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자가 직분을 다하고 원칙을 따르면?

[김영수의 新史記 열전]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사람들

김영수 사기(史記) 연구가 2016.08.11 14:18 카카오톡 네이버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사마천은 법이 통치의 수단이나 도구가 되긴 하지만 인간의 선악과 공직의 청탁을 가늠하거나 결정하는 근본적인 도구는 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그 유력한 근거로 치밀한 법망을 갖추고도 통치 효과를 제대로 거두지 못했던 진(秦)나라의 빠른 멸망과 가혹하고 치밀한 법망을 가지고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던 한 무제의 통치 사례를 거론했다. 사마천은 이렇게 말한다.

“법령이 정치의 도구이기는 하나 백성들의 선악(善惡)과 청탁(淸濁)을 다스리는 근본적인 제도는 아니다. 과거 천하의 법망이 그 어느 때보다 치밀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백성들의 간교함과 거짓은 도리어 더 악랄해졌다. 법에 걸리는 관리들과 법망에서 빠져나가려는 백성들과의 혼란이 손쓸 수 없을 만큼 극에 달하자 결국 관리들은 책임을 회피하고 백성들은 법망을 뚫어 나라를 망할 지경으로 끌고 갔다. 당시 관리들은 타는 불은 그대로 둔 채 끓는 물만 식히려는 방식의 정치를 하였으니 준엄하고 혹독한 수단을 쓰지 않고 어찌 그 임무를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권122 ‘혹리열전’ 중 사마천의 논평)

‘봉직순리奉職循理’

다음으로는 법의 기능과 이를 집행하는 관리들의 바른 자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법령이란 백성을 선도하기 위함이고 형벌이란 간교한 자를 처단하기 위함이다. 법문과 집행이 잘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착한 백성들은 두려워한다. 그러나 자신의 몸을 잘 수양한 사람이 관직에 오르면 문란한 적이 없다. ‘직분을 다하고 이치를 따르는 것(봉직순리, 奉職循理)’ 또한 다스림이라 할 수 있다. 어찌 위엄만으로 되겠는가?”(권119 ‘순리열전’ 중 사마천의 논평)

법을 집행하는 공직자가 사사로운 욕심에 물들지 않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 법을 떠받들면 법의 근본적인 기능이 제대로 행사될 수 있다는 말이다. 요컨대 공평하게 법을 집행하려는 관리의 의지와 자기수양이 전제된다면 법은 얼마든지 너그러워질 수도 있다는 논리다.

▲도면3-1. 백성을 위해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정신으로 봉사한 공직자들의 기록인 ‘순리열전’의 첫 부분 사마천의 논평.
사마천의 법 정신의 요점은 법조문 자체의 엄격함이나 치밀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집행하는 공직자의 처신이 법조문을 가혹하게도 너그럽게도 만들 수 있다는데 있다. 법을 집행하는 자가 법을 지킬 의지가 없다면 법조문은 아무리 많고 지독해도 소용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나라의 법전을 철저하게 정비한 개혁가 상앙(商.)은 “법이 지켜지지 않는 것은 위에서 법을 어기기 때문이다(법지불행자상범야, 法之不行自上犯也)”(‘상군열전’)라고 일갈했던 것이다. 법은 강제력이지만 그것이 철두철미 공평무사하게 집행된다면 통치와 백성들의 거리를 가깝게 만드는 소통의 수단이 될 수 있다. 법도 어디까지나 인간 사유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완벽에 가까운 법체계를 갖추고도 진나라가 일찍 망한 가장 큰 원인으로 ‘막힌 언로’를 꼽았다. 요컨대 법을 집행하는 자가 백성들의 목소리와 그들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그저 가혹하게만 굴었다는 것인데, 이는 법 집행에 있어서 유연한 융통성의 필요성을 함께 지적한 것이다.

법과 인간의 함수관계

<순자> ‘군도(君道)’에 보면 “어지럽히는 군주는 있어도 어지러운 나라는 없다(有亂君無亂國, 유난군무난국). (잘) 다스리는 사람이 있을 뿐이지 (잘) 다스리는 법은 없다(有治人無治法, 유치인무치법)”는 대목이 눈에 띤다. 아무리 좋은 법과 제도를 갖추어도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으면 법과 제도는 유명무실해진다.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인 진나라는 거의 완벽한 법과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진시황은 그것을 더욱 확대하고, 여기에 각종 문물제도를 통일하는 놀라운 시스템을 창안했다.

