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은 주민 주름살 펴는 것” 정치도 현장 속으로 더 낮게 더 뜨겁게 내려와야

[ 차홍규 교수가 만난사람]박수영 아주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 교수

차홍규 교수 2017.01.13 14:52 카카오톡 네이버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박수영 아주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 교수
경기도 행정1부지사를 역임한 박수영 교수는 서울법대 학사, 미국 하버드대 석사, 버지니아텍대 박사 등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인물이다. 법학을 전공하고 엘리트 코스를 밟은 사람답게 감성보다는 이성이 발달된 사람이라 생각됐으나 선입관과 달리 공통된 관심사가 많아 재미있는 인터뷰가 진행됐다. 

-‘행정의 달인’, ‘현장행정의 1인자’ 등의 별명을 갖고 있다. 별명에 대한 얘기는 뒤에 듣기로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지금 최순실 게이트와 그 이후 우리나라 정치, 너무 답답하고 안타깝다. ‘행정의 달인’이 보기에 우리나라 정치는 어떻게 되고 있는 건가. 미래가 있는 것인가

▶“엄청난 위기다. 아마 6.25이후 최대의 위기가 아닌가 싶다. 기획예산위원회 과장으로 재직할 시의 소위 IMF 위기 때보다 더 큰 위기라고 생각된다. 잘 알고 있듯이 많은 국민들이 가족은 물론 친척까지도 멀리해서 깨끗할 것이라고 믿었던 박근혜 대통령에게 배신당했다는 분노를 느끼고 있다. 하지만 정치권은 아무런 해법도 못 만들고 지루한 법적 분쟁상태에 빠져들었다.
이런 위기 상황을 우리 정치권 누구도 해결하거나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평화로운 촛불집회를 보여준 성숙한 시민들의 수준을 정치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여당이건 야당이건 4류 정치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여당은 당의 재산, 3년 이상 남은 국회의원의 임기, 계파의 이익 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소아병적인 증세를 보이고 있다. 야당도 마찬가지로 국정운영의 책임을 맡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우왕좌왕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여당의 친박·비박, 야당의 친문·비문 할 것 없이 사안별로 합의가 안 되는 이유는 각자가 ‘대한민국’을 보기보다 자기이익을 보기 때문이다. ‘행정의 달인’까지야 안가더라도 많은 직업공무원들이 지키고 있는 단 한 가지 기준, 오로지 ‘대한민국’이라는 기준을 우리 정치인들도 지킬 수 있다면, 사안은 의외로 간단할 것이다. 미래를 물어보시는데 이래서는 헌재의 결정이 나더라도 대한민국의 미래가 없다.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들이 어떻게 만드신 대한민국인데,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줘야할 대한민국인데, 이렇게 철저히 자신들의 이익에만 매달리는지 도대체 모르겠다.”

-정말로 미래가 없나. 답이 안 나오는 상황인가

▶“박근혜 대통령을 퇴진시키고 최순실 일당을 처벌하는 것은 대한민국을 더 이상 부끄럽지 않은 나라로 만드는 것보다 백배는 더 쉬운 일이다. 박근혜 대통령 이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굴러갈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민주화 이후 한 사람의 대통령도 예외 없이 임기 말에는 본인이나 가족, 심지어는 측근들이 비리에 연루되어 처벌받고 교도소에 가거나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일당에만 주목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이 아니라 껍질만 보는 것이다. 즉, 이번 사태는 박근혜 대통령 한사람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 아니라, 우리나라가 갖고 있는 구조적 문제들의 결과물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근본원인을 파악하고 처방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또다시 부끄러운 대통령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지금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회 구석구석에 민주적 방식과 생각이 정착되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국회, 법원, 정당, 지방자치단체, 학교, 기업은 물론 가장 민주적이어야 할 시민단체와 언론까지도 권위주의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몇 사람에 대한 단죄로 그칠 것이 아니라 권력구조와 선거제도의 개혁, 국회의원의 특권 폐지 등을 포함한 국가 대개조가 필요하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지방자치단체의 부지사를 오래 맡아왔다. 김문수 전 지사와 남경필 지사 두 분 지사 밑에서 연이어 부지사를 맡은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안다. 지사가 바뀌면 부지사도 바뀌는 것이 관례 아닌가
▶“그렇다. 대개 부지사들은 1년에서 1년 반 정도 일하고 나면 행정자치부 등 중앙부처로 복귀하는 것이 보통이다. 제 경우에는 김문수 전 지사가 놓아주지 않아서 4년 반이라는 상당히 긴 기간을 함께 일하게 됐다. 남경필 지사가 부임했을 때도 곧바로 행자부로 복귀하려고 했는데 도와달라고 요청해 이런저런 일이 겹치다보니 1년 반 가량을 함께 일하게 됐다.”
▲박수영 아주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 교수

