리를 축하하기 위한 파티가 궁중에서 열렸다. 장왕은 오랜만에 실컷 즐겨보자며 무희들까지 동원하여 밤이 으슥하도록 마셨다.

날이 어두워지자 사방에 등불이 켜졌다. 그런데 갑자기 일진광풍이 몰아쳐 등불이 모두 꺼져버리고 주위는 칠흑 같은 어둠에 빠졌다. 그 순간 장왕이 아끼는 애첩의 비명이 들려왔다.

“이 무슨 해괴한 짓이냐? 대왕, 얼른 불을 밝히십시오. 어둠 속에서 어떤 자가 첩의 몸을 어루만졌습니다. 첩이 그 자의 갓끈을 끊어서 쥐고 있느니 불이 켜지면 어떤 작자인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순간 좌중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왕이 가장 아끼는 애첩의 몸을 더듬었다니, 그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죽음 면키 어려워 보였다. 침묵에 이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장왕의 우렁찬 목소리가 뒤따랐다.

“아직 불을 켜지 마라! 그리고 여러 장수들은 모두 갓끈을 끊고 갓을 벗어 던져라. 오늘밤 신나게 놀아볼 것이다. 만에 하나 갓끈을 끊지 않은 장수가 있으면 흥을 깬 벌로 당장 이 자리에서 내쫓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애첩의 몸을 더듬은 자는 영원히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술자리가 끝나고 침실로 돌아온 장왕에게 애첩은 볼멘소리로 항의했다. 이에 장왕은 왕과 신하들이 실로 오랜만에 관례를 깨고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는 중에 장수 하나가 취기에 여인의 몸을 더듬는 것은 큰일이 아니거늘, 그걸 가지고 범인을 잡는다고 소란을 떤다면 그것은 한창 흥이 오른 장수들을 무시하는 처사이자 왕의 체통을 깎는 일이 아니겠냐며 애첩을 다독거렸다. 이 일화가 유명한 ‘절영지연(絶纓之宴)’이다. ‘갓끈을 끊고 벌인 연회’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일화는 뒷이야기가 더 남아 있다. 그 뒤 장왕이 다른 나라와의 전투에서 악전고투하는 곤경에 빠졌다. 그 때 웬 장수 하나가 나서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정말 용감하게 적진을 유린하여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다. 장왕이 그 장수를 불러 공을 치하하자, 장수는 그 때 갓끈을 끊고 술자리를 계속하게 하여 자신의 실수를 감추어준 왕의 은혜에 보답하게 되어 기쁘다며 장왕에게 공을 돌렸다. 애첩의 몸을 더듬은 그 장수였던 것이다.

장왕은 인간의 얼굴을 한 리더였다. 실수도 했고, 또 그 실수를 지적하는 보잘것없는 악사의 충고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부하 장수를 곤경에 빠뜨리지 않게 하려고 모든 장수들에게 갓끈을 끊게 한 대목에서는 가슴이 넓은 장자로서의 풍모가 느껴지기도 한다. 여러 모로 매력적인 리더로서 손색이 없다. 그러나 장왕의 진정한 매력은 그가 한 나라를 이끄는 최고 리더로서 식견과 자기 성찰의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김영수 사기(史記) 연구가

김영수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고대 한·중 관계사로 석사·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92년 박사 과정 수료 후 학위를 포기하고 본격적인 중국 공부에 나섰다. 중국 소진학회 초빙이사, 외국인 최초의 중국 섬서성 한성시 사마천학회 회원이며, 영산 원불교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20년 동안 중국을 다니며 중국사의 현장과 연구를 접목해 인류 역사상 최고의 역사서『사기(史記)』를 통해 인간관계를 통찰하는 ‘응용 역사학’ 분야를 개척했다.
저·역서로는 『사마천과 사기에 대한 모든 것 1 – 사마천, 삶이 역사가 되다』, 『사마천, 인간의 길을 묻다』, 『성찰–김영수의 사기 경영학』, 『사기의 리더십』, 『완역 사기 본기本紀 1, 2』, 『완역 사기 세가世家 1』, 『현자들의 평생 공부법』, 『사마천과의 대화』, 등이 있다. 『고대 중국 야철기술 발전사』(역서)로 과학기술처 장관상을, 『사마천, 인간의 길을 묻다』로 섬서문학창작연구회로부터 ‘吉春史學奬’ 수상했다.


정치/사회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