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기억해야 아픈 역사 되풀이하지 않아"

최영희 기억의 터 조성 추진위원회 상임대표, "기억의 터, ‘잊지 말자’는 의미"

홍세미 기자 2016.08.12 10:49 카카오톡 네이버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동생과 나물을 캐고 있었어요. 트럭이 지나가다가 멈추더니 저를 잡아가려고 했어요. 동생은 너무 어려서 저만 데려가려고 했어요. 동생이 너무 많이 우니까 그 어린 동생도 잡아갔어요. 트럭에 실려 도착한 곳은 군부대였어요. 막사 옆에 칸칸이 있고 들어가자마자….”

광복을 맞이한지 71년이 지났다. 일제강점기는 1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는 일본과의 관계가 껄끄럽다. 한국과 일본 사이엔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많다.

그 중 하나는 정신대다. 살아있는 위안부는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일본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유감스럽다’는 말로 사과를 대신한다. 곪아있던 감정은 지해 12.28협정에서 폭발했다. 일본이 10억엔을 보상한다고 밝히자 국민이 분노했다. 협의에 반발해 전국적인 모금운동이 전개됐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기억하기 위한 장소인 ‘기억의 터’가 이달 완공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미래세대에게 진실을 알릴 수 있는 메모리얼파크다. 최영희 기억의 터 추진위원장은 위안부 추모공원을 만드는 게 ‘산 넘어 산’이었다고 밝혔다. 공원을 만들기까지 쉬운 게 하나도 없었다. 특히 힘들었던 것은 사람들의 ‘인식’이다. 최 상임대표는 “위안부에 대한 시각이 많이 개선됐다고 하지만 아직 멀었다”고 말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의미를 담은 기억의 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기 위해 최 상임대표와 인터뷰했다.

▲최영희 기억의 터 조성 추진위원회 상임대표
-기억의 터가 이달 완공될 예정이다. 조성 계획은 언제부터 했나

▶한국의 정신대 문제는 국제적으로 많이 알려졌다. 국민성금으로 걷어 세운 소녀상과 매주 수요일에 열리는 집회가 국제적으로 유명해졌다. 인권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한국을 찾기도 하는데 우리나라에 그들을 추모하는 공원이 하나도 없다. 사실 위안부 문제를 위해 싸워왔던 사람들은 메모리얼파크 건립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일이 많다. 살아계신 정신대 할머니들이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발만 동동 굴렸다. 한 분이라도 더 살아계실 때 메모리얼파크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지난해 5월 실천에 옮겼다.

-위안부 추모공원 건립은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나
우리가 위안부를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것이다. 서러움과 역사적인 기억을 영원히 가져가겠다는 약속이다. 일본이 인정하지 않고, 없던 일로 하려는 정신대 문제는 우리는 시간이 지나도 기억하겠다는 의미다.

-상임대표를 맡은 계기가 궁금하다
▶18대 국회의원일 때 가끔 수요집회에 나갔다. 소녀상을 만들겠다고 모금운동을 하고 있더라. 모금함을 보니 1000원이나 5000원짜리가 많았다. 그것만으로 소녀상을 만들기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국회에서 모금하겠다고 했다.

의원들과 국회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에게 알려 모금을 진행해 소녀상 만드는 일에 보탰다. 사실 NGO활동이 참 어렵다. 운영비, 인건비도 모금하기 힘들다. 누가 책임을 지고 나서기 힘들다. 처음 대표를 맡아달라고 했을 때 사실 주저했다. 나는 이미 은퇴한 사람이었다. 그래도 내가 대표를 맡아 모금하면 조금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돼 대표직을 수락했다.

-운동권에 몸 담았는데, 정신대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본 적이 있었나
▶사실 나는 노동운동을 하던 사람이다. 정신대 문제에 몰두해서 일한 적이 없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정대협을 만들기도 했지만 내가 몸담았던 분야와 영역이 달랐다. 할머니들을 너무 먼발치에서 본 것 아닌가 하는 반성도 들었다. 상임대표 제안이 왔을 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맡았다. 해보니까 힘들긴 하더라. 모금으로 일을 진행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기억의 터 조감도
-기억의 터에 정부 예산이 들어가지 않았나

정부 예산은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100% 국민모금으로 진행했다. 시작할 때 ‘우리 손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정했다. 우리 손으로 세운 소녀상조차도 정부가 일본에 휘둘려서 옮기라고 하지 않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나 어떤 이해관계 얽힌 사람들의 의지가 작용돼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 순수한 할머니들의 뜻을 반영할 수 있는 사업이 돼야 한다. 스스로 돈을 내겠다는 사람들의 기금으로 공원을 만들었다.

정치권에 위안부 평화비를 세우거나 평화길을 제안하는 의견이 있었다. 국회에 정원이 있으니 평화길을 만들고 그 안에 비석을 세우자는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다. 또 서울시의회에서도 평화비를 세우자는 의견이 있었다. 위안부를 기릴 수 있는 추모장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국회에서, 서울시의회에서, 정대협에서, 일반 여성운동권에서, 문화분야에서 각각 모여 추진위를 만들었다.