경기도가 인구도 서울보다 300만명 가까이 많은 지자체인데, 행정이 쉽지 않을 것 같다. 기조실장과 부지사로 일하는 6년 동안 여러가지 사건사고가 많았을 텐데 가장 기억나는 사건이 있다면

▶“아무래도 판교 환풍구 사고가 아닌가 한다. 책으로 쓰면 한권 분량은 충분히 나올만큼 숨은 얘기가 많은 사건이다. 다행히 사흘낮밤을 집에 못 들어가며 유족들을 위로하고 협상한 결과 57시간 만에 타결되어 장기화되지 않았다. 판교 사고는 2014년 10월17일, 하필 남 지사가 독일로 출장을 가는 비행기 속에 있을 때 발생해서 부지사인 본인이 나서서 수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오후 5시58분에 환풍구가 무너졌는데 처음에는 세월호처럼 어린 학생들이 많이 희생됐다는 엉터리 보도도 나와 무척 긴장했었다. 오후 6시30분쯤 현장에 도착해서 그 지역 국회의원, 성남시장, 경기도 소방재난본부장 등과 근처 부동산 사무실을 빌려 첫 회의를 진행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법상으로는 성남시에 국한해서 일어난 사고라 성남시장이 대책본부장이 되어야 하는데 성남시장이 극구 못 맡겠다고 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도지사와 성남시장이 공동대책위원장을 맡기로 타협하고 수습에 들어갔다.
사고 난 날이 금요일 저녁인데, 월요일 오전 3시30분에 협상이 타결되어 합의서에 부지사인 저와 유족대표단이 사인을 하고 곧바로 오전 5시30분부터 발인에 들어가서 잘 마무리됐다.
합의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성남시에서 발생한 사건인데도 성남시장이 끝까지 사인을 않겠다고 해서 결국은 성남시장 사인 없이 합의서가 작성됐다. 얼마 전 사고 2주년을 맞아 부상자가족 대표님이 찾아와 감사패를 주고 가셔서 감회가 새로웠다.”

오랜 공직생활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했는데 공직생활을 지탱해 준 모토 같은 게 있는지

▶“있다. ‘행정은 주름살 펴기’라는 모토다. 부하직원들에게도 틈나면 얘기해 주고 있다. 서울시장 비서관 시절, 달동네 64개를 전부 방문한 적이 있었다. 달동네 주민들에게 가장 어려운 게 무엇인지 물어봤는데 한 할머니께서 놀랍게도 “화장실 문고리를 달아 달라”고 하셨다.
그 당시 달동네는 집집마다 화장실이 있는 게 아니고 마을 어귀에 간이 화장실이 설치돼 있었는데, 둘러보니 정말 안쪽에 문고리가 없었다. 아침마다 20-30명이 줄을 서는데 안쪽에 있는 분들이 얼마나 불안했겠나. 그게 당시에 개당 40원 정도 했는데, 1주일 만에 서울시내 모든 달동네 화장실에 다 달아주도록 했다. 우리 행정이 그 정도는 한다. 1주일 뒤 토요일에 다시 그 달동네에 가서 제대로 장착했는지 점검했는데, 그때 그 할머니가 오셔서 손을 꼭 잡고 90도로 인사를 하시면서 “너무 기분이 좋아서 마치 이마에 주름살이 펴지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띵 하고 한방 맞은 것 같았다. 세상에 40원 짜리 문고리 하나에 주름살이 펴지는데, 도대체 이 땅의 행정은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나, 나는 또 고시출신이라고 폼만 잡고 있었지 이런 현장을 제대로 보지 않고 있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이후, 제 모토가 “행정은 주름살 펴기”가 되었다. 이 땅의 정치도 제발 현장 속으로 더 낮게 더 뜨겁게 내려왔으면 좋겠다.”