하지만 진나라는 20년을 못 버티고 단명했다. 법과 제도를 운용하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어지러운 나라는 없다. 못난 리더가 자리에 앉아 제도와 법을 어지럽히고, 법을 집행하는 자들이 자기들 멋대로 법을 유린하기 때문이다. 법을 가장 잘 아는 자들이 법을 가장 많이 어기고 악용하는 까닭도 그 사람의 법의식이 삐뚤어져 있고, 사사로운 욕심에 지배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몽테스키외는 10년이 넘는 시간을 들여 <법의 정신>(1748)을 완성했다. 그는 영국 헌법의 원리를 상세히 분석하여 ‘법을 연구하자면 선험적인 이론으로서는 안 되며, 우리들이 생활하고 있는 구체적 현실의 상황에서 출발하여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리하여 개인의 자유는 국가권력이 사법 ·입법 ·행정의 3권으로 나뉘어 서로 규제 ·견제함으로써 비로소 확보된다고 하는 그의 삼권분립론은 미국 독립 등 전 세계에 영향을 주었고, 19세기 자유주의가 옹호하게 되는 기본적 자유의 규정에 공헌하였다.

사마천은 몽테스키외보다 약 2천 년 앞선 인물로, 군주의 권력이 모든 것을 지배하던 체제에서 살았다. 따라서 개인의 자유나 삼권분립과 같은 근대적 법 정신과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몽테스키외가 말하는 구체적 현실의 상황에서 출발하는 법의 정신은, 법의 집행에 있어서 공익우선과 지배층의 솔선수범, 즉 백성의 삶을 우선할 줄 아는 집행자의 수양과 처신을 강조한 사마천의 법의 정신은 본질적인 면에서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서양과 다른 이념과 문화를 가지고 수천 년 동안 살아온 동양의 법의식을 봉건적이라 하여 무조건 배척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작동하고 있는 나름의 법 정신을 발견하여 참조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사마천이 <사기> 곳곳에서 보여주는 법에 관한 소중한 인식들이 그래서 귀한 것이다.

▲도면3-2. 순자는 단호하게 말한다. 나라를 잘 다스리거나 어지럽히는 것은 법의 문제가 아니라 리더의 문제라고. 나라를 어지럽히는 리더는 있어도 원래부터 어지러운 나라는 없다는 순자의 지적이 비수처럼 와서 꽂힌다. 정확하게 지금 우리를 겨냥한 말이 아닌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사람들

사마천은 이러한 법 정신에 입각하여 백성들을 위해 멸사봉공의 자세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공직자들 이야기를 ‘순리열전’에 수록하고 있다. 먼저 사마천이 ‘순리열전’에 편입한 인물들의 면면을 표로 살펴보자.

사마천은 백성들을 위해 봉사한 공직자들 다섯 명을 ‘순리열전’에 소개하고 있는데 모두 춘추전국시대 인물들이다. 이는 혹리들만 설쳐대던 자기 당대에 대한 비판이자 풍자인데, 실제로 순리와 대척점에 있는 혹리들을 소개하고 있는 ‘혹리열전’은 죄다 사마천 당대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통해 사마천은 청백리 유형의 공직자와 탐관 유형의 공직자를 선명하게 비교하고 있다.

이제 ‘순리열전’에 보이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공직자들의 행적을 좀 더 살펴보자.(맨 위쪽에 자리한 손숙오와 정자산에 대해서는 별도의 지면을 통해 알아볼 생각이다.)

먼저 전국시대 노나라의 재상을 지낸 박사 공의휴다. 그는 출중한 능력과 재능으로 재상이 되었다. 법을 존중하고 솔선수범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이치에 따라 정치를 펴나갔다. 공의휴는 한마디로 변칙을 몰랐던 공직자였다. 불법과 비리는 말할 것도 없고 악의 없는 융통성도 용납하지 않는 원칙에 철저한 그런 공직자였다.

그는 나라의 녹을 먹는 공직자들은 백성과 이익을 다투어서는 안 된다는 태도를 강력하게 주장했고, 그 자신 몸으로 실천했다. 즉, 돈을 많이 받는 공직자가 더 많은 돈을 벌거나 차지하기 위해 백성들의 이익을 갉아 먹는 파렴치한 행동을 끔찍하게 혐오했다. 백성들의 존중을 받는 만큼 그 책임을 다하라는 철학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공직자로서 아주 사소한 물건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누군가 공의휴에게 생선을 보내왔다. 재상이 생선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보낸 작은 성의였다. 하지만 공의휴는 생선을 돌려보냈다. ‘생선을 좋아하면서 왜 받지 않냐’고 측근이 묻자 공의휴의 대답은 이랬다.

“생선을 좋아하기 때문에 받지 않는 것이다. 지금 내 녹봉으로도 생선 정도는 얼마든지 살 수 있다. 그런데 생선을 받기 시작하다가 파면되고 나면 누가 다시 생선을 보내겠는가?”