-기억의 터 위치는 남산 옛 통감관저터다. 의미 있는 장소인데
통감관저터는 이완용과 데라우찌가 한일협정을 맺은 장소다. 특히 그곳에 악명 높은 중앙정보부가 있었다. 이곳에 위안부 추모공원을 만드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접근성도 높다. 남산으로 올라가는 공원 산책로 입구에 있어 시민들이 오기 쉽다. 사실 장소를 정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서대문 독립공원 쪽에 만들자는 게 1안이었다. 그런데 그쪽에서 반대하는 의견이 있었나 보다. 그쪽에서 시간을 많이 끌었다. 시간이 너무 많이 지체돼 2안인 남산 옛 통감관저터로 목표를 바꿨다. 서울시 공원심의위원회의 심의를 받았는데 끝내 허가가 났다. 공원을 만들기까지 쉬운 게 하나도 없었다. 정말 ‘산 넘어 산’이라는 말이 딱 맞았다. 세상이 좀 바뀐 줄 알았는데 아직도 우리 사회는 위안부에 대한 인식이 약한 것 같다.

-모금은 언제부터 진행했나
우리는 11월에 기억의 터를 만들 계획으로 모금하겠다고 밝혔다. 12.28 한일협정이 체결되면서 전국적으로 분노했다. 우리 손으로 100억원을 만들자는 여론이 형성됐다. 모금을 집행할 단체인 정의기억재단이 만들어졌다. 위안부 문제로 모금기관이 두 단체로 나뉜 것이다. 언론이나 거리모금은 정의기억재단에서 하고, 우리는 추진위원들이 주변 인맥을 중심으로 모금했다. 그렇게 분야를 나눴다. 그래서 원래 우리가 목표로 잡았던 것보다 금액을 줄였다. 돈이 너무 많으면 감당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해 목표를 낮췄다. 결국 3억5000만원 정도 모였다. 2만명이 조금 안되게 참여했다.

-어떤 식으로 모금을 진행했나
국회의원들에게 이런 사업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편지를 썼다. 나와 친분이 있는 야당·여당 의원들이 많이 참여했다. 의미 있는 사업이니 여야 가리지 않았다. 나는 절대 강제로 모금하지 않았다. 강제적인 것은 의미가 없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모금을 해야 뜻 깊다.

강요하지는 않더라도 적극적으로 많이 알려야겠다고 느낀 적이 있다. 영화 ‘귀향’을 보고 난 후였는데 어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귀향’을 만들 때 모금을 진행했는데 7만3000여명이 참여했다고 하더라. 거기에 내 이름이 없었다. 아무도 내 이름이 없다고 해서 욕하지 않는다. 특히 내 이름이 흔하지 않나. 아마 같은 이름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모금을 하지 않은 것이 정말 창피했다. 그 이후 혹시라도 소식을 알지 못해 모금을 못하는 사람이 있을 가능성을 생각했다. 우리는 언론에 홍보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적어도 주변 사람들에게는 다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많이 알리려고 노력했다.

▲최영희 기억의 터 조성 추진위원회 상임대표
-12.28 한일협정은 어떻게 보나

일본은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일본은 ‘너희들이 돈 벌기 위해 간 것이고, 군인들이 돈 주고 한 것’이라는 식이다. 책임지지 않고 있다. 군인들이 간 것에 대해 유감스럽다고 한다. 정신대 자체에 대한 사과는 하지 않았다. 지난해 12월28일 이뤄진 한일협정에서도 그런 태도가 드러났다. 할머니들이나 위안부 관련 투쟁을 했던 사람들이 돈 때문에 싸운 게 아니지 않나. 일본은 진정한 사과를 하지 않았다.

정부는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합의’라고 했다. 우리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도장을 찍지 않는 것이 낫다. 불가역적 합의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 협정 이후 다시 거론하지 않고 있는데 이런 합의는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정부가 어떤 자세로 위안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위안부 할머니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바로 명예회복이다. 일본정부가 한국 여자들을 강제로 납치하고 끌고 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 이후 배상해야 한다. 지금은 배상부터 하지 않았나. 정신대에 동원된 인원이 20만명이다. 이들의 인생을 비참하게 하고 그것에 대한 대가로 100억원을 제시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현재 우리 사회가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다고 생각하나
12.28 협정 이후 둘로 갈라졌다. 위안부 문제에 꾸준히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은 ‘그만하지, 협상했잖아’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억울하지만 언제까지 이 문제를 끌고 갈 순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반대로 더욱 분노하는 사람도 있다. 정부가 한참 분위기를 띄울 때 분노한 감정을 꾸준히 가진 사람도 있다.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 지난 기억의 터 시공식에서도 이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이게 핵심이다. 사회가 아픈 역사를 직시하고 공감할 줄 아는 능력을 키워갔으면 좋겠다. 요즘 추세가 조금이라도 슬프거나 무거운 내용은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이 결국은 우리를 불행한 역사로 끌고 간다. 우리의 아픈 역사일지라도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 되풀이되지 않는다. 꼭 우리 마음속에 담아뒀으면 좋겠다.

최영희 기억의 터 조성 추진위원회 상임대표
-1950년 전라북도 전주 출생
-이화여자대 사회학 학사
-도서출판 석탑 대표
-한국여성민우회 초대 부회장
-대한출판문화협회 이사
-내일신문 발행인, 대표이사
-제18대 국회의원 (비례대표/민주당)
-민주통합당 공천심사위원회 위원
-민주통합당 정책위원회 부의장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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