-안산에 있는 사할린 동포마을과 뗏골마을 등 고려인에 대한 애정이 깊다고 들었다. 부지사 시절은 물론 그만둔 뒤에도 찾아가고 정기적으로 후원도 하는 것으로 안다. 고려인을 도와주는 특별한 이유는
▶“이 분들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난다. 고려인이 어떤 분들인지 우리 국민들이 아는 듯 하면서도 잘 모른다. 1937년 스탈린이 사할린 등 러시아에 살던 우리 동포들을 강제로 기차에 태워 중앙아시아 이곳저곳에 내려놓았다.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키즈스탄 같은 곳이다. 약 18만명이 이동했는데 첫해 겨울에만 약 10% 가량이 목숨을 잃는다. 추위와 배고픔 때문이었다.
그때 살아남은 분들의 후손이 바로 고려인이다. 참 순박한 분들이 많다. 가족단위로 들어와 계시는 분들도 많고, 조국에 돌아올 거라고 결혼도 우리끼리 한 분들이 대부분이다. 동네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한번 봐라. 완전히 우리나라 사람이다. 외모로는 당연히 아무도 구분 못한다. 우리 핏줄이니까. 초등학교만 나오면 한국말도 잘 한다.
나라가 지켜주지 못해 일제에 짓밟힌 조국을 떠난 분들이고,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나라 대한민국에 돌아오고 싶어하는 분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분들을 따뜻하게 받아주기는커녕 불법체류자로 단속한다. 국제법상 국가가 해서는 안 되는 행위 중 1순위인 일종의 기민(棄民)행위다. 이 분들을 따뜻하게 대하고 도와주는 것이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비오는 날이면 리처드 용재 오닐의 섬집 아기를 즐겨 듣는다고 들었다. 이 노래와 관련된 무슨 특별한 인연이 있는지

▶“얘기를 하다 보니 또 안산 얘기가 나오게 된다. 안산은 우리나라 최대의 다문화도시다. 세계적인 비올리스트인 용재 오닐이 이 도시에서 다문화아이들을 모아 ‘안녕, 오케스트라’라는 합주단을 만들었다. 국적도 피부색도 제각각이고 사연도 가지가지인 아이들이다.
폭력을 휘두르는 아빠로부터 엄마와 함께 도망쳐 나온 선욱이는 늘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다닌다. 자신을 사회에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무언의 표시다. 아빠가 흑인병사였던 다니엘은 피부색이 검다고 눈이 유달리 희고 크다고 놀림을 받는다. 상상속의 친구와만 대화하던 원태는 할머니에게 자신을 맡기고 떠난 엄마 아빠가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다. 단원들 모두가 크고 작은 상처를 가진 이 땅의 다문화아이들이다.
리처드 용재 오닐 자신도 아이들과 똑같은 상처를 안고 자랐다. 미국으로 입양된 지적장애인 어머니를 둔 탓에 동네 형들로부터 욕을 먹기도 하고 코가 낮다고 피부색이 다르다고 놀림을 받으며 자랐다. 그런 그가 다문화아이들을 돕고 있어 나도 돕고 싶었다. 마침 이 오케스트라 얘기를 다큐멘터리로 만드는데 예산이 부족하다고 도움을 요청해왔다. 미약하지만 일부를 지원해줬다. 또한 경기도 필하모니와 협연을 하고 싶다고 해 주선도 해줬다. 이러다가 정이 들어버린 거다. 섬집 아기는 용재 오닐이 연주회 때마다 꼭 연주하는 곡이다. 비오는 날 조용히 들으면 저절로 눈물이 난다.”

-일과 공부, 두 가지 다 원없이 해 봤을 것 같은데, 어떤 일, 어떤 공부가 가장 힘이 들었나
▶“물론 공부는 하버드대학 때가 제일 힘들었다. 읽고 가야할 숙제가 많아 거의 오전 3시까지는 공부했던 것 같다. 목 뒤가 통나무처럼 딱딱해져서 아내가 지압하려 해도 손가락이 안 들어갈 정도였다. 그때 이후로는 공부가 아무리 어려워도 쉽게 느껴졌다. 바닥을 경험하고 나면 겁이 없어지는 것 같다.
일도 마찬가지다. IMF사태 극복을 위해 만든 기획예산위원회에서 과장으로 일할 때도 그랬다. 나라가 부도 직전이라 초긴장 상태였다. 새벽 3~4시 퇴근은 예사고 아예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날도 많았다. 이렇게 6개월 몸을 혹사하며 근무했더니 같은 과 사무관 2명이 폐렴에 걸렸고, 나도 한쪽 눈의 실핏줄이 터져버려서 한동안 애꾸처럼 안대를 하고 일해야만 했다. 그때 이후로는 일이 아무리 어려워도 ‘IMF때만 하겠느냐’라고 생각한다. 일하는 데 겁이 없어진 거다.”

-서울법대에 이어 하버드대학까지 나온 공직자가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머리도 좋아야 하겠지만 학비가 만만치 않았을 텐데, 혹 금수저 출신 아닌가
▶“오해하는 분들이 간혹 있다. 어릴 적 부모님이 모두 선생님이셨다. 집안 좋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50~60년 전 교사 월급은 정말 박봉이었다. 기억에는 없지만 내가 태어난 곳은 부산 문현동 달동네라고 들었고, 기억 속에 있는 최초의 집은 좌천동 산복도로 맨 끝 집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밑에서 걸어 올라가다 우리 집은 왜 이리도 높은 데 있나 하고 한숨을 쉰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공직을 떠난 뒤 그 집을 찾아가 봤는데 입구가 바뀌어서 한참을 헤매긴 했지만 다행히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사진설명=좌)차홍규 교수, 우)박수영 아주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 교수