이런 일도 있었다. 공희휴가 자기 집 텃밭에서 나은 채소를 먹어보니 너무 맛이 좋았다. 공의휴는 바로 채소밭의 채소를 죄다 뽑아 버리게 했다. 또 자기 집에서 짠 옷감의 질이 너무 좋자 베 짜는 아낙들을 다 내보내고 베틀을 불살라 버렸다. 공의휴의 말이다.

“채소가 맛있다고 우리 집 채소를 먹고, 옷감이 좋다고 우리 집 옷감을 입으면 농사짓는 농부와 베 짜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김영란 법’이 시행되기도 전에 흔들어대는 정치판과 언론의 작태를 보노라면 한심하다 못해 분노가 치민다. 굴비 값과 소고기 값을 들먹이며 농어민과 축산업에 타격을 갈 것이라며 설레발을 친다. 정말이지 삶은 소대가리가 웃을 노릇이다. 부디 공의휴가 보여준 청렴의 1/10만이라도 본받을 수 있다면 원이 없겠다.

약 2,600여 년 전 진(晉)나라의 사법관 이리(李離)라는 인물이 나온다. 이리가 누군가의 거짓말을 듣고 무고한 사람에게 사형을 판결하여 그 사람을 죽게 했다. 사법부에 의한 살인을 저지른 셈이다. 그러자 이리는 자신을 옥에 가두게 하고 자신에게 사형 판결을 내렸다. 당시 통치자였던 문공이 이 이야기를 듣고는 그건 이리의 잘못이 아니라 이리 밑에 있는 실무를 담당한 부하의 잘못이니 자책하지 말라고 했다. 이에 이리는 이렇게 말했다.

“신은 담당 부서의 장관으로서 관리에게 직위를 양보하지 않았고, 많은 녹봉을 받으면서 부하들에게 이익을 나누어주지도 않았습니다. 판결을 잘못 내려 사람을 죽여 놓고 그 죄를 부하들에게 떠넘긴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문공은 그런 논리라면 너를 사법관으로 기용한 나한테도 죄가 있는 것 아니냐며 이리를 용서했지만 이리는 또 이렇게 말한다.

“사법관에게는 법도가 있습니다. 법을 잘못 적용하면 자신이 그 벌을 받아야 하고, 잘못 판단하여 남을 죽으면 자신이 죽어야 합니다. 임금께서는 신이 그런 것까지 의혹을 풀 수 있다고 생각하여 사법관으로 삼으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거짓말을 믿고 사람을 죽였으니 그 죄는 사형에 해당합니다.”

▲도면 3-3. 이리의 자결은 ‘이리복검’이란 고사를 남았다. 그리고 이 고사는 드라마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사진은 그와 관련된 안내장의 표지이다.
그리고는 스스로 자결하여 사형을 대신했다.

나라를 이끄는 공직자들의 행태들이 가관이다. ‘직분을 다하고 이치에 따르는’, 즉 ‘봉직순리(奉職循理)’하는 공직자는 그만두고라도 최소한 인간으로서 보이지 말아야 할 추한 모습까지 다 보이고 있으니 앞으로가 더 걱정이다. ‘법을 잘못 적용하면 자신이 그 벌을 받아야 하고, 잘못 판단하여 남을 죽으면 자신이 죽어야 합니다’라는 이리의 일갈이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 여럿의 삶을 망친 판결을 내린 파렴치한 판사들, 권력자의 눈치만 보면서 선량한 국민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이고 기소하는 정치 검찰 등 지금 우리 사법 공직자의 모습들과 겹치면서 좀처럼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다.

김영수 교수

김영수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고대 한·중 관계사로 석사·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92년 박사 과정 수료 후 학위를 포기하고 본격적인 중국 공부에 나섰다. 중국 소진학회 초빙이사, 외국인 최초의 중국 섬서성 한성시 사마천학회 회원이며, 영산 원불교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20년 동안 중국을 다니며 중국사의 현장과 연구를 접목해 인류 역사상 최고의 역사서『사기(史記)』를 통해 인간관계를 통찰하는 ‘응용 역사학’ 분야를 개척했다.
저·역서로는 『사마천과 사기에 대한 모든 것 1 – 사마천, 삶이 역사가 되다』, 『사마천, 인간의 길을 묻다』, 『성찰–김영수의 사기 경영학』, 『사기의 리더십』, 『완역 사기 본기本紀 1, 2』, 『완역 사기 세가世家 1』, 『현자들의 평생 공부법』, 『사마천과의 대화』, 등이 있다. 『고대 중국 야철기술 발전사』(역서)로 과학기술처 장관상을, 『사마천, 인간의 길을 묻다』로 섬서문학창작연구회로부터 ‘吉春史學奬’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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