-그림은행의 구상을 처음 시작하였다는데

▶“김대중 정부 시절 중앙인사위원회란 기구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였다. 새로 사무실을 구하고 책상도 구입해 배치하고 창립 작업을 했었다. 사무실을 잘 만들고 나서 벽면에 그림도 붙여서 일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은데 예산이 200만원정도 밖에 없었다. 이 돈으로는 제대로 된 그림 한 점도 걸 수가 없고 소위 ‘이발소 그림’이나 사서 걸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김광웅 전 서울대교수가 위원장이었는데 아이디어를 줬다. 부근에 있던 갤러리 현대와 협의해서 수장고에 보관 중인 그림을 우리 중앙인사위원회 벽면에 걸기로 했다. 우리는 진품을 걸고, 갤러리는 작품을 홍보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봤다.
당시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이걸 알고는 청와대도 가짜 그림 말고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품을 빌려 걸었다. 이후 문화부가 그림은행사업을 시작해서 많은 기관들이 진품 그림을 걸기 시작했다.”

-우리 같은 문화, 예술인들에게 할 얘기가 있다면
▶“서초동에 화가협동조합이 있다. 존경하는 교수님 한 분이 은퇴하고 무보수로 돕고 계신 단체다. 교수님 덕분에 알게 된 건데, 우리나라 화가 중 1% 미만만 형편이 괜찮고 나머지는 물감 살 돈도 없다고 한다. 문화, 예술인 전체가 아마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급속한 경제성장, 정체된 가계소득, 지출 많은 사교육비 등의 이유로 우리가 문화를 향유하지 못하는 상태다. 국민소득이 3만달러 가까이 많이 올라갔지만 삶의 질은 1만달러 시대와 별로 다를 게 없다. 국민들의 마음을 챙겨주는 문화·예술에 돈과 시간을 쓰지 않는다. 그러니 문화·예술인들이 맘 놓고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지지 않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예술혼 하나로 작품 활동을 하는 대다수의 문화. 예술인들께 존경의 염을 표한다.”

인터뷰를 끝내고 사람은 인상만 가지고는 판단이 힘든 것 같다. 처음에는 박 교수를 보며 속으로 너무 경직된 사람 아닌가하는 느낌 속에 인터뷰를 시작했는데 대화를 해보니 소외된 다문화 사람에 대하여도 따뜻한 정을 가지고 있고, 미술은행 제도에 대한 계기를 만들어줬으며, 예술인에 대한 존경의 마음까지 가지고 있어 처음의 우려가 부끄러웠다. 우리 같은 예술인들은 정말 정치를 모른다.
박 교수의 말처럼 정말 ‘대한민국’을 생각하는 정치가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 사회는 박 교수 같은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행정가, 정치가가 있는데 왜 이리도 시끄러울까. 외신들이 현재 한국의 정치상황을 ‘민주주의의 아고라’라고 표현했다 한다. 친박·비박, 친문·비문의 당리당략을 떠나 우리 같은 예술인들도 신나게 작업할 수 있는 정치를 소망한다면 무리일까 자문해본다. 이파리 떨어진 겨울나무 곁에서 따듯한 커피가 생각나는 박 교수와의 인터뷰였다.”

@대담 차홍규 전 칭화대 교수

■박수영 교수
1986년 2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법학사)
1988년 2월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행정학석사)
1996년 6월 미 하버드대학교(정책학석사)
2005년 8월 미 버지니아 텍(행정학박사)
2007년 10월 대통령비서실 인사수석실 선임행정관
2009년 11월 행정안전부 인사기획관
2015년 9월 경기도 행정1부지사
現 아주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 초빙교수

■차홍규 교수
서울과기대 학사, 홍익대 석사, 동신대 박사 / 장애인 기능올림픽 운영위원 역임. 기능올림픽, 장애인 기능올림픽 심사위원 / 제2회 국제디자인(KJDA) 공모전 심사위원 / 88올림픽 기념 공모 작품전 등 서울시장상 및 장관상 등 다수 수상 / 한-중 수교 20주년 초대전 작가(주중한국대사관, 주한중국대사관) / 한국 전업미술가협회 자문위원, 한-중 조각가협회 고문, 한국조각가협회 회원 / 개인(초대)전 32회, 단체전, 국제아트페어 등 300여회 / 전 정수폴리텍대학, 우송대학교 교수, 북경 칭화대학교 미술대학 정년퇴임 / 현 한중미술협회 회장, 현재 중국 광저우 화남이공대학 고문 교수, 폴리텍 대학 화성캠퍼스 명예교수 / 북경 SUN ART 갤러리 전속